도달할 수 없는 기준을 향해 살아가는 인간의 방식
쇼펜하우어의 말 12 : 진리가 우리에게 기쁨을 안겨주고 평안을 베풀지는 못한다. 그런데 왜 인간은 진리를 찾는가.
진리를 추구했다는 기만이 마음에 평안을 주기 때문이다.
인간은 왜 진리를 찾는 것일까.
내 생각에는 인간이 불확실성을 견디기 어려운 존재이기 때문인 것 같다.
삶의 중심 어딘가에 절대적인 기준이 하나쯤 박혀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사람들은 그 기준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의미 있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어떤 인간도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일까.
어쩌면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진리를 향해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종종
달성할 수 없는 것에 다다르고자 하는 노력 자체를
숭고하게 느낀다.
사람마다 그 기준의 모습은 다르다.
누군가는 종교에서 그것을 찾고
누군가는 철학이나 이념에서 찾는다.
어떤 사람은 과학에서, 어떤 사람은 도덕에서 찾는다.
형태는 다르지만 구조는 비슷하다.
인간은 언제나 삶의 중심에
어떤 절대적인 기준을 세워두고 싶어 한다.
종교는 그 구조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례 중 하나다.
예를 들어 기독교에서는 하나님과 성경의 말씀이 진리라고 말한다.
인간은 완전할 수 없지만 그 기준을 향해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완벽에 도달할 수 없는 존재가
완벽을 기준으로 삼아 살아간다.
이 구조는 묘하게 인간적인 느낌을 준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많은 사람들이 그 기준을 향해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아가기보다는
그 기준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인간은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그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는 이야기 속에서 삶을 견디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인간은 결국
어떤 착각과 기만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나는 그것이 반드시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주는 너무 크고
인간은 너무 작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진리를 좇거나 사용하고 싶지 않다.
다만 오래된 언어가
지금의 나에게 말을 걸 수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성경을 읽는다.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수천 년 전의 기록이 지금의 나에게도 어떤 감각을 전달하는지,
내가 사는 시대와 연결되는 생각의 통로를 제공하는지
그것이 나에게 더 중요한 문제다.
교회를 처음 가는 사람들이 흔히 묻는다.
“믿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하지만 나는 그 질문이
어쩌면 조금 단순한 질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모두 믿는 것은 아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밖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은 어떤 객관적인 사실이라기보다
한 인간의 내면에서만 성립하는 마음 상태에 가깝다.
그 내면과의 대화는
오직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다.
그래서 믿음은 증명될 수 없다.
어쩌면 믿음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한 인간이 세계를 견디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생각한다.
인간이 진리를 찾는 이유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진리를 향해 살아가고 있다는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삶을 이해하려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