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적 불만과 고통이 인간을 변모시키는 이유
쇼펜하우어의 말 13 : 한 인간의 영혼이 자기 자신의 실체에 대해 좀 더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신의 의지가 곧 나의 의지다.
자기 자신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나는 그것이 타인의 평가를 듣는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을 타자처럼 바라보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잠시 내려놓고,
나는 무엇인가를 묻게 되는 순간이다.
인문학은 보통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다.
반면 과학은 다른 질문을 던진다.
나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인간은 더 이상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그저 진화의 산물이며, DNA를 운반하는 생명체일 뿐이다.
흥미롭게도 종교 역시 인간을 비슷한 자리로 데려간다.
신이라는 절대자 앞에서 인간은 하나의 개체에 불과하다.
나는 1년 넘게 교회를 다니면서 이 사실을 조금씩 느끼게 되었다.
교회라는 공간은 인간을 분명하게 타자화시키는 장소였다.
설교를 듣고 기도를 하다 보면
이 세계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 말씀이라는 감각이 생긴다.
그때부터 묘한 변화가 생겼다.
아파트 가격 이야기, 주식 이야기,
아이 교육을 위해 이사를 간다는 이야기 같은
세속적인 주제들이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자연스럽게 그 흐름 안에 있었는데
지금은 약간의 거리감이 생겼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순간을
세속적 불만을 느끼는 시기라고 말한다.
나 역시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아직 확신은 없다.
신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여전히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나의 의지가 어디에서 오는지,
그리고 나의 욕망이 어디까지 나의 것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만약 모든 것이 신의 의지라면
나의 의지 역시 그 일부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면 묘하게 마음이 편해진다.
모든 것을 내가 통제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잠시 벗어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인간은 결국 유한한 존재다.
그래서 때로는 나 자신을 세계의 중심에서 내려놓는 일이
나를 이해하는 가장 솔직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쇼펜하우어의 말 14 : 절망과 고뇌는 삶을 적극적으로 변모시킨다…
즐거움, 행복, 만족은 소극적인 감정이다.
조던 피터슨 교수가 한 퇴역 해병대 군인에게 질문한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군 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군인은 이렇게 답했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훈련이었다고.
피터슨 교수는 다시 물었다.
“왜 그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까?”
군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힘들었지만, 그 훈련이 자신을 강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고통이 왜 인간에게 깊이 남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고통에는 항상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저항이 있고
장애물이 있고
넘어야 할 무언가가 있다.
그래서 고통은 인간을 움직인다.
그 경험은 장기 기억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 기억은 인간의 내면을 강화시킨다.
결국 우리는 그 경험을 통해
스스로의 의지를 더 높은 기준으로 설정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고통이 인간을 더 살아있게 만든다고도 말할 수 있다.
물론 고통이 곧 행복은 아니다.
고통 이후에 찾아오는 만족이나 행복은
대개 짧은 감정이다.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즐거움과 행복은 대부분 사후적인 감정이다.
어떤 일이 끝난 뒤
잠깐 스쳐 지나가는 느낌에 가깝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그 감정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추적하는 일이다.
내가 느끼는 만족감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그 근원을 따라가 보면
대부분 그 출발점에는 고통이 있다.
고통은 불쾌하다.
하지만 고통에는 분명한 대상이 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나를 앞으로 움직이게 만든다.
어쩌면 인간은
행복을 위해 사는 존재라기보다
고통을 통과하며 스스로를 변모시키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삶을 돌아보면
우리는 끊임없이 고통을 피하려 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나를 바꾸는 순간은 대부분
그 고통을 통과할 때 찾아온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나는 지금 고통을 피하며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나를 변모시키는 고통을 통과하며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