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공동체는 평균을 기준으로 작동하는가
쇼펜하우어의 말 8 : 공동체는 말 그대로 공동의 가치관과 동질성이 있어야 하는데 … 공동체를 존속하는 가장 편리한 방법은 저급한 인격을 고상한 인격으로
교육하기보다는 고상한 인격이 저급한 인격을 흉내 내게 만드는 것이다.
공동체를 먼저 정의할 필요가 있다.
좁은 공동체는 목적이 같다.
운명이 같고, 무엇인가를 원하고 추구한다.
그래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끼리 모인다.
회사, 팀, 동호회 같은 집단이 여기에 가깝다.
반대로 큰 공동체는 사회와 국가다.
특정한 목적을 가진 집단이 아니라, 서로 다른 욕망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아가는 거대한 집합체다.
그렇다면 쇼펜하우어가 여기서 말하는 공동체는 무엇일까.
나는 여기서 이 공동체를
“어느 시대를 살아가는 사회의 일원들이 구성하는 민주주의 사회”
라고 정의해보려 한다.
즉 사회와 국가라는 공동체다.
이렇게 정의하면
‘공동의 가치관과 동질성’이라는 말도 다시 보인다.
그것은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회 전체를 지탱하는 큰 윤리와 행동 규범에 가깝다.
법처럼 강제되는 체계라기보다
“이 정도는 지켜야 같이 살 수 있다”는
느슨한 합의 같은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하나 있다.
공동체는
모든 인간이 같은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것은 불가능하다.
세상은 천태만상이고
인간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동체를 관리하는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국가든, 작은 조직이든
공동체는 항상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
분열을 두려워하고
통제가 어려워지는 순간을 두려워한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사상과 가치관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래서 공동체는
다른 방식을 택한다.
나는 여기서 질문이 생겼다.
왜 공동체는
저급한 인격을 교육해 끌어올리려 하지 않는가.
왜 반대로
고상한 인격이 저급한 인격을 흉내 내게 만든다고 말하는가.
좋은 공동체라면
평균을 끌어올려야 하는 것 아닌가.
왜 공동체의 존속 원리가
평균을 낮추는 방향으로 설명되는 것일까.
공동체의 존속 원리의 제1원칙이
평균의 수준을 낮추는 것인가.
그래야만
저항이 없기 때문인가.
생각을 계속 밀어보면
결국 하나의 현실로 돌아온다.
사람을 끌어올리는 교육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비용이 많이 들고
무엇보다 저항이 크다.
교육이라는 것은 애초에
목적을 가진 행위다.
무엇을 좋은 것으로 가르칠 것인지
무엇을 바람직한 인간으로 만들 것인지
그 방향이 반드시 들어간다.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는
애초에 가치관이 하나가 아니다.
수많은 세계관이 있고
삶의 조건도 다르다.
이 상황에서
어떤 ‘고상함’을 기준으로 삼아
모든 사람을 끌어올리려 하면
필연적으로 큰 마찰이 생긴다.
반대로
고상한 인격이 스스로 낮추는 방식은
훨씬 쉽다.
저항이 적고
관리하기 편하고
무엇보다 빠르다.
이건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
공동체가 실제로 작동하는
관리의 논리에 가깝다.
국가 공동체에서
공통 규칙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가장 뛰어난 사람의 수준에 맞추면
대부분의 사람은 따라오지 못한다.
가장 높은 윤리와 성찰을 기준으로 규칙을 만들면
많은 사람은 그것을 불편해한다.
그래서 공동체는 자연스럽게
이 방향으로 움직인다.
가장 많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
가장 많은 사람이 불편해하지 않는 규칙
가장 많은 사람이 거부하지 않는 기준
결국 공동체는
최고의 인간이 아니라
평균의 인간을 중심으로 작동한다.
이 과정에서
고상한 인격이 공동체 안에서 살아남으려면
선택지가 많지 않다.
자신의 기준을 그대로 밀어붙이면
엘리트주의자로 낙인찍히기 쉽다.
복잡한 언어와 높은 기준을 그대로 드러내면
소통이 안 되는 사람으로 보인다.
다수의 리듬을 무시하면
공동체의 적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고상한 인격은
종종 저급한 인격을 흉내 내게 된다.
표현을 낮추고
언어를 단순하게 만들고
자신의 기준을 숨긴다.
공동체는 그 행동을 칭찬한다.
왜냐하면
그 편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갈등이 줄어들고
관리 비용이 낮아지고
저항이 최소화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불편하다.
왜 공동체는
어리석은 자에게 맞추는가.
답은 아마 이것일 것이다.
공동체의 규칙은
“최고를 키우는 장치”가 아니라
“충돌을 줄이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충돌을 줄이려면
가장 많은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하다.
그래서 기준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간다.
의도적으로 낮춘다기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동체가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문장을
이렇게 다시 읽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엘리트의 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저급한 인간을 비난하지도 않는다.
단지 이렇게 말할 뿐이다.
공동체는 사람을 끌어올리는 방식보다
사람을 낮춰 평균을 맞추는 방식이
더 쉽게 작동한다.
그 편이 더 싸고
더 빠르고
더 덜 싸운다.
이 문장을 받아들이는 순간
공동체를 보는 눈이 조금 달라진다.
왜 공동체는
자꾸 단순한 언어를 요구하는가.
왜 복잡한 문제를
단순한 구도로 설명하려 하는가.
왜 평균의 정서를
지나치게 의식하는가.
왜 탁월함이
종종 불편한 존재가 되는가.
그래서 마지막 질문이 남는다.
공동체가 평균으로 수렴하는 것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구조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질문만 남는다.
나는
이 평균의 논리를 이해한 채
내 기준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리고 더 잔인한 질문 하나.
지금 나는
공동체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 기준을 조금씩 낮추고 있지는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