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어오는 길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걷다가 마주치는 계절의 변화,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 그리고 때로는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있던 생각들까지. 특히 둘레길 걷기는 내가 좋아하는 취미 중 하나다. 코스별 둘레길을 걷고 난 뒤 도장 하나를 찍을 때마다 작은 성취감이 차오르곤 한다.
작년 봄이었다. 양 옆으로 벚꽃 나무가 줄 맞춰 늘어선 길을 걸었다. 꽃잎은 하늘하늘 춤추듯 떨어지고 있었고, 봄바람은 한껏 부드러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 한편이 쓸쓸했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서글퍼졌던 걸까. 얼른 휴대폰을 꺼내 벚꽃 사진을 찍어 친구에게 보냈지만, 그것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었다.
늘 나는 관계에 있어 완벽을 추구했다. 친구라면 마음 깊은 곳의 이야기까지 나눌 수 있어야 하고, 정기적으로 만나야 하며, 서로의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높은 기준으로 인해 정작 내 곁에는 아무도 없는 것만 같은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었다.
그러다 급히 준비해서 떠났던 한 달간의 유럽 여행이 내 생각을 바꾸어놓았다. 처음으로 낯선 이들과의 낯선 여행지에서 '동행'이라는 이름으로 만났다. 나보다 10살은 어린 청년과 커피를 마시며 들었던 청춘의 꿈, 사업체를 운영하는 여행자와 나누었던 인생 이야기. 각자의 이야기가 모여 만들어내는 특별한 순간들. 여행지라는 특별한 공간이 만들어낸 자유로움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관계를 규정짓지 않은 채 그저 순간을 즐길 수 있었다. 이해관계가 없는 사이에서 보다 진솔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평소 가지고 있었던 고민에 대한 이야기까까지도. 함께 하는 순간에는 서로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다음 여행지로 이동할 땐 미련 없이 떠났다. 다음 여행지에는 또 새롭게 만날 인연들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얼마 전에는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만나지 못했던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났다. 한 친구의 결혼 소식이 우리를 다시 모이게 했다. SNS로 서로의 일상을 조용히 지켜보며 지내다가 만난 터라 그랬을까, 어제 만난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교복을 입고 장난치던 열여덟의 기억을 나누다가도, 각자의 자리에서 단단해진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미소 짓게 되었다. 간간이 생존 신고하듯 나누는 메시지만으로도 이렇게 따뜻한 우정이 이어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과 둘레길을 걸었던 그날도, 내게 특별한 의미로 남아있다. 살짝 어색했던 첫인사, 걸으며 나누었던 이야기들, 그리고 각자의 일정으로 흩어져갔던 마지막 순간까지.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추억으로 남아있다.
벚꽃이 피고 지듯, 인연도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임을. 때로는 짧은 만남으로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때로는 오랜 시간 느슨하게 이어지기도 하며, 또 때로는 깊어지기도 한다. 모든 관계에 깊이를 요구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즐기면 되는 것이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벚꽃은 피어날 것이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마음으로 그 길을 걸어보려 한다. 혼자여도, 누군가와 함께여도, 그 순간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울 테니까. 모든 만남이 각자의 방식으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