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부단한 사람

짐스럽지 않은 기록

by 진아

평소에도 생각이 많은데 오늘은 각종 생각들이 무한 증식되는 날이다.

최근 여행을 다녀온 후로 여행 사진 정리하는 김에 핸드폰에 있는 몇 해 동안 묵혀뒀던 사진들을 정리하는데

이제까지 쌓아왔던 사진의 양이 실로 방대하여 바람 한 점 없는 망망대해를 돛단배를 타고 떠 있는 심정이 되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이 사진을 한 큐에 다 정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니 그저 밥 먹듯 꾸준하게 매일매일 정리해야 되겠다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지금은 다행히 그걸 조금씩 해나가는 중이다.

이제 2년 정도의 분량이 남았다.


사진을 정리하면서 나란 사람에 대해서, 말하자면 현타가 왔는데

내가 정말 이고 지고 끌고 안고 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정리 못 하는 사람 특, 언젠가는 필요할 거야를 시전함.)

언젠가 필요할 사진이라며 끌고 안고 쌓아둔 그 세월.

이게 기록인지 미련이지 모를 만큼 쌓아두고 어찌하지도 못하고 있다.

무엇을 위한 기록인지 그것 조차 이젠 불분명하다.

SNS를 하는 것도 아닌 데다 모든 사진이 잘 나온 것도 아닌데

어쩐지 사진을 지우려고 할 때마다 그때 그 순간, 감정들이 내 곁에서 떠나가는 것만 같은 감상에 젖는 거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감상적이었던 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아니다. 더 솔직하자면

7할은 귀차니즘 때문이다. 자세히 보고 비교하여 체크하고 살펴보기 귀찮은 게으른 마음.

그러면서 욕심이 많아 휘뚜루마뚜루 지우지도 못하는 미련을 가진 미련덩어리.


몇 만 장의 사진을 당장은 아예 다 지울 강단은 없어서 한 땀 한 땀 외장하드로 옮기는 중인데

아마 외장하드로 옮겨간 자료들은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열어보지 않을 수 있겠단 직감이 든다.


스스로 끝맺음이 확실하고 정리를 잘하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가 바라는 모습에 지나지 않았음을 느끼면서 나는 우유부단한 사람이라는 새로운 자아 발견을 하게 된다. 그래, 이런 사람을 두고 우유부단하다고 하는 거지. 거기에다 기록을 남겨둔다는 적당한 핑계로 게으름을 합리화하기까지 한다.

외장하드로 옮겨간 정리되지 않은 사진들은 다만 마음의 위안일 뿐인 걸 알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다.

사람이 단박에 바뀔 수는 없으니까.


사진, 메모장, 심지어는 브런치 작가의 서랍에까지 여기저기 그때를 부여잡은 기록들이 흩어져 있다.

그때그때 쌓아둔 것들은 그 순간은 분명 기쁨이었는데 이젠 짐스럽게 느껴진다.

바로 해버리면 30초면 되는 일을 나중이 되면 몇 배의 시간을 써서 들여다봐야 하니까.


지금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면 쌓아두지 말고 말기

photo_2024-12-15_22-01-15.jpg 정리만 잘하면! 그때 그 느낌이 사진 한 장으로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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