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선택이 만든 삶의 여유

by 진아

즐겨 듣던 라디오에서 베스트셀러 '고전이 답했다'의 저자 고명환 씨가 출연했다. 재밌게 듣던 중에 그의 말 한마디가 내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줬다. "책을 읽지 않기 때문에 여유가 없는 겁니다."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모든 이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24시간. 그 시간 속에서 누군가는 책을 읽으며 마음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현대 사회는 너무 바쁘니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진행자의 말에 대한 그의 대답은 나에게 던져진 화두였다.

그는 하루에 딱 10페이지만 읽어보라 권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권유로 들렸지만, 점점 그 말의 깊이가 와닿기 시작했다. 동영상과 쇼츠에 익숙해진 나는 사유 능력이 점점 메말라가고 있음을 이미 예전에 느꼈는데 5분짜리 영상도 끝까지 보지 못하고 건너뛰기 일쑤였고, 긴 글은 집중해서 읽기가 점점 어려웠다. 그래서 그의 권유를 듣자 내가 그동안 시도해 온 작은 노력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작년부터 하루 10분 독서를 시작했다. 큰 기대를 가진 채 시작한 건 아닌데 막상 하고 보니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다. 콩나물시루에 물을 뿌리면 그냥 흘려내리는 것 같아도 어느새 콩나물이 자라 있는 것처럼 그렇게 매일 10분이 차곡차곡 쌓이니 1년 동안 30권의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솔직히 좀 놀랐다.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연쇄살인범의 시선으로 들여다본 인간 본성과 기억의 문제를 생각하게 했다. 특히 주인공이 자신의 과거와 대면하는 과정에서, 나도 어떤 기억을 선택적으로 보존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5.18 민주화운동을 다양한 목소리로 풀어내며 역사적 아픔을 공감하게 했다. 이 책은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역사적 사건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게 해 주었고, 개인의 삶과 국가적 비극이 어떻게 얽히는지 깊이 성찰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내 삶의 풍경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꼭 뭔가를 알아야겠다는 마음으로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사유하고 흡수되는 그 과정이 좋았다.

스마트폰으로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던 시간이 줄었고, 이제는 책 속 인물들의 삶과 생각을 들여다보며 나만의 사색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지하철에서, 잠들기 전 침대에서, 점심시간 짧은 휴식 중에도 책은 나에게 정신적 휴식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재밌게 읽은 책을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책에 대한 소감을 함께 나누는 시간도 기대하지 않았던 즐거운 시간 중 하나였다.

올해는 더 큰 목표를 세우고 싶었지만, 그 마음은 내려놓기로 했다. 완벽을 추구하다 시작조차 못했던 내 지난날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늘 10페이지만 읽자"와 "오늘 10분만 읽자"처럼 부담 없는 목표를 매일매일 할 수 있을 때, 그때 진정한 꾸준함의 힘이 발휘된다. 결국은 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바삐 움직이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다는 마음을 주는 딱 이만큼의 정신적 공간이 훨씬 좋고, 나에게 그런 호흡의 여지를 주고 싶다는 쪽으로 마음이 바뀌었다.

그 마음가짐이 특히 아침시간에는 더 유효한데 일어나자마자 스마트폰을 집고 메시지를 체크하거나 이메일을 체크하는 대신 그 서두르던 마음을 내려놓고 단 1분이라도 가만히 누워 있어 보았다.

시간상으로 따지면 채 5분이 안 되는 잠깐의 시간이라도 일상의 작은 숨결이 삶의 활력을 느끼게 해 준다. 헐떡거리던 마음을 잠시나마 쉬어가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준다. 기지개 한 번 켜기, 천천히 움직이기가 일상의 질을 바꾸어놓았다.

독서를 통해 배운 이 '천천히 삶을 음미하는 태도'는 자연스럽게 다른 일상 습관으로도 확장되었다. 그중 가장 의미 있는 변화가 잠들기 전 감사일기 쓰기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책을 읽다 보니, 그날의 순간들을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최근에 유퀴즈에 출연한 송혜교 씨가 5년 동안 감사일기를 쓰고 있다고 해서 화제가 됐었는데, 나도 이미 감사일기를 쓰고 있던 터라 굉장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일기를 쓰는데 드는 시간 단 10분. 시간이 없다며 미뤄왔던 작은 습관이 얼마나 큰 변화를 만들어내는지 새삼 놀랍다. 문득 그 라디오에서 들었던 말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스스로에게 시간을 내어주지 않기 때문에 여유가 없는 것이다."

여유란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다. 짧은 시간 속에서 나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작은 선택이다. 습관적으로 서두르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화려한 휴가나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 속 작은 선택들에서 비롯되는 내면의 평온함이다. 여유는 쫓기듯 얻으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호흡하는 순간에 찾아온다.

그 작은 시작이 가져온 큰 변화를 돌아보며, 나는 오늘도 10분의 독서와 10분의 감사로 내 삶에 여유를 선물한다. 하루 10분의 작은 습관이 만든 내 삶의 변화—이 소중한 순간을 천천히,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음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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