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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May 29. 2023

내 그릇의 크기는

다시 곱씹어 보는 조언 

왜 종종 그럴 때가 있다.

누군가 나에게 해줬던 얘기가 불현듯 떠오르면서 다시 곱씹어 보게 될 때 


예전에 시사 스터디를 할 때였다. 스터디를 함께 하는 4살 위 오빠가 문득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OO 이는 본인 생각이 분명한 사람인데, 그 그릇을 좀 넓히면 좋겠다 싶어. 더 많은 생각들을 담을 수 있도록." 당시에는 내 생각이 많이 편협되어 있다는 건가? 하는 약간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 말을 넘어갔다. 

돌이켜보면 이런저런 실없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처럼 보였어도 냉철하게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잘해주던 사람이었다. 


시사에 대한 얘기들을 주로 하던 스터디라 사회적 이슈나 쟁점에 대해서 얘기를 의견을 나눌 일이 많았다. 그런 얘기들을 할 때는 어느 한쪽의 입장에 확실히 서게 될 때가 많다. 

가령 예를 들어 안락사는 어떤지, 사형제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낙태법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통일에 대한 생각, 중국과 미국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 민영화에 대한 생각은 어떤지. 복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은 어떤지. 등등 

우리 삶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된 무수히 많은 쟁점 사항들이 있다. 


이런 수많은 얘기들을 나누면서 그 오빠는 내가 얼마나 옳고 그름을 나만의 기준으로 판단하는지 간파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나마 내가 그런 줄 알고 있다는 게 다행이면 다행이다. 그래도 여전히 옳고 그름의 잣대로 판단했다가 내가 또 그랬구나를 반복하는 중이다. 하물며 당시의 나는 아마도 내 논리로 무장을 하고 있었을 거다. 그리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을 거다. 

나와는 다른 입장을 틀린 입장으로 생각하는 내 싹수를 보고 그 오빠는 그런 조언을 해줬으리라.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때의 그 얘기가 불현듯 떠오른다. 


'그릇을 넓혀서 다양한 생각들과 의견을 담을 수 있는 사람'


다양한 의견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인정하고 나는 내가 생각하는 바를 차분히 말할 수 있다면 나와 네가 함께 넓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릇이 넓지 못하면 내 안에 담을 수 있는 내용들이 많지 않다. 

몇 가지 담지 못하고 곧 그릇 밖으로 담지 못한 내용들이 철철 흘려 넘쳐버릴 테니까. 

그렇게 무수히 흘려버린 배우고 익힐 수 있었던 기회들이 참 많았을 거다.

 

생명을 때리거나 죽이기

거짓을 말하고 속여서 다른 누군가에게 손해 끼치기 

주지 않는 것을 훔쳐 가진다거나 탐하기

부정한 행위 하기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기 


이런 것들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어떤 의견이든 가질 수 있는 것 아닌가.

종교적으로나 문화나 정서적으로 이해해야 될 부분들도 많다. 그렇지만 '명예살인'과 같은 생명을 때리거나 죽이는 행위에 해당되는 것은 중교나 문화라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의 부분은 아닐 거다.

이런 부분들을 잘 구분하고 살필 수 있는 게 지혜인 것 같다.

진부한 얘기처럼 들려도 많이 듣고 많이 수용할 수 있어야 지혜의 문이 열리는 것 같다.

그 안에서 분별력도 생긴다. 그것이 통찰력이지 않나. 


옳고 그름으로 구분 짓고, 내 생각이 옳다고 주장할 때

다른 이의 얘기를 경청하지 못하고 내 할 말에만 골몰하게 될 때  

'그릇을 키우면 좋겠다.'는 그 조언이 생각난다. 

다시 생각해 봐도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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