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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May 31. 2023

오해를 줄이는 듣기와 말하기

'여시아문'을 아시나요.

점심시간이었다. 고등어조림 하나와 비빔밥 하나를 시켜두고서 L과 같이 먹던 참이었다.

그가 불쑥 얘기를 꺼냈다. 

"다 듣는 게 달라. 내가 말한 의도는 그게 아닌데 예상외의 대답을 하더라고."

궁금함이 생겨서 무슨 일인지 물었더니, 상황은 이랬다. 


지방 출장 일정이 있는 P를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다고 한다.  

문득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가는지 차량을 이용해서 가는지 궁금함이 생겼고 이렇게 물어봤다. 

"OO시 갈 때 어떻게 가기로 했어요? 차량으로 가요?"

으레 "버스 타고 가요." 혹은 "KTX 타고 가요." 또는 "운전해서 가기로 했어요." 정도의 대답을 예상했는데 그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P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어디 지방 출장 가면 놀러 가는 줄 아나 봐요. 질투를 하는 건지..."

"아니... 저는 정말 어떻게 가는 건지 궁금해서 물은 건데..."

그 답변을 듣고 그는 당황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예상과는 다른 대답을 했던 P는 지방 출장이 가기 싫어서 한창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고 한다. 

업무가 과중된 상태에서 번외로 가는 출장이라 불편한 심경이었다나. 

그러니 P에게 "어떻게 가나요?" 이 질문이 단순히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마 스트레스 요인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L과 나는 말이라는 것이 듣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르게 들리다는 것에 동의했다. 

그때 감정의 상태, 몰두하는 생각, 겪어온 경험치, 성격, 말하는 상대에 대한 느낌 등 모든 상황의 기반 위에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내뱉는 의도의 말이 상대에게 그 의도 그대로 도달하기란 거의 0%에 가까운 확률이 아닐까. 나와 동일한 선상에 놓인 사람만이 내가 하는 말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 줄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말을 하다가 서로를 오해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 


한 사람이 하나의 통로라고 했을 때  

말이 나와서 그 통로를 거치면서 그 통로만이 가지고 있는 과정을 지나야 할 것이고 그럼 결론적으로 들어갈 때의 말과 도출되는 말이 다른 말이 되어 있을 수 있다. 상대방은 다른 의미로 들리고 이해될 수 있다.

출장을 가기 싫었던 A는 "어떻게 가요?"라는 말이 불편하게 들렸지만 

출장에 기꺼웠던 B는 "어떻게 가요?"라는 말을 관심의 표현으로 받아들여 즐거워할 수 있다.

 

사람이 가진 인식의 과정과 결과가 각기 다르니 동일한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 오히려 매우 드문 일이다.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파장에 따라 굴절율이 달라지는 것처럼 사람이 가진 그 파장이 각기 다르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자각은 현실과 맞아떨어지는 상상이다." 
-영국의 인지심리학자 크리스 프리스 

그러니 내가 듣고 이해한 그 말이 실제 그 사람이 말한 대로 인지 확신할 수 없고 다만 나한테 그렇게 들린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전할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와 '나는 이렇게 들었다.'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무슨 차이일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는 내가 내 식대로 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말이다.

내가 이해한 말이 그렇다는 게 아니고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이해한 바가 곧 그 사람이 말한 것이 된다. 이건 내가 내 식대로 들었다는 생각도 또 내가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표현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사실에 가깝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다. 


반면에 '나는 이렇게 들었다.'는 내가 그렇게 들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일단 중심이 나에게 있다. 상대방이 어떤 얘기를 했는데 나는 그렇게 들렸다는 것이기 때문에 이건 훨씬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잘못 들을 수도 있고, 내 식대로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상태기 때문이다.


상대방에 말에 오해가 생기거나 말싸움을 할 때 주로 이렇게 말하곤 한다.

"네가 그때 그렇게 말했잖아." "내가 언제 그랬어?"

"그런 의미로 얘기한 거 아니야? 그런 줄 알았는데?" "그런 의미로 얘기한 거 아니야"

내가 들었던 말을 사실이라고 인지하는 오류가 생기기 때문에 말로 아웅다웅하게 된다.


그렇지만 내가 잘못 들을 수도 있고, 내 식대로 들을 수 있다는 걸 인지한다면 

말은 자연스럽게 훨씬 부드러워진다. 

"나는 이렇게 들었는데 어때?"

"나는 이렇게 들었었는데 그런 의미가 맞을까?"

자연스럽게 재확인하고 묻게 된다. 


내가 그 사람이 되지 않고서야 '아' 다르고 '어' 다른 말을 어찌 있는 그대로 알 수 있을까.

정말 서로 오해 없이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언제든 내가 내 식대로 듣고 내 식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안 상태에서 그걸 인정하고 시작해야 되지 않을까? 그래야 서로 묻고 확인하고 들어주는 과정들이 이어질 것이고 이게 소통 같다.


불교 경전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시아문'

해설하면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부처님 말씀을 기록한 경전이지만 부처님이 직접 서술하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듣고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가 아닌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로 문장이 시작된다.


생활 속 '여시아문'을 잘 살펴야 되겠다. 

그것만 해도 좀 더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고 묻게 될 것 같다. 

"저는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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