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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Jun 22. 2023

새삼스런 관짝소년단

에서 시작된 차별에 대한 생각

몇 해 전 ‘관짝소년단’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아프리카 가나의 한 장례식장에서 관을 든 상여꾼들이 운구를 하며 유쾌한 춤을 추는 영상이 SNS에 퍼졌다. 망자를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 상여꾼들이 관을 들고 춤을 추는 가나의 장례 문화가 담긴 영상으로 국내에서는 그룹 방탄소년단의 이름을 따 관짝소년단이라고 불리며 그 밈이 회자됐다.


이색적인 졸업사진을 찍기로 유명한 고등학교에서

이 관짝소년단을 패러디해서 졸업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을 본 가나 출신 방송인이 SNS를 통해서

흑인 분장을 하고 관을 들고 있는

고등학생의 졸업사진에 대해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얼굴을 검게 칠하는 블랙페이스는 인종 차별이라며

흑인 입장에서 불쾌하다고 말했다.


블랙페이스는 흑인이 아닌 사람이 흑인처럼 얼굴을 검게 칠한 것이다. 학교 측에서는 학생들이 패러디의 목적으로 분장을 한 것이지 흑인을 비하한 의도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해당 사진에 대해서 인종차별이 될 수 있다. 유명한 영상을 따라한 것이다. 의견이 분분했다.




단일 민족임을 배우며 자라온 대한민국에서 해외에 나가보지 않은 이상 인종차별을 경험하는 일은 비교적 드문 것 같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환경들이 나의 모든 부분들을 만들게 될 텐데 사실 그 환경들은 내가 선택하지 않고 처음부터 주어지는 것들이 많다.

내가 태어나는 나라, 내가 가지고 있는 피부색, 처음 배우게 되는 언어, 부모의 경제력 등등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살면서도

서울이 고향인가 아닌가?

도시에서 태어났는가? 살았는가?

시골에서 태어났는가?

하는 상황들에 따라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달라지고 기본 정서에 영향을 미친다. 확률적으로 지방에서 자라온 사람들이 외국인 노동자들을 많이 만나볼 기회가 훨씬 많다는 걸 최근에 알게 됐다. 삶 속에서 훨씬 접할 기회가 많았다는 건 이해의 폭도 넓다는 것인데 환경이란 이런 것이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소수자의 입장이 되어 본 적이 없이 살아왔던 사람들은 그들의 사정이 어떤지 이해하기 어렵다. 실제로 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어서 그렇다.

사회적 약자, 차별을 받아온 사람들이 '차별을 느낀다.', '이런 부분은 상처가 된다.'라고 얘기한다고 해도 그 부분이 잘 납득이 가지 않을 수 있다.

심리적으로 공감이 잘 안 된다고 해야 하나.

그렇기 때문에 차별이란 부분은 까다로운 것 같다.


마치 누군가 관짝소년단의 패러디를 보고 그게 왜 인종차별이 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최근에 이 소재를 가지고 지인들과 얘기할 일이 있었다. 어쩌다 보니 이 얘기가 나왔고 각자 본인들 의견을 나눴다.

나도 처음에는 관짝소년단 얘기를 듣고는 비하할 의도가 있었다기 보단 그대로 따라 하려다 보니 디테일을 살린 것인데 그게 왜 문제가 될까? 그게 왜 차별일까? 이렇게 생각이 들었다.


근데 그들의 이야기, 흑인들 입장을 듣다 보니 '차별'에 대한 내 인식이 지극히 내 위주였음을 알게 됐다.

흑인들에게 블랙페이스는 단순한 패러디로 볼 수 없는 유구한 역사가 있었다.

블랙페이스는 19세기 ‘민스트럴쇼’에서 진행자들이 얼굴을 검게 칠하고 흑인 노예를 흉내 낸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거기 나오는 흑인들은 다들 게으르고 무식하고 우스꽝스럽게 묘사된 것이다.

이걸 계기로 백인이 흑인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이 공고화됐다.


흑인들은 블랙페이스를 볼 때마다 노예제도 때부터 받아왔던 인종적 차별의 역사가 고스란히 떠오르게 된다고 한다. 누군가는 우리가 욱일기를 보면 식민지 역사를 떠올리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라고 표현했다.

또 이런 말도 있었다. 아무리 희화화의 의도가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홀로코스트에 있는 유대인의 모습을 분장할 생각은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건 그 역사적 사실이 얼마나 비극적이었는지 모두가 공감하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스스로 돌아봐졌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듯이. 그런 것이구나. 내 인식의 틀에서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들로 인해 사람들은 상처를 받고 차별이라고 느낄 수 있겠구나.

나도 무심코 하는 상대방의 행동이나 말에서 그런 뉘앙스를 느끼듯이.


차별이라는 건 하는 사람이 차별의 목적을 두고 그 행위를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가 핵심이 아니라

그걸 받아들이는 당사자가 그렇게 느꼈는지 느끼지 않았는지가 핵심이지 않을까 싶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해 보기 이 부분이 정말 중요하구나 생각했다.

미국에서는 이 말을 정의하는 학술 용어도 있었다.

‘마이크로어그레이션’


상대가 그렇게 느꼈다는 것으로만 이게 차별인지 아닌지 피해를 입었다는 건지 안 입었다는 건지 말하는 건 굉장히 애매모호하지 않냐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이 영역은 굉장히 조심스럽게 접근을 해봐야 되는 문제다.


그렇지만 나는 내 위주의 생각이 아니라 더 상대의 입장에서 고려하고 생각을 해봐야 하는구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고 왜 그렇게 생각할까? 왜 어떤 부분이 차별일까? 나에게 질문을 해야 하는구나 정리됐다. 그게 인종차별이든 성적차별이든 경제적 차별이든 차별에 대한 것을 내면화해 볼 수 있는 시작이지 않을까.

매번 돌아봐도 놓치게 되고, 그런 감수성이 하루아침에 길러지는 건 아니다. 그래도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는 것을 끊임없이 해본다면 점차 그 간격을 줄여나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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