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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Aug 30. 2023

그녀의 3번째 바람

그건 괴로움일까

왠지 조금 긴장되는 마음이 있었다. 우습게도 S와 만날 약속을 정하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내가 S를 화장기 없는 얼굴로 만난 적이 있었던가? 였다. S를 만나러 가기 전 괜스레 세수를 한 번 하고 수분크림을 다시 발랐다. 화장을 하나 안 하나 그렇게 큰 차이가 있는 건 아닌 편이지만 그래도 맨 얼굴의 내 모습을 S가 어색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재밌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지난 시절의 나를 아는 사람을 만난다 생각하니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신경이 쓰였나 보다. S를 자주 보던 시절의 나는 화장하지 않으면 어색한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리디 어린 그 나이에 화장하지 않은 얼굴은 생기도 없고 푸석푸석해 보인다며 화장하지 않은 얼굴에 대해서는 자신감이 없었다. 나를 어떻게 볼 지에 대한 남들의 시선을 한창 더 신경 쓰던 시절. 뭘 어떻게 입어야 할지를 고민하던 그 시절. 하지만 S를 여러 사정으로 만나지 못했던 지난 10년 동안 좀 많은 부분이 변했다. 이제 난 맨 얼굴로 다니는 게 훨씬 편한 사람이 됐다. 갑갑한 갑옷처럼 느껴지는 화장을 벗고 산다. 화장이 필요하거나 혹은 하고 싶을 때가 있어서 화장을 해봤다가도 역시 참 많이 갑갑했지 하면서 금세 지워낸다. 환경 실천의 일환으로 옷은 필요한 만큼 가지려 노력하고 필요한 옷은 얻어 입는다. 대부분 재활용된 옷을 입으니 직접 옷을 산 지가 언젠지 기억이 잘 안 난다. 내가 변했듯 S도 어떤 부분은 변했을까?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가올수록 궁금한 마음이 차올랐다. 


원래 친한 사이는 오랜만에 만나도 어제 본 것 같은 느낌이라 그랬던가. 약속 장소에서 멀리 보이는 S를 보면서 딱 그런 느낌을 받았다. 살짝 긴장됐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10년 만에 만나는데도 마치 어제 만났던 사람을 보듯 편안한 마음이 됐다. 연락은 하고 지냈지만 얼굴을 마주한 건 정말 오랜만이다. 각자의 삶을 잘 살아온 둘. 쌓인 이야기들이 많았다. 최근 근황부터 지난 일들까지 밀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냈다. 사고 났던 일, 기뻤던 일, 속상했던 일, 요즘 관심사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대화가 편안하고 재밌었다. 눈 맞추고 이야기하는 속에 오래간만에 온전히 상대방 이야기에 집중하며 몰입했다. 지난 세월 속 나 역시 변화했듯 S도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또 한편 우린 그대로였다. '넌 어째 옛날 그대로냐.'라는 얘기가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나왔다. 우려했던 화장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피부가 좋아 보인다.'라는 덕담만 들었을 뿐.


사실 만나기로 하고서 혹시나 싶은 부분이 있어 한 번 물어는 봐야지 하는 일이 있었다. 이 얘기 저 얘기하다가 문득 툭 질문을 던졌다. 

"그래, 와이프는 잘 있지? 지금 결혼한 지 얼마나 됐더라?"

경쾌하게 대화를 이어가던 S가 잠시 멈칫하더니 애매한 듯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응, 잘 있지."

"결혼한 지 꽤 됐으니까 애도 있을 수 있겠다."

"애는 없어." 

"아~ 그렇구나. 같이 상의해서 안 가지기로 한 거야?"

"있다가 자세히 얘기해 줄게."라고 말한 S는 다른 이야기를 이어가다 다시 이 주제로 돌아왔다.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조금 마음의 정리가 필요했던 것 같다.

이내 결심한 S가 입을 뗐다.

"사실... 나 이혼했어."

혹시나 했던 일이라 놀랍진 않았지만 S의 지금 마음이 어떨지 우려되는 마음이 있었다.

"그랬구나. 힘들었겠다. 왜 헤어졌어? 성격 차이?"

"성격 차이는 무슨... 다 표면적인 이유지.." S가 약간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왜? 서로 사이좋았잖아?"

주변에 이혼한 사람들의 얘기는 참 많이 들어서 이혼은 더 이상 놀라울 것 없는 주제지만 친한 이의 헤어짐은 또 다른 느낌이다. 

"바람 폈어." 

"누가? 와이프가?"

"응, 처음엔 그리 심각하지 않았었고, 두 번째는 심각했지만 두 번째도 용서했지. 근데 이번에 세 번째가 되니까 안 되겠더라고. 바람피운 거 알고 나서도 진짜 많이 좋아했어 그 사람을."

S가 와이프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세 번째엔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란 그 헛된 기대마저 무너졌겠지.

"힘들었겠다. 그래... 그래도 잘했어. 지금은 어때? 괜찮아?"

말하고 있는 S의 안색을 살피며 얘기했다. 내 대답이 간결하고 가볍다고 느꼈는지 S가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그때는 진짜 힘들었지. 근데 지금은 괜찮아지는 중. 내가 보통 사람들한테 이 얘기를 잘 안 하기도 하지만 이혼 이야기 하면 다들 미안해하거나 난처해해서 첨에 머뭇 거린 거야. 근데 네가 가볍게 담담하게 들어주니까 훨씬 편안하네."

말을 마친 S가 이어서 바로 말을 덧붙였다. 

"있잖아. 바람 그거 병이더라고. 나한테 용서를 구하더니 어떻게 다시 이럴 수 있지? 그게 이해가 안 됐는데 사실 그때 나한테 잘못했다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그랬던 건 진심이었던 거야. 그 상황이 됐을 때 자기 맘대로 안 되는 거더라고."

"그래, 모든 순간이 다 진심이지. 아마 진심이 아닌 순간은 없었을 거야."

"맞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S의 말에 말없이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S는 마치 그때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처럼 몰입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다만 담담한 이야기 속에서는 분노나 원망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점이 난 참 좋았다.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는구나. 지난 시간 동안 힘든 상황 속에서 슬픔, 배신감, 막막함 같은 감정들을 온전히 견뎌내면서 S는 상대방을 이해해보려 했다. 전 와이프도 그냥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라 그랬던 것 같다고. 나는 조용히 S가 하는 얘기를 들으면서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거기서부터 해결점을 찾아가는 모습이 참 멋있다 생각했다. 회피하거나 합리화를 하거나 비난하는 태도가 아니라 그냥 상대방이 그랬던 것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수용이 그리고 자기 정리가 스스로를 지옥 같았던 괴로움 속에서 빨리 벗어나게 해 준 거라 생각했다. 끊임없이 상대방 탓을 하면서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주변 사람들을 많이 봤다. 상대를 탓하는 마음을 계속 내면 그 지옥 속에서 그들은 헤어 나오지 못했다. 지옥은 또 다른 지옥을 만들 뿐이었다. 결국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시간들이다. S는 그 일을 겪으면서 인터넷에 배우자가 바람을 피운 사람들이 모여 있는 커뮤니티를 찾게 됐는데 그런 커뮤니티가 생각보다 참 많다고 했다. 그 안에서 많은 이들을 만났고 많은 조언을 얻었지만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상대방 탓을 하며 괴로워하는 이도 많이 봤다고 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어떤 마음을 가질 것인지가 참 중요하단 걸 다시 느꼈다.


S는 밝았다. 여러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누구보다 의욕적이었다. 힘든 시간을 겪은 만큼 그는 더 단단해져 있었다. 믿고 사랑했던 만큼 상처를 받았겠지만 이 일은 S에게 상처로만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난 S를 다시 봤다. 지난 시절 나는 S가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S는 참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어떤 상황도 경험으로 생각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로 바꿀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마도 S를 보던 그 시절의 내가 그의 긍정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했던 것이리라. 나도 이제야 좀 시야가 넓어지고 사람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니 있는 그대로의 그 모습이 새롭게 보이는 것 같다. 내 변화가 상대방을 새롭게 알아가는 느낌을 준다. S의 긍정성을 배우고, 그 군더더기 없는 담담함을 마음에 새겼다. 

 

사랑은 떠났지만, 또 다른 시작이 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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