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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Oct 01. 2023

우유부단함에 대하여

양손에 쥔 떡을 어느 것 하나 놓기 어려울 때 (feat. 욕심) 

당시 나는 그의 불성실한 태도에 서서히 실망을 하고 있던 상태였다. 나도 내가 사람의 성실함, 약속을 지키는 모습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할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이전에 만났었던 친구들은 알아서 자기 할 일을 잘하고 약속 시간을 잘 지켰으며 성실히 본인들이 해야 될 일들을 했다. 오히려 그런 모습에 내가 자극을 받아서 나도 내 일을 더 열심히 하고자 노력했었다. 그런데 그는 좀 달랐다. 처음엔 그런 다른 모습들이 신선하게 느껴졌고 재미있었다. 성실하고 루틴적으로 본인들의 일을 알아서 하는 사람은 안정감을 주지만 반대급부적으로 지루하다는 느낌도 주니까. 어쨌든 그는 지루함 대신 새로움, 신선한 느낌을 줬고 그게 그와 사귈 수 있었던 계기가 되긴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관계를 진행시키고 그가 내 남자친구가 되어 일상을 공유하게 되자 신선함으로 다가왔던 부분이 받아들일 수 없는 지점이 되어 있었다. 나도 이런 마음의 변화들이 당황스러웠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당시의 나는 그가 중요한 일을 앞두고 늦잠을 자서 일어나지 못하는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못하는 모습이 자랑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말은 어느 날 갑자기 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우리 그만하자." 그는 아마도 매우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있었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사소한 것이었다. 그에게 말했던 그 이유는 다만 핑계에 불과했다. 그에게 '너의 성실하지 않은 모습과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모습이 애정을 식게 해.'라고 얘기할 순 없었다. 그날 그는 평소와 같은 행동을 했는데 나 혼자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줄이 툭 하고 끊어졌을 뿐이다. 여전히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앞으로 시간이 더 지난다 하더라도 그도 나도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너무 일방적인 것 아니냐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그에게 이별을 고하고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늦은 밤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힘없이 축 쳐진 목소리로 자신이 잘할 테니, 바뀔 테니 다시 시작할 수는 없는 것이냐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마음이 아팠다. 나도 함께 울었다. 그 사람 성격상 이렇게 매달릴 사람이 아니었다. 힘겹게 말을 이어가는 목소리에서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고민하고 힘들어했을 마음들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울고 같이 슬퍼하면서도 우리가 다시 잘해볼 순 없다고 단호히 얘기했다. 눈물은 계속 흘렀지만 이별을 결정을 했던 마음이 흔들리진 않았다. 


보통 어떤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한다. 이 결정을 한다면? 저 결정을 한다면? 그래서 결정을 내리기까지 시간이 소요되는 편이다. 근데 한 번 결정을 내리고 나면 잠깐잠깐씩 이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도 내가 했던 결정을 번복하거나 돌아가진 않았다. 때문에 스스로 결정을 잘 내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 이런 말을 들었다. 

"네가 우유부단하는구나."

나와 우유부단하다는 단어를 등치 시켜 생각해 본 일이 없어서 처음에 그 말을 듣고는 어리둥절한 마음이었다. 그쪽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최대한 생각하고 해 본 뒤에 결정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판단을 미루는 걸까요?"

나에게 우유부단하다고 얘기했던 분은 내가 결정을 내리지 않고 그냥 덮어둔 채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사실 나는 근래까지 오랫동안 해왔던 것, 내 진로에 대해 판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 됐다고 느끼고 있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고 그다음 스텝을 밟아야 하는데 뭔가 더 해볼 동기부여나 마음이 나지 않은 상황에 처했다고 느끼던 차였다. 그래도 이제까지 해보고자 했던 것이 있으니 후회가 남지 않도록 시도를 해봐야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사실은 결정을 미루고 있었던 것은 맞았다. 이것도 우유부단함이 되는 거구나. 혼란스러운 마음이었다. 

'우유부단'이라는 말은 내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며칠 동안 뇌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곱씹어보게 됐다. 신중한 판단을 내린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우유부단함이었을까? 생각해 보면 어떤 결정들은 고민도 하지 않고 팍팍 내리는 경우도 있다. 선택지를 두고두고 고민하는 결정과 그냥 빨리빨리 내려버리는 결정. 그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차이는 욕심에 있었다. 선택지를 두고 둘 다 하고 싶은 마음이 강할 때 어느 것 하나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일 때 선택은 더뎌지고 일단 끝까지 미루게 된다는 걸 알게 됐다.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를 포기해야 된다는 건 당연한데 둘 다 포기하고 싶지 않은 욕심을 부리고 있었다. 나에게 우유부단함은 욕심이었던 거다. 내가 욕심을 부리고 있고 그게 내 우유부단함이라는 것이 자각이 되니 내 생각이나 행동이 더 노골적으로 보였다. 한 선택을 했을 때 다른 부분들을 아쉬워하고 그러면서도 포기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습. 이럴 때 그냥 한 가지를 선택하고 거기로부터 파생되는 일들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되는 건데 생각보다 그게 잘 안 될 정도로 욕심을 부리고 있는 부분들이 많았다. 

한 가지는 내 선택에 대한 확신성이다. 확신이 더 강하게 들 때까지 계속 돌다리도 두드려보는 심정으로 이것도 저것도 시험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내내 한편에 있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 부족이 이 부분에서 드러난달까? 어쩌면 이것도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은 것이니 용감하지 못한 부분 중에 하나다. 

이제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에 맞춘 방향으로 나아가봐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우유부단했던 나를 인정하며, 그럼에도 어떤 선택을 하든 무엇이든 문제없다고 스스로 얘기해주고 싶은 밤이다. 욕심은 한 스푼, 두 스푼 내려놓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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