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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덩구 Dec 17. 2020

농구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잘하고 싶다는 거짓말

어제저녁도 나가서 드리블을 연습했다. 방법은 간단하다. 기모 체육복에 패딩을 껴입는다. 귀까지 가리는 털모자를 쓰고, 마스크로 입과 코를 가린다. 운동화를 대충 신고 걸어서 십 분 거리의 농구코트까지 손을 녹이며 부지런히 걷는다. 아무도 없는 농구장을 패딩 차림으로 세 바퀴 돌고, 몸에 열이 오르면 바닥에 공을 지칠 때까지 튕긴다. 규칙은 딱 두 가지다. 절대 공을 보지 않는다. 공이 멀리 굴러가면 주워오지 않고, 손으로 공을 튕겨서 가져온다. 


코로나 덕에 농구장은 고요하다. 불도 들어오지 않고 골대도 떼어갔다. 골대가 없으니 당연히 농구하는 사람도 없다. 남은 건 매끈한 바닥뿐이다. 드리블 연습에 필요한 건 바닥과 공뿐인지라 내가 연습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 오히려 사람이 없으니 눈치 보지 않고 맘껏 공을 튕길 수 있어 더 자유롭다. 내 자세가 뵈기 싫을 만큼 엉거주춤해도 되고, 공이 마음껏 내 손을 벗어나 굴러가도 된다. 드리블에 혼자 몰두할 수 있어 잠시 르브론이나 카레나 서장훈이나 허재가 된 느낌도 든다. 남이 보면 쟤 왜 저러나 싶을 테지만.


어제 연습은 내 인생 세 번째였다. 농구를 그럭저럭 좋아한 지 칠 년 만의 일이고, 농구에 푹 빠진 지 일주일 만의 일이다. 내가 연습을 시작한 이유는 '놀이'에 한계를 느껴서다. 나는 농구를 못한다. 키도 작다. 하지만 게임을 치르고 재미를 느끼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다. 이것이 '연습'없는 '놀이'가 지속 가능하게 했다. 친구들과 농구하는 날이면 적당히 편을 가르고 적당히 공을 튕겨 적당히 가끔 골을 넣고 적당히 지는 셈이다(내가 속한 팀이 더 못하니까). 모든 것이 적정하다면 놀이는 놀이다워진다. 아니, 놀이가 아닌 것도 놀이다워진다. 


어느 날 이런 방식의 농구에 한계를 느꼈다. 나도 진지하게 잘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본 것이다. 적당히 못하느라 적당히 즐기고 있다면, 무척 잘하면 무척 즐길 수 있는 놀이가 된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다만 무척 잘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놀이의 반복이 아니라 과학적인 연습이었다. 나는 놀이의 반복을 그만두고 한 번이라도 잘 놀기 위한 연습 체계를 마련하기로 했다. 이제부터 농구장에 가 혼자서 공을 튕기겠다. 이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나는 깍두기가 아닐 것이다. 내가 비록 서장훈보다 50cm 작지만 같은 수준으로 즐길 수는 있으리라. 즐겨본 적 없던 수준의 새로운 놀이가 찾아온다 생각하면 들뜰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연습은 놀이와 달라도 많이 다르다는 데에 있었다. 연습은 생각보다 즐겁지 않다. 지겹다. 지겨울 만큼 해야 연습이 되기도 한다. 나는 연습 첫날 바닥에 공을 튕기며 어떻게 하면 이 시간이 지겹지 않을까 고민했다. 바닥에 공을 튕긴 지 5분 정도만에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소리쳐가며 뛰어다니는 농구게임과 가만히 제자리에서 로봇처럼 공을 튕기고 있는 일은 재미의 수준이 달랐다. 과연 이런다고 내가 드리블을 잘하게 될까? 이런다고 농구가 더 재밌어질까? 손이 너무 시린데? 이따 뭐 먹지? 연습을 즐기기엔 너무 따분해서 연습하지 않을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꾹 참고 어느 정도 하다 보면 반복된 동작이 의지의 범위를 벗어나 몸에 자리 잡게 되는 때가 온다. 반복적으로 손은 공을 누르고 있고, 몸은 리듬을 타고 있고, 공 튕기는 소리는 쿵쿵 쿵쿵 들려온다. 그때가 되면 나는 허리에 힘을 줘야지, 손끝에 감각을 집중해야지, 하는 생각을 자연스레 떨쳐버리게 되는데, 자유로워진 생각의 날은 이 연습을 향해 논리적 정합성을 따지고 든다. 농구를 잘하고 싶다. 어떻게 잘하는가. 드리블을 잘하면 된다. 드리블은 어떻게 잘하는가. 공을 여러 번 튕기면 된다. 고로 공을 여러 번 튕기면 농구를 잘한다. 그렇다면 농구를 잘하면 무엇이 좋은가. 게임에서 이긴다. 게임을 이기면 무엇하는가. 쿵쿵 쿵쿵. 오늘 저녁은 무엇인가. 


한 번은 이러한 생각의 끝자락에 모든 연습과 농구가 거짓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설령 지금처럼 드리블을 못하더라도, 일 년에 몇 번 할까 말까 한 농구를 즐기는 데는 큰 문제가 없지 않은가. 설령 연습으로 조금 더 드리블을 잘하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농구를 챙겨보거나 게임 약속을 잡을 정도로 농구에 열성이 아니지 않던가. 농구를 잘하고 싶다는 의지의 이면엔 진정 무엇이 존재하냐고 묻고 싶었다. 왜 갑자기 이 겨울에 나와서 이 난리인 건가. 이 추위에 옷을 싸매고 골대도 사람도 없는 농구장에 나와서 공을 튕기고 있는 이 모습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나타났냐는 의심이 들었다.


물론 드리블을 하며 떠오르는 모든 질문과 의심은 대답을 필요로 할 만큼 날카로운 것이 아니다. 생각이 모양을 갖출 때쯤 다른 생각이 나타나 그 자리를 차지하고, 그것이 다시 자기 모양을 갖출 때쯤 다른 생각이 그 자리를 차지하길 반복한다. 뭉뚱그려진 생각의 등장과 소멸이 반복되며 내가 할 수 있는 건 완벽한 대답이 아니라 오직 쿵쿵 쿵쿵 제자리 드리블이다. 아마 내 모든 손의 감각이 튕겨지는 농구공에 집중되는 순간 뇌도 그러하겠지. 연습을 향한 내 질문과 의심엔 드리블을 잘하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적당히 나를 속일 뿐이다.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고.


연습의 뒷면에 나의 싫증이 있다는 것쯤은 안다. 모든 놀이다워진 것들을 향한 불만. 터무니없는 목표라도 개의치 않고 꿈꾸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 두려움이 만든 회피가 놀이로 치부하기에 만든 모든 놀이들. 겨우 나는 농구를 잘하기 위해 연습하러 간다지만, 그것이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 진실의 적합성을 의도적으로 파헤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대신 오늘은 왼손 드리블을 연습해야겠다. 



"나는 신체를 끊임없이 물리적으로 움직여 나감으로써, 어떤 경우에는 극한으로까지 몰아감으로써, 내면에 안고 있는 고립과 단절의 느낌을 치유하고 객관화해 나가야 했던 것이다.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직감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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