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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덩구 Dec 30. 2020

기분이 더러운 밤

작년 여름

기분이 더러운 밤. 그날의 하루를 돌아보면 대체로 같다. 나는 지금 용두동이다. 집 앞 카페에 있다. 조금 전에 방에서 나왔으며, 침대에서 한참을 누워있었다. 그전엔 힘겹게 일어나 하루의 일과를 고민했을 테고, 그 고민은 별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돈이 없었으면 동전을 모아 라면으로 늦은 점심을 해결했고 돈이 조금 있다면 칠천 원짜리 국밥이나 제육볶음을 먹었다. 기분이 더러운 밤은 대체로 휴일에 만들어진다.


탈출하듯 방에서 카페로 향하는 심리는 이렇다. 이러다 죽겠다. 벌써 하루가 갔다니. 나는 아무것도 못했는데. 어디로든 가야지. 갈 데는 집 앞 카페밖에 없다. 방에 계속 있을지 나갈지 선택하라. 카페라도 가자. 일단 집 앞 카페로 나오면 노트북을 피고 할 일없는 와중에도 할 일을 정리한다. 한 달 정도의 밀린 가계부를 정리하기. 다음 주에 미용실을 가겠다고 구글 캘린더에 기록하기. 언제부턴가 글을 쓰겠다고 다짐하기(쓰지는 않는다). 


달력에 날짜와 항목별로 할 일을 적어 두고 나면 기분이 썩 나아진다. 그때의 기분은 밀린 빨래를 돌리거나 설거지를 해치웠을 때, 침대 옆 협탁에 쌓인 먼지를 물티슈로 닦아 냈을 때와 같다. 


그래도 더러운 기분이 근본부터 해결되는 것 같지는 않아 나는 카톡을 보낸다. 맥주 마실 사람? 나와 비슷한 심리에 처해있는 누군가가 내 말에 적극적으로 감응할지도 모르니까. 당장 나오라며 술자리를 만들어 버리면 왕십리로 가게 된다. 아쉽지만 그런 일은 보통 없고, 나도 보통 없다는 걸 알고도 보통 그렇게 말한다. 잠시 뒤 나는 다시 방으로 향하는 길에 술자리의 대체재를 찾는데, 컨디션이 좋으면 나가서 러닝을 할 작정이고, 좋지 않으면 편의점에 가서 맥주를 살 생각이다.


뛰는 코스는 정해져 있다. 청계천로를 따라 대충 팔 분 정도 뛰면 철봉이 등장하는데 그 구간을 왕복한다. 나는 남들을 만날 때는 신지 않는 촌스럽고 두꺼운 운동 양말을 신고, 운동화를 턱턱 눌러 신으면서 청계천로로 나간다. 밤공기로 느껴지는 매연, 그 사이로 얼룩덜룩한 자동차와 신호등 불빛들. 각자의 일로 분주한 사람들. 몇 번의 강아지를 산책하는 무리와 몇 번의 횡단보도를 지나면 청계천에 다다른다. 


나는 이미 프로그램이 입력되어 있던 사람처럼 청계천을 만나자마자 냅다 뛴다. 자전거를 내지르는 사람들 사이로 이미 뛰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허리를 곧게 펴고 힘차게 걷는 아줌마, 이어폰을 끼고 허공에 수다를 떠는 젊은 여성이 보인다. 두 번씩 반복되는 들숨과 날숨이 규칙적인 빠르기로 정돈될 때, 두 다리의 움직임이 외부 동력을 필요로 하는 단계를 지나 자동으로 작동하기 시작할 때, 나는 그제야 더러운 기분을 떨쳐버리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확인한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더러운 기분의 정체를 낱낱이 밝혀내는 작업을 시작한다. 흙에 파묻힌 유물에 대고 살살 붓질을 하듯, 함부로 그 실체를 어그러뜨리지 않기 위해 겉에서부터 더러운 기분을 한 톨씩 쓸어낸다. 나는 명쾌하게 더러운 기분의 실체를 밝혀낼 순 없지만 그놈이 ‘돈’의 얼굴을 띄고 있다는 것쯤은 알게 된다. 


내 등은 땀에 흠뻑 젖어 있다. 호흡은 내 의지를 주입하지 않고도 일정한 빠르기로 유지되고 있다. 나는 분명 더위속에 있으나 덥지 않고, 숨차지만 힘들지 않다. 무아지경에 이르렀을 때 더러운 기분의 정체를 밝혀내는 발굴작업은 공기 속으로 흩어져버리는데, 나는 그 발굴작업에 다시 착수하기 위해 굳이 사고를 집중해내지 않는다. 그저 헉헉 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기분은 아 기분좋다라 말할 만큼은 되진 않지만 적당히 잠에 들 정도는 된다. 카페에서 할 일을 정리했을 때, 밀린 빨래를 했을 때 보다 조금 더 낫다. 나는 나아지는 기분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해 마지막 방책으로 편의점에 가 맥주를 산다. 지갑에 여유가 있다면 네 캔 만원을, 적당히 있다면 이천오백 원짜리 필스너를, 없다면 천육백 원짜리 필라이트를 하나 산다. 


여전히 할 일이 남았다면 그 맥주를 냉동실에 넣어 놓는 일이다. 샤워를 하는 동안 조금 더 차가워질 거라는 기대를 가진다. 땀과 기분을 비누칠에 씻어내리는 내 손동작은 맥주 생각에 조금 더 빠를지도 모른다. 물기는 대충 닦아내고 훤하고 밝은 형광등을 끄고 무드등과 노란 불을 켠다. 아늑해진 방을 어지럽히는 모든 것들을 정돈한다. 이불을 개어내고 헝클어진 가방을 눈에 안 보이는 옷장에 쑤셔 넣고 나면 나는 냉동실 문을 연다. 맥주 한 캔의 기분 더러운 밤을 연다.   


19.8.15




일 년 반이 지나도 크게 다르진 않다. 

용두동을 떠났다는 것. 운동과 술의 종류가 늘었다는 것?

적당히 더 잘살고 있는 듯하다.


20.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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