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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덩구 Oct 04. 2021

백석, 달맞이길, 서해

해운대에서

위스키 바에서 오줌을 싸는데 눈앞에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다. ‘이 삶이 병인데, 그 안에서 다른 병을 앓지 마시라. 이성복’ 나는 엉거주춤 선채로 마음이 덜컥했다.


바 테이블로 돌아가 하이네켄을 한병 더 시키며 사장님에게 물었다. “이성복 시인을 좋아하시나 봐요?” 그럴만한 것이 바 이름부터가 ‘백석’이었다. 작은 간판에 몇 안 되는 주황색 조명과 어두컴컴한 분위기. 엘피판과 술병을 배경으로 어슬렁 거리는 한 마리 개까지. 척하면 척일 이곳에 완전 내 스타일이야 확인 사살을 내려준 것이 그 문구였다. 화장실에 이성복이라니.


좋아하냐 마냐는 납작한 대답 대신 한 시인에 대한 짧은 감상을 나눴다. 어렵다. 깊다. 남는다. 머리를 친달까. 평론가의 것은 아니었고 평범하고 보편적인 말이었다. 눈이 더욱 또렷해진 사장님은 이성복 <서해>를 읽어보라고 권했다.


아직 서해엔 가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거기 계실지 모르겠기에

그곳 바다인들 여느 바다와 다를까요
검은 개펄에 작은 게들이 구멍 속을 들락거리고
언제나 바다는 멀리서 진펄에 몸을 뒤척이겠지요

당신이 계실 자리를 위해
가보지 않은 곳을 남겨두어야 할까 봅니다
내 다 가보면 당신 계실 곳이 남지 않을 것이기에

내 가보지 않은 한쪽 바다는
늘 마음속에서나 파도치고 있습니다

-이성복 시집 <그 여름의 끝>(1990)


나는  시를 한번  훑고는 술집을 나와 터덜터덜 걸었다. 달맞이길을 따라 내려가며 보이는 해운대의 야경은 아주 잠깐씩 발을 멈추게 했다. 그래 나는 정말로 부산에 오고 싶지 않았어. 도시의 복작과 번잡과 가식스러움은 질색이니까. 나는 새로운 곳으로 가야만 . 이 땅에서도 한국적이지 않은 자연의 풍경을 가슴에 넣고는 다시 설레고  거야. 지금의 것을 버려야만 . 버려야만 .


현재의 나와 화해하지 못하고 만드는 여행은  다른 강박을 만들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에  이유가 뭐였더라. 나한테 여력이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가보지 않은 곳을 남겨 여력. ‘당신이 거기 계실지알면서도, ‘ 마음속에서나 파도치도록 남겨두는 여력. 시인은  힘의 이유를 구구절절 보태지 않았다.


공간을 남겨두는 만큼 지금 있는 이곳도 꽤 사랑하고 돌아가겠지.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손에   새로운 설렘이 아니라 현재를 마주할 용기다. 삶이 원래 병이라니 쉽게 나아지진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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