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왜 하는진 잘 모르겠지만
요가를 왜 하냐고 물으면 딱히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예전엔 스트레스를 낮추는 데 도움이 된다거나, 몸이 이뻐진다며 설명하곤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겨우 둘러댄 말이 아니었나 싶다. 분명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이쁜 몸을 만들기 위해, 요가원으로 드나든 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내가 왜 요가를 하는지 나만의 대답을 찾은 건 아니라서, 요즘엔 '그냥'해요 '좋아서'해요 라는 식으로 내빼는 편이다. 오히려 그게 정확하기도 하고.
사실 남들은 내가 요가를 왜 하는지 관심이 없다. 퇴근하고 헬스장에 간다고 왜 헬스를 하냐고 물어보진 않잖나. 요가를 향한 물음은 관심보다는 특이함을 향한 일종의 성의랄까. 뭐 내가 주로 만나는 집단에선 요가가 일상적인 취미로 자리잡기엔 나름의 이색적인 면모를 갖고 있나 보다 정도로 받아들인다. 최근엔 요가를 한다고 했을 때 상대방 반응이 차라리 생각거리다. 대답은 보통 여자들 많겠다. 사람들 이쁘냐. 너 거기 가는 저의가 무어냐 등등인데, 계집들이나 하는 애송이 운동이라는 얘기도 들어보았다. 아마 레깅스 입고 쫙쫙 늘리는 무엇쯤으로 여겨지는 지점이 저쪽 세상 어딘가엔 있는 듯하다.
같이 흉보자고 이런 이야길 하는 건 아니고, 나 딱하지 않냐며 연민을 사려는 것도 아니다. (아닌가 그건 좀 있다) 다만 요가를 하면 할수록, 내가 느끼는 바를 당신에게 설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실을 새삼 지각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내 안에 나만 이해하는 고집스러운 공간을 짓는다고나 할까. 고집불통 거친 목수를 하나 키워서 훌륭한 오두막을 내 맘속에 공들여 쌓아 놓고는 당신이 이곳에 들어오든 말든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문패를 걸어 놓는 것이다. 분명 요가의 어느 구석이 좋아서 계속하겠으나 그것의 정체는 나부터가 알아갈 일이고 당신에게 설명할 수 없다.
그렇게 내 오두막을 하나 씩 올리고 숨을 돌릴 때가 되면 제 가슴에 고집불통 공간을 키우는 다른 사람들에게 눈이 가기도 한다. 남의 오두막에 동요되는 원리는 참 직관적이어서 뭐라 설명하기가 어렵다. 저 집의 건축 비결은 무얼까 하는 호기심이나 갈증이라고 해야겠다. 어쩌면 나도 고집스러운 척 나만의 공간을 지어놓고는 알아줄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상하게 그런 이들을 만날 때마다 내 안의 목수는 잠시 평정심을 잃고 어리광을 부리게 된다. 어떻게 지었어? 여기 엄청 좋네? 여기도 들어와 볼래? 너도 요가를 해보는 게 어때? 요가를 해보라니까. 내가 요가를 하면서 얼마나 좋았냐면 말이지. 내 비결을 너에게 전하고 싶다.
결국 논리적이고 보편적으로 많은 이들이 요가를 좋아하게 설득할 수단은 내게 아무것도 없다. 내가 왜 요가를 하는지 뻔뻔하게 공언할만한 법칙을 찾지 못했고 그런 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단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누가 뭐라든 개의치 않을 내 오두막 하나는 아주 느리게 짓고 있다는 사실이다. 매트에 철퍼덕 누웠다가 앉았다가 부들부들 섰다가 뻗쳤다가 수십 번의 잡생각이 숨으로 돌아올 즈음에 오두막에 기둥 하나 보태는 것이다. 그러다 가끔 딱 한마디 씩만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요가했으면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