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밤의 사색>
어차피 나는 인생에서 행복했던 날보다 불행했던 날에 더 큰 무게를 두기 때문이다
<밤의 사색>을 읽었다. 솔직히 말해 헤세가 아파 보여서 좋았다. 유난히 고뇌하는 부류의 인간을 좋아한다. 어딘가 꼬인 사람. 보통이면 넘어갈 일도 사색하고 세상과 자꾸만 불화하는 사람. 지금 무언가 잘못되었으며 지적거리가 여기저기 널린 사람. 어느 밤엔 화살이 자신을 향하고 자기 연민과 혐오 사이에서 새로운 정답을 꼭 찾아야만 하는 사람. 이러한 종류의 인간은 누군가 같은 부류라 느낄 때 약간의 위로를 얻는데, 내가 이 책 헤세에게 그렇다.
나는 불면의 고통을 견디고 불면의 밤을 축복하는 법을 배웠고, 어둠 속에 잠복해 독한 숨을 내뱉는 절망을 눈 하나 깜짝 않고 노려보았다
다만 헤세는 '잘' 괴로워한다. '어차피' 불행했던 날에 더 무게를 둔다는 초연함, 불면을 축복하는 것도 모자라 절망을 '노려보았다'는 강인함같은 건 어렴풋 따라나 할 수 있으면 다행이겠다. 가져갈 건 고통에 빠져있다고 약한 게 아니라는 것, 고통을 눈앞에다 말할 줄 안다면 차라리 남보다 강하다는 것. 다음 불면의 밤이 오면 눈을 부릅뜨고 잠을 자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전히 이 잘난 견딤을 부러워할 것이다.
나를 덮친 외적인 운명이 모두에게 그렇듯 피할 수 없고 신에게 달린 일이라면 나의 내적인 운명은 나만의 고유한 작품이었다. 그것의 달콤함도 씁쓸함도 오로지 내 책임이다
잠을 못 자던 때면 억울했다. 왜 하루에 최선을 다했어도 잠이 오지 않느냐고. 보상처럼 밤을 기다린다면 착각이었다. '내적인 운명은 나만의 고유한 작품'이라면, 그 작품을 돌아볼 시간이 보장되지 않는 한 불면은 올만한 것이다. 밤잠은 낮의 일과는 무관하니, 내 '작품'에 대한 책임은 낮동안 돌보지 못한 씁쓸함까지 빠뜨리지 않아야 한다. 다음 불면의 밤이 오면 적은 잠마저 깨기 위해 노력하겠다.
거센 저항 없이 몸을 던질 줄 아는 사람은 쉽게 죽고 쉽게 태어난다. 이와달리 몸을 던지지 못하는 사람은 두려움에 떨고 힘들게 죽으며 마지못해 다시 태어난다
달라지고 싶었다. 전과 같진 않으리라. 이젠 최선을 다하겠다고 촌스럽게 다짐했다. 그 내용도 모른 채 어딘가 맘에 들지 않는 구석만 느꼈다. 마음먹고도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딱히 없었다. 나 스스로를 완전히 발가벗기기 전에는 달라질 수 없는 것이다. 당장엔 결국 쪽팔림을 무릅써서 글을 써야 하고, 시선에 반해 솔직하게 말해야 하고, 작은 결핍도 크게 봐서 내 앞에 당당하게 내놓아야 한다. 내 내면 깊은 가장 어두운 데 까지 스스로 걸어내려가 뻔뻔하게 걸어 올라오는 것이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 불면쯤이야 기다렸던 사람처럼.
절망이란, 덕을 쌓고 정의롭고 이성적으로 살아가며 주어진 책임을 완수하려는 온갖 진지한 노력의 결과이다. 절망의 이편에는 아이들이 있고, 절망의 저편에는 깨달은 자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