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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덩구 Dec 16. 2021

퇴근하는 기분

칼퇴할 줄 알았는데 야근했다. 마음먹고 야근했을 때 보다 기분이 몇 배는 더럽다. 사실 칼퇴를 바란 건 욕심이란 사실을 나도 안다.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을 기필코 해내리라 마음먹는 건 오래된 습관이다. 무리한 목표를 가지기란 현실을 외면하기에 꽤 기능적인 방법이다. 다짐을 하며 실제로 행복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주기도 하고(생각보다 칼퇴해도 되겠는데?) 현실을 향한 새로운 마음가짐을(이깟 일쯤이야 내일 해도 괜찮잖아) 가져다 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내가 처음부터 일이 많지 았았으면 ‘나는 오늘 칼퇴할 거야’ 같은 말도 안 되는 다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업무가 밀려오고 나는 벅차기에 칼퇴같은 꿈도 꾼다. 처음부터 모든 게 할만했으면 어땠을까? 조용히 칼퇴하거나 적당히 야근했을 것이다. 집에 가는 길에 브런치에 이런 소리를 하고있을리 역시 없다. 여섯 시 반에 예약해둔 미용실에 갔을 것이고 일곱 시 반에 예약해둔 저녁 요가에 갔을 것이고 어제 외상 걸어둔 이천 원어치 과테말라 커피 원두값을 치렀을 것이고 집에 돌아가 초밥이나 멕시칸 음식을 시켜먹었을 것이고 어젯밤에 읽던 은희경 동네서점 컬렉션을 마저 읽었을 것이고 낮동안 있었던 많은 분노의 순간들을 정화하고 잠자게 할 만한 내 나름의 시간들을 견뎠을 것이다.


그런 일은 없다. 나는 지금 사호선이고, 내 저녁을 잃어 분노하고 있다.


오늘도 많은 화를 내었다. 제출해주세요. 어제도 말씀드렸는데요. 제출안 하실 거예요. 도장이 없는데요. 이메일이 안 오는데요. 무슨 말씀이에요 그게? 네 번째 똑같은 말씀을 드리는데요. 문서로 주세요. 공문으로 주세요. 사람들도 나에게 많은 화를 내었다. 어이 후배 교육 똑바로 안 시키나? 정말 이해가 안 가네요. 예 무슨 말인지 알거든요? 어디 한번 해볼게요. 화를 참을 땐 거짓말을 했다.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 정말 상상초월로 개념이 없으시네요. 아이고 감사합니다.-바쁘니까 자랑하느라 말 좀 걸지 마라 이 개새끼야.


간 밤에 괴성을 지르며 큰 소리에 잠에서 깼다. 으악! 어떤 여자가 내 귀에 꽥 하고 소리를 질렀는데 난 꿈에서 깜짝 놀라기도 하고 화나기도 해서 따라서 으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실제론 소리를 지르면서 눈을 번쩍 뜬 바람에 빈 천장에다 대고 으악! 하고 내질러 버렸다. 새벽의 적막 뒤로 짧은 비명이 메아리도 없이 사라졌다. 찬 공기가 느껴졌었다. 여섯 시 팔 분이었다.


나는 지금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어제 운전하며 은희경이 나오는 팟캐스트를 들었다. 책 읽아웃 이 주년 공개방송이었다. 그녀가 어떤 단어로 말했는진 기억이 안 나지만 아무튼 이런 취지였다. 울지 않으려고 한다. 엄살 부리지 않으려고 한다. 징징거리지 않으려고 한다. 글을 쓸 땐 꼭 그래야만 한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내 글이 얼마나 징징거리고 울고 있던가를 생각했다. 그런 글을 볼 때면 예전에 썼더라도 어딘가 메스꺼워서 단박에 지워버리곤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어리광은 글에서 점점 사라진다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늘 남아있다. 지금 저 위에서부터 이 단락까지도 겨우 ‘일 졸라 힘들다’를 어중이떠중이 설명한 것뿐이다. 그 너머엔 나 힘든 것좀 알아달라는 못다 큰 아가의 마음이 있다.


퇴근하는 길에  바랬는지는 모르겠다. 브런치부터 열어 아무 말이나 적고 있지만 글쓰기는  배반하지 않는다. 남태령역에서 상수역까지 오는  삼십 분의 시간 동안 나는 실제로  괜찮아졌다. 이것을 어느 날엔 일기장에  단락 법칙이라고 적었다.  단락을 적을  산만했던 정신이 집중되고  단락  적을  괜찮아지기 시작하며  단락 까지만 어떻게든 적으면 분명히 괜찮아져있다. 어떤 기분이든 어떤 상태든  단락은 믿을만하다. 아무튼 여서일단락 이렇게 적었으니 집에 도착할 쯤인 지금엔 심지어 기분이 좋을 정도다. 지금 아홉  일분이라 아홉  요가도  갔다. 요가 대신 맥주나 마실 작정이다. 잃은 것을  크게 잃자. 한마디만  보태고  캔을 사야겠다.


나는 징징거려도 상관없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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