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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덩구 Dec 18. 2021

도망치는 꿈의 해피엔딩에 대하여

오늘 꾼 꿈

도망치고 있었다. 얼굴을 가리고 총을 든 무리가 쫓아온다고 했다. 다들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사람들이 서둘러 밖으로 나가 주차되어있는 차를 닥치는 대로 올라탔다. 그때부터 총알이 우리 사이로 빗발쳤다. 나와 어느 여성도 급한 대로 눈앞에 초록색 승용차 올라탔으나 우리 일행의 차가 아니었다. 처음 보는 프랑스인 가족 셋이 끄는 차였다. 그들은 긴박한 상황에 괜찮으니 어서 타라고 같이 도망가자고 했다. 우리는 앞서 달리는 차에 꼬리를 물고 달렸다. 


뒤를 돌아봤다. 좁은 절벽길 사이로 컨테이너 두 개는 싣을 수 있는 커다란 트럭이 먼지를 가르며 쫓아오고 있었다. 절벽의 반대편엔 논이 펼쳐져 있었다. 트럭 운전석에 한 남성이 보였다. 운전을 하면서 두 손으로 자기 몸보다 더 길고 큰 장총을 잡고 이리저리 쏘아 대고 있었다. 이상하다. 아까는 아주 작은 권총이었는데. 그 권총을 보면서 생각했었다. 권총이라서 다행이야, 빨리 달리기만 해도 맞추지 못할 거야. 멀리서 맞으면 죽기는커녕 조금 아프면 돼, 언젠가 웬만한 권총이 싸구려라는 사실을 배웠잖아. 커다란 총이 아니라 정말 다행이네. 근데 커다란 총을 들고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아 이거 꿈이구나.


꿈속에서 꿈인 사실을 알았을 때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꿈을 강제 종료한다. 눈을 강하게 감았다가 온몸에 힘을 주고 강하게 눈을 뒤집어 까면서 뜨면 잠에서 깬다. 긴박한 상황에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눈을 뜨며 기분 나쁜 가위눌림을 겪을 수도 있는 부작용이 있다. 의식은 깼는데 몸이 안 깨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둘째, 일단 계속 꾼다. 꿈이라는 것은 어차피 허구이니 그 안에서 내 선택을 즐기는 것이다. 좋은 꿈을 꿀 땐 두 번째 방법을 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행복한 꿈(혹은 야한 꿈)을 꾸면 계속 꾸고 싶어도 깨버린다. 그래서 계속 꾸고 싶을 땐 행동 거지 하나하나를 살얼음판 걷듯이 몸에 힘을 빼기 위해 애써야 한다. 


나는 총을 든 무리에 쫓기고 있는 긴박한 상황이지만 두 번째 방법을 택했다. 일단은 이 꿈을 계속 꿔보기로 한 것이다. 사실 꿈을 강제 종료하기엔 큰 부담이 따랐다. 영상이 굉장히 선명한 상태였고, 선명한 상태일수록 깊은 꿈이라는 뜻이다. 이 꿈을 강제 종료했다간 깊이 잠든 몸이 깨버린 의식을 못 따라와 굉장한 신체적 피로가 찾아올지도 몰라서 그렇다. 아니 어쩌면 꿈을 계속 진행시키기로 한건 내 선택이 아니라 꿈의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나는 '지금 이것이 꿈이구나' 깨닫는 꿈을 꾸는 것이다. 꿈에서 꿈인걸 깨닫는 꿈.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절벽 아래로 여러 명과 함께 추락하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보드를 타며 이 절벽으로 떨어지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을 하자마자 떨어지고 있는 나 자신을 보고 지금 꿈이구나 확신이 들었다. 재미난 실험을 했다. 정신을 집중해서 중력을 거르는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내면 추락이 멈추고 모두가 상승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자유낙하하면서 마음을 다잡고 스케이트 보드 위에 발을 안전하게 안착하고 정신을 모았다. 올라가라. 올라가라. 의식을 집중해내자 떨어지고 있는 모든 인간들이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나는 이 꿈을 향한 승리에 도취돼 중력을 무시하며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신나게 날았다. 바람같이 풍경이 밑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의식이 무의식을 정말로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건물을 점프해 건너는 장면을 떠올렸다.


우리 뒤를 쫓아오고 있는 괴한의 트럭을 쳐다보며 그때의 경험을 다시 시도했다. 저 트럭이 절벽으로 곧 떨어지리라. 무의식을 지배할 의식의 힘을 뇌에서 찾아 헤맸다.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뒤를 바라보며 트럭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저 트럭은 곧 추락할 수밖에 없을 거야. 아무리 영상을 집중해 머릿속에 그려내도 눈앞에 실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씨, 저 트럭이 정말로 우리를 따라잡으면 어떡하지? 그러자 트럭이 거의 뒤를 다 쫓아와서 마음은 더 긴급해졌다. 정신을 집중해내기는 커녕 더 빨리 도망가야 했다. 그래, 꿈인 걸 아는 꿈을 꾸는 것이다.


다급해지자 앞에도 괴한이 널려있는 풍경으로 바뀌었다. 차는 막다른 길에 멈췄다. 우리는 앞뒤로 포위당했다. 차창 밖엔 황량한 모래바람이 불었다. 영화 모가디슈에 나온 소말리아의 풍경 같기도 했고 뉴스에 나온 카불 공항 근처의 풍경 같기도 했다.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밖에선 괴한들이 앞서 잡힌 사람들을 사살하고 있었다. 무엇을 지니고 있는지 확인하더니 그 패스가 없으면 긴 총으로 쐈다. 방역 패스인가.. 아무튼 우리 차례가 되었다. 얼굴을 뒤덮고 총을 든 사람들이 차 창문을 내리라고 두드렸다. 같이 타있던 프랑스인 가족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창문을 내리고 중지 손가락에 낀 반지를 괴한들에게 보여줬다. 초록색 문자가 적힌 커다란 반지였다. 당신들과 같은 족속임을 증명하는 듯했다. 괴한들은 반지를 보고 그래, 너희들은 오케이 하는 듯이 넘기고 나와 내 앞자리 조수석의 여성에게 시선을 넘겼다. 너희들은 뭐야. 하듯이 쳐다보더니 커다란 총을 내 이마에 겨눴다. 


총구를 바라보자 공포가 밀려왔다. 꿈을 강제 종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실행해야 했다. 눈을 세게 감고 세게 뜨기만 하면 된다. 깨면서 가위에 눌려도 상관없다. 가위보다 괴한 총에 맞아 죽는 경험이 훨씬 끔찍하니까. 총을 맞기 전에 어떻게든 깨야 한다. 조금만 육체적으로 피곤해지는 걸 감수하면 내 침대로 돌아갈 수 있다. 이 악몽부터 벗어나는 거야. 나는 정신을 집중하고 눈을 자꾸만 번쩍번쩍 떴다. 눈을 뜨면 꿈을 깨면서 내 방 천장의 풍경이 나타나야 하는데 그 괴한의 총구만 눈앞에 다시 나타났다. 반복해서 정신을 집중하고, 눈을 감고, 눈에 힘을 줘 아무리 크게 떠도 여전히 눈앞엔 커다랗고 검은 총이 나를 겨누고 있었다. 뭐하냐? 괴한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눈을 계속 감았다 뜨고 있는 나를 총구 너머로 쳐다봤다.


그때 커다란 총성이 울렸다. '아 씨발..' 나는 눈을 감고 내 머리를 관통한 총알의 아픔과 죽음을 기다렸다. 그런데 나는 죽지도, 고통스럽게 꿈에서 깨지도 않았다. 눈을 다시 떴을 땐 괴한이 총을 내리고 있었다. 고개를 흔들더니 네 옆을 보라는 눈길을 나에게 줬다. 내 머리 옆 차 뒷좌석 창문에 총알구멍이 나 있었다. 의도적으로 나를 피해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내 머리에다 안 쏘고 옆에다 총을 쏘았다. 그러더니 어디서 뾰족한 나무 창을 들고 오더니 내 가슴에 들이밀었다. 곧 찔러 죽일 듯한 자세로 이렇게 말했다. "똑바로 봐" 완전한 아프리카계 외국인이었는데 똑똑한 한국말로 그랬다. 내가 어리둥절해하는 동안 그는 내 옆 차 시트를 그 창으로 여러 번 찔렀다. 마치 차 밖에서 보는 사람들에게 내가 이 사람을 분명히 죽였다는 걸 증명하듯이.


꿈은 계속되었고 죽음은 없었고 우리는 괴한으로부터 구원받았다. 나와 여성은 차에서 내려 어디론가 끌려갔다. 천고가 높은 지하였다. 노란색 불빛이 천정에서 가늘게 쏟아졌고 우리는 그 중간에서 아름다운 빛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교회 같았다. 괴한들은 우리에게 화려한 옷가지를 하나씩 주었다. 선명한 보라색과 노란색이 섞인 아주 촌스러운 체크무늬 망토였다. 귀한 사람에게 선사하는 망토로 보였다. 우리는 원래 약속되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받아 들고 망토로 몸을 다 덮었다. 그러자 노란색 조명이 꼭 천국에서 내리는 빛처럼 성스럽고 뿌옇게 우리를 비췄다. 괴한들은 총을 들고 의식을 행하듯 우리를 감싸고 가볍고 리듬 있는 발걸음으로 돌았고 흥겹게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했다. 그들이 흥얼거리는 내용은 그들이 왔네, 그들이 왔네 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내 앞의 영상은 망토를 뒤집어 쓴 있는 나와 그 여성을 하늘에서 삼자의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을 나선형으로 바라보던 그 시선은 하늘을 향해 멀어지며 두 사람은 작은 점이 되어 사라졌다. 하늘 높이 올라가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쯤 부드럽게 눈을 떴다. 나는 망원동 침대에 누워있었고 내 방 천장이 원래 거기 있었다는 듯이 내 앞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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