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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덩구 Aug 25. 2024

신촌, 모비딕, 시칠리아

여행 1주차

8.18(토) 신촌 모텔에서 12:04 AM


양평

양평에 다녀왔다. 할머니가 늙었다는 생각을 한다. 세월에 비해 특별히 더 늙은 거 같진 않다. 변화가 있다면 예전엔 모든 일에 비관적이었던 반면에 지금은 무기력하고 뭐든지 귀찮아한다는 점이다. 수영을 꾸준히 다니고 성경을 매일같이 필사하고 있다는 점은 잘된 일이다. 나는 구멍 난 양말을 할머니에게 꿰매어달라고 맡겼다. 순례길에서 신을 발가락 양말이다.

모텔

신촌역 앞 허름한 모텔에서 잔다. 아고다로 어찌어찌 제일 싼 방을 구했다. 오만 원이면 싸다는 생각이다. 건물과 인테리어, 집기류는 모두 낡고 허름한데 청소는 잘되어있다. 건물이 깔끔하고 청소가 덜 돼있는 업소보단 이게 낫다. "다른 신촌 모텔보다 여기가 나아요"라는 리뷰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다른 데 가보진 않았지만.


'셀프대학'이라고 호기롭게 이름 붙인 두 달간의 독서 장정을 마치고 여행 독서모드로 돌입했다. 이북으로 읽을 것. 소설을 읽을 것. 미뤄둔 필독서를 탐색할 것. 직관적인 원칙이다. 챗지피티에게 읽을거리를 추천해 달라 했다. 그중 밀리에 있는 책들만 골라 리더기에 다운로드하여놨다. 단테의 신곡,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버지니아 울프는 뭐더라..


아무튼 신곡을 읽다가 자꾸 딴짓을 하게 돼서 오후엔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읽었다. 물에 대한 예찬, 바다로 나가는 비범한 마음과 여행 전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여인숙에서의 에피소드다. 어쨌든 물과 바다, 배에 타는 일과 여행을 다룬다니 참으로 시의적절하고 취향저격이다 싶었다. 그러나 오늘은 뭐가 문젠지 금방 또 딴짓(그러니까 인스타그램)을 오래 했다. 얼마 읽지 못하고 단념한 뒤 영화를 보러 갔다.


트윈스터스

포디엑스로 트위스터스를 봤다. 머릿속에 이영화를 2점을 줄까 2.5점을 줄까 3점을 줄까 한참을 고민하며 봤다. 한 문장으로 이 영화의 못난 점을 기가 막히게 적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흠집을 기어코 꼬집어내고 싶다는 건 어딘가 유아적인 마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오늘은 든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정말 그지 같은 영화다) 그냥 포디 바람이 시원했다, 정도로만 기억하고 말아 버리련다.(그지 같은 똥 바람)


여행

오랜만에 해외여행을, 그것도 장기간에 걸쳐하려니 어딘가 쪼달리는 마음이 든다. 짐은 제대로 싼 것일까. 이국의 거리를 내가 돌아다닐 수 있을까. 음식점에서 주문은 할 수 있을까. 누군가 인종차별을 하면 어떡하지. 사실 일어날 확률은 적고, 일어난다고 해도 별일이 아닐 일들. 걱정할만하다기엔 지금 까지 여행을 좀 많이 한 편에 속하지 싶다. 이런 불안이 있다고 하면 듣는 사람의 반응은 조금 어이가 없거나, 착한 놈이면 당연히 그럴만하다고 맞장구 쳐줄 것이다.


정말이지 허접하군.

그러니 일단 내일을 준비하자. 명상하는 마음으로

도착해서는 e-심 등록

돈도 정리해 둬야.

다운로드하여둘 것은?

로마아웃 티켓 캡처/표시해 두기



8.19(일)


러닝

요가일상 러닝에 긴급으로 꼈다. 안젤라샘, 민주님 은환샘..


로마행 

비행기 이륙 후 9시간 지났다. 4시간을 더 가면 된다. 7시간을 더 가야 하는 줄 알았는데 계산을 잘못했다. 다행이다. 인천에서 로마는 13시간 걸린다.


조금 잠들고 깨고를 반복하면서, 허먼 멜빌 <모비딕>을 읽고 있다. 주인공은 범상치 않고 험상궂은 식인종 퀴케크를 만나 항해를 준비하고 있다. 분량이 많아 김이 종종 빠지지만 읽을만한 소설이라고 생각이 든다. 영화 <웨일스>에서 브랜든프레이저의 딸이 그에게 읽어주는 모비딕 대목이 무엇인지 인터넷이 연결되면 검색해 봐야겠다. 뭐, 여행을 출발하는 입장에서 고래잡이 배에 올라타는 주인공의 심정을 조금은 헤아리는 중이다.


내 옆에 승객은 둘 다 여자인 데다 말라서 예전처럼 고생하며 갈 필요는 없다. 복도 측 여자는 이십 대 초반의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보이는데, 밥을 한 숟갈 뜨더니 ‘아 맞다’하는 듯이, 두 손을 모으고 갑자기 기도를 했다. 입안엔 치킨 데리야끼가 그대로 있었겠지. 다이소 쇼핑을 열심히 한 듯하다. 비행기 테이블에 걸치는 패브릭 발거치대와 뒷목에 대주는 목베개 따위로 짐이 주렁주렁하다. 슬쩍 가방을 보니 핸드폰은 도난방지 스프링에 묶어서 보관하고 있었다. 꼼꼼한 여자다. 책은 <복 있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얇은 책을 이제 막 펼쳤는데, 물론 목사님 설교말씀인 듯하다.


그녀는 짐이 많아서인지 결국 에어팟 하나를 떨어 뜨려 이리저리 뒤적거렸다. 찾는 속도가 점점 다급해지는 거 같아 내가 핸드폰 후레시를 켜서 도와주었다. 나랑 그녀 사이 의자 깔개 밑에 끼워져 있었다. 그녀는 감사하다고 세 번이나 말했다. 복 있는 사람.


또 한 명의 재밌는 승객으론 두줄 앞에 중국인 승객이 있다. 출발 전부터 지연에 대한 항의표시로 큰 소리를 내던 사람이다. 이 승무원 저 승무원이 그 아줌마 앞에 왔다 갔다 하더니, 이제는 결국 제일 노련해 보이는 승무원만 왔다 갔다 한다. 아줌마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 캐비닛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오쁜!”이라고 외치는 식으로 승무원을 이리저리 부리고 있다. 아니면 주문한 메뉴를 끝도 없이 바꾸더니 갑자기 돼지고기가 없는 걸로 가져오라는 식이다. 노련한 승무원이 ”돼지고기가 안 들어간 메뉴가 현재 없네요. 컵라면은 반드시 직접 기다려서 드셔야 하는 겁니다. 그래도 드릴까요? “라고 말한다. 근육질의 큰 남자 승무원이 그녀를 한번 노려보았으나 할 수 있는데 아무것도 없다. 다들 여러모로 딱하다.


아 승무원 하니 생각나서 적는데, 체크인을 도와준 지상직 직원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어떻게 나가시죠? 나가는 표가 있어야 합니다.

팔레르모에서 니스로 갑니다.

니스는 이탈리아 아닌 거죠?

프랑스예요.

그렇군요. 프랑스는 완전히 이탈리아가 아닌 거죠?

네.


그러더니 죄송해요오옥 하면서 코를 먹는 소리를 내며 민망하다고 웃었다. 제가 잘 몰라서요오옥. 기억해 둘 만한 사실은 그녀가 무진장 친절하고 이뻤다는 사실이다. 꼭 백치미로 먹고사는 아이돌, 아니 그보다도 이뻤다. 나는 그럴 수도 있죠,라고 말했지만 정말 그럴 수도 있는 걸까? 잘 모르겠다.


로마는 이틀정도 있을 생각이다. 니스행 비행기를 생각하면 이탈리아에 25일 정도 있게 되는데, 그중 이틀이니 짧은 편이긴하다. 이북리더기로 로마에 관한 유적지를 대충봤는데 어지간히 관심이 안간다. 머리속엔 세네시간 조깅하면서 로마시내를 둘러보면 되는거아닌가? 라고 생각하고있다. 러닝에 관광을 퉁친다니, 개 꿀이지 라고. 판테온 정도는 가고 싶다.


아니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정도는 봐줘야 하는 것인지 고민은 된다. 생각하기 귀찮으니 내일 생각하자. 관광은 정말이지 귀찮은 것이다.


모비딕

정확히 찾아보니, 영화<웨일즈>에서 주인공(찰리, 브랜든 프레이저)의 딸 엘리가 읽어주는 글귀는 모비딕이 아니라 모비딕에 관한 자기 자신의 에세이다.  내용은 이렇다.

‘모비 딕’에서 고래에 관해서만 한 챕터 내내 이야기하는 순간이 슬펐다. 그것이 자기 넋두리에 지친 독자들을 배려하는 작가의 제스처임을 알기에…

뭐 그저 그런 얘기다. 한마디 보태자면, 소설 초중반에 고래의 분류학을 다짜고짜 구구절절 이야기 하는 그 챕터는 기가 막히다. 제주남방큰돌고래도 끼워넣고 싶을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박물학을 조금 아는 양반들은 시도 때도없이 그것을 설명해내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는 법이다. 소설이라고 내 뺄것도 없지. 이 소설의 위대함은 내빼지 않았다는 것이다. 독자따위를 배려했다고 생각이 들진 않고 영화감독이 자기 넋두리에 지쳤는지 청승에 빠진듯 하다.


복있는 여자

옆에 복있는 여자는 스포트라이트를 켜달라 나에게 부탁하더니 이제 등을 켜놓고 다이소 안대를 끼더니 잠을 청하고 있다. 등은 꺼버릴까?



8.19(월)


아침

잠은 거의 못잔거 같은데, 굉장히 개운한 느낌이다. 특이한 꿈을 꿨다. 꿈에서 잠시 뒤 다섯시반에 일어나는 버전과 아홉시넘어서 일어나는 버전을 선택할 수 있었다. 시간을 착각하고 잘못 일어나는 꿈이 아니라, 언제든지 시간을 옮겨가 다시 일어날수 있는 수면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나는 아홉시에 일어났지만 무언가 잘못된거 같아 다시 잠을 취했고 다섯시반에 일어나는 옵션을 선택해 잠에서 깼다. 이게 무슨소린가 싶겠지만 꿈은 원래 그런 것이니 이해하려 들지 말길 바란다.


몇가지 관광 명소를 따라 뛰었다. 콜로세움, 트레지분수, 판테온의 외관을 봤다. 날씨가 선선하고 습기하나 없어서 최고의 컨디션으로 뛰었다. 오른쪽 족저근막은 생각보다 아프진 않았다. 물론 조심해야 할 수준은 된다.


콜로세움에서 소매치기를 만났다. 적자면 기니까 일단 밥을 먹으려 가야겠다.


소매치기

달리기를 하는데 콜로세움이 갑자기 나타났다. 처음으로 로마에 온 실감이 났다. 사실 별 관심도 없고 구경안해도 그만이었는데 생각보다 코앞에 나타난 아주 커다란 콜로세움이 나를 놀라게 했다. 잠실 야구장에 들어갈때의 설렘, 크기가 가져다 주는 떨림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콜로세움도 관중도 무적엘지 처럼 빡친 상태로 경기를 봤을까? 둘레를 따라 도는 러너가 많았기 때문에 나도 시계방향을 따라 뛰었다.


멀리서 형광색 옷을 입고 콜로세움 사진을 찍는 청년이 보였다. 아침부터 관광객이 나와있구나 싶었다. 일곱시였다. 내가 그를 지나갈때 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진좀 찍어줄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아주 상냥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뛰어서 기분이 좋은데 호의를 베풀면 더 기분이 좋아지니까.


내가 손을 뻗는데 그는 폰을 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도난이 횡행하는 유럽에서는 원래들 그런가보다 했다. 에어드랍으로 주고받자는 뜻인가보다. 내가 내폰으로 청년을 찍어주자 마자 청년은 자기도 찍어주겠다고 폰을 달라고 덥석 손을 뻗어 내 폰을 잡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손으로 폰을 움켜쥐고 그를 쳐다봤다. 에어드랍 하자는 거아니였어? 여기서 수상함을 눈치챘으면 좋았겠지만 뭐 눈치 못챘어도 큰 일은 없었으니 됐다.


어쨌든 에어드랍으로 그에게 사진을 보내줬다. 그도 나에게 보내주면 되는데, 필요한 버튼은 누르지않고 손으로 다시 내 아이폰을 덥석 쥐었다. 이 폰으로 찍어줄게요. 두번째 시도였다. 사람치곤 어딘가 간절한 손놀림이었다. 말투와 제스처의 싱크로도 이상했다. 나도 두번째로 내 폰을 꽉 움켜쥐었다. 투쟁 도피반응에 필요한 신경전달물질들이 뇌에서 분비 되기시작했다. 나는 이 개새끼가 사진따위엔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지각했다.


"아니 내 폰으로 찍을 필요 없으니까 에어드랍으로 보내주라니께!" 라고 말했다. 나는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알제리라고 한다. 아이폰11을 쓰는 알제리 청년은 다시 한번 내 폰을 손으로 덥석 잡고 이렇게 물었다.


"이 폰으루 안찍구?"


응 안찍어. 에어드랍이나 보내. 나는 괜찮다고 하고 폰을 아주 안전한 가방에 넣고 가던길을 뛰었다. 키로미터당 7분을 달리는 페이스였다. 아이폰11을 쓰는 알제리 청년이 내 핸드폰을 들고 튀었으면 나는 그를 잡을 수 있었을까? 뛰면서 뒤를 돌아보니 그자식은 여전히 그자리에서 콜로세움 사진을 찍는 시늉을 하고있었다. 다음 먹이감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생각해보자. 아마 그가 페이스 4분 30초 이상으로 뛰었으면 나는 그를 놓쳤을 것이다. 그 빠르기로 뛰면 나에겐 인터벌 페이스가 된다. 머리속에서 달리기로 내핸드폰을 들고 뛰는 그를 쫓는 상상을 했다. 잡아요. 저사람 잡아. 픽포켓! 픽포켓! 우리는 톰크루즈 처럼 콜로세움과 고대 로마의 유적지를 사이사이로 내달리며 아이폰을 둔 혈투를 벌였을 것이다. 어제부터 아프던 발바닥의 통증이 올라왔다. 나는 숨을 길게 내쉬고 다시 뛰던길을 천천히 뛰었다. 로마에온 실감이 났다.



8.20(화) 호스텔 1층에서. 종이컵에 에쏘잔 am7.4


시차적응

잠을 거의 못잤다. 열두시쯤 잠들기 시작해서 세시쯤 벌떡 떴는데 그채로 다섯시까지 눈을 번쩍 뜨고있는 느낌이었다. 시차적응인가? 못잔만큼 피곤하진 않다. 시차적응 이라면 내몸은 한국 점심쯤에 세팅되어 있을테니 그럭저럭 몸이 깨어난 시간이긴하다.


권영재와 바티칸투어

권영재와 영재 어머니를 만났다. 둘은 삼주째 유럽을 여행중이고 마지막 여행지로 로마에 왔다. 광장에서 처음 만난 영재의 어머니는 소녀같았고 영재는 소녀같은 엄마를 삼주째 보필하느라 약간은 지쳐보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둘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의 엄마를 떠올렸는데, 눈을 질끈 감을 수 밖에 없었다. 교양을 갖추고 대화가 가능한 그들의 모자관계가 부럽기도 했다.


우리는 바티칸 투어를 같이 갔다. 나는 사실 투어를 신청할 생각이 없었다. (솔직히 그냥 생각이라는 게 없는 거 같다) 영재가 오후에는 바티칸 투어를 신청해놨다 길래, 나도 오후에 뭐라도 생산적으로 할까 싶어 영재가 예약해둔 여행사에 나도 한명 껴줄수 있냐고 연락을 했다. 물론 금액까진 생각한게 아니어서 덜컥 15만원 정도를 지불하는 데 속이 쓰렸지만 이런식의 관광도 해보자 싶어 썩 괜찮았다.


바티칸 입구 앞에 한국인 일행들이 보이고, 흔히 보이던 중국인 관광객들 처럼 깃발을 앞에두고 옹기종기 섰다. 색다른 기분에 상기가 됐고, 투어가 시작되자 돈에 대한 생각도 싹 사라졌다. 장발의 키큰 남자 가이드가 유명한 유튜브 이상으로 술술 해설을 해냈기 때문이다. 가이드는 머리가 아니라 혀로 말하는거 같았다. 챗지피티가 이단어를 말하면 확률적으로 다음 단어를 갖다붙이는 방식과 비슷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 같은 레파토리를 읊었는진 모르겠지만, 미켈란젤로가 늙어서 최후의 심판을 그리는 와중에 교황이랑 싸우면서 그림안에 여러가지 뒤끝을 남겨두었다는 스토리를 청산유수로 설명했기 때문에 나는 투어에 금방 매료되었다.


이렇게 기억에 남기기로 했다. 라파엘로의 아테네학당 봤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포함한 천장화봤다. 최후의 심판과 성베드로성당 엄청 크다.


내가 궁금한 사실은 천장화 드렸을때 어떤 시스템 동바리를 밟고 올라가 그렸을까. 정말 고개를 뒤로 제끼고 그렸을까? 미켈란젤로 혼자 그린걸까? 수하인이 백명정도는 있지 않았을까? 크레인 없이 돔을 어떻게 올럈을까? 그리고 갑자기 조금 어이 없지만 예술에 대한 감동은 어떻게 생성되는 가? 이다. 오늘 잠정적인 대답은 '크기'로써 라는 것이다. 뭐 내가 받은 감동을 정확히 말하자면 그림이 가져다준 감동이 아니고 내가 그 그림을 내 눈으로 보았다는 사실이 가져다준 감동임을 안다.


이렇게 까지

적으면 무엇이든

귀찮아진다. 오늘은 오늘일을 적기로 하자.


에쏘

호스텔 1층에서 에스프레소를 시켜먹었는데, 기대에 반해 정말이지 맛있다. 한국 맛집에서 먹는 에스프레소 보다 훨씬 맛있다. 이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 모르겠다. 한국에 있는 양반들도 어지간히 공부를 하는 걸텐데, 왜 여기가 더 맛있는 걸까? 똑같이 고급 원두를 가져다 쓸텐데, 무슨 차이인걸까? 크기? 에쏘는 크기가 없으니까. 호들갑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여기는 아무도 에쏘를 호들갑 떨며 주지 않는다. 1유로에 대충 던져주니 맛있다고 느낄지도.


러닝

러닝을 하고싶은데 발바닥 때문에 참고있다. 당장 하려면 할수록 있는데 더 먼 미래를 위해 참아야하지 않나 싶다. 어제 삼만 팔천보를 걸었다. 아침 10키로 조깅과 바티칸투어의 결과다. 오늘은 적게 걷고 앉아있는 시간이 많으면 좋지 않을까 싶다. 판테온까지는 걸어가야할텐데 어쩌나 싶다. 이러나 저러나 뛰는게 더 좋은데..


나폴리

어우 썅. 힘들다. 오늘은 못적겠다. 위를 읽어보니 불과 오늘 얘기라는게 믿기지 않는다. 요약만하자면, 나폴리로 왔다. 이탈리아 쉽지않다. 나폴리 맘에 안든다. 하루라도 더빨리 여길 뜨고싶어졌다. 시끄러움. 엉망. 불친절. 비쌈. 시칠리아를 기대하고 있으나 동시에 불안하다. 조용하고 혼자오래 쉴곳으로 가고싶다.


조용하고 친절하며 자연이 뛰어나며 많은 시스템이 합리적인곳. 이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당연하지. 제주로 가야하나?


8.21(수) 아침 6:12 침대에서


수면

오늘도 일찍 깼다. 코가막혀서 더 잘수가 없다. 그래도 수면의 질은 여태 잔 중에 제일 낫다. 시차적응과 과잉운동, 코막힘 등의 문제가 지난 며칠 힘들긴 했다. 최고의 수면제가 수면부족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듯 하다. 카페인 과다 섭취도 수면부족을 이길 수 없다. (어젠 무려 세잔이나 먹었다) 무척 잘잔건 아니지만 이만하면 만족한다.


어제 적은게 없기때문에 마저 적어보자.


넋나간 어제

이제야 정신이 좀 차려진다. 어제 저녁은 살짝 넋이 나간 상태였다. 지난 며칠 피로가 쌓인 탓도 있었겠지만 쉽게 말해 이탈리아에 완전히 기가 빨려버렸다. 로마 관광지에 이틀을 묵어놓고 이탈리아로 퉁쳐버리면 섭하다고 말하면 할말은 없지만 아무튼 내가 얻은 첫인상은 이렇다. 불친절하다. 아비규환이다. 시끄럽다. 매너없다. 비싸다. 수많은 유적으로 이 불만들을 상쇄해야 했는데 성베드로 성당과 판테온으로는 역부족이었는지도.


사실 불만의 근원은 대상보다는 내 영양과 건강상태에 있는지도 모른다. 불친절하게 느껴지는건 내가 시차적응을 덜 했기 때문이고, 엉망에 시끄럽다고 느끼는 것 역시 내가 너무 많이 뛰거나 걸어서 족저근막 통증을 약간 지니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깨알 홍보하자면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는 훌륭한 책이다. 이해는 뭐 그렇다 치고, 아무튼 졸라게 불친절한건 맞는 것 같다. 몇년전 아르헨티나 여행이 떠오른다. 레스토랑이든 카페든 숙소든 어딜가나 환대하는 법이없다. 이탈리아는 친절이 불법인걸까? 정확한 정보나 제공하면 다행인 수준이다. 영재와 어머니와 점심을 먹으러 갔던 식당에서는 웨이터가 얼굴에 조소와 경멸을 가득품도 비아냥대며 주문을 받다가 결국 주문을 완전히 받지도 않고 사라졌다. 어딜가나 불편한 심기를 신경쓰고 있다는 그 지점에서 나는 기를 쓰고 있다.


이제는 좀 편안한 곳(앞서 말했듯 깨끗하고 친절하고 합리적인 곳?) 가고싶다는 욕구를 품고 나폴리로 왔으니 어지간히 바보짓이었다. 처음에 나폴리 중앙역에 내렸을 때 든 생각은 '정말 크군'이었다. 로마가 서울이면 나폴리는 부산정도 되려나? 부산만큼 큰가 보구나.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잠시뒤에 생각은 바뀌어 나폴리는 부산보다 델리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정체불명의 쓰레기와 똥들이 거리에 나뒹굴고, 릭샤와 소는 없지만 강한자만이 살아남는 교통체계, (여기선 길을 건널때 달려오는 차를 세우고 건너면 된다) 거리의 부랑인들의 행패, 이유없는 소음, 인도를 떠오를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인도는 그걸 보러간다지만, 여긴 미항을 보러왔다. 앞으로 통영에 나폴리 빗대지 마라.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사실을 안다. 안다는 것과 행하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을 안다. 아무튼 나는 어제 넋이 나가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항구의 풍경을 보기도 전에, 그러니까 숙소에 도착해서 (불친절한 숙소 직원이 또 한방 먹인 탓도 있다) 바로 여기를 떠나고 싶어졌다. 다시 그 거리를 뚫고 한시간정도 걸어가서 만난 '세계 3대 미항'은 내가 사는 종달항이나 동양의 나폴리로 일컬어지는 통영보다 못했다. 아니 마음가짐이 이미 그랬으니 아름다워 보일리도 없었겠지만.




헛소리그만하고

시칠리아 일정을 좀 고민해봐야겠다.

아니 오늘 일정부터.


오늘은 일단 똥을 싸고. 8시에 조식을 먹은뒤. 지하철타고 어디를 가서 놀고. 커피와 피자따위를 먹고. 농땡이 필 실내 공간 없나? 있으면 농땡이 피고 들어와서 러닝 피자 후 하루 마무리


9:12pm 자기전 침대에서.

다음 일정 생각 

아우 썅. 힘들다. 하루중에 다음일정 생각하느라 쓰는 시간이 꽤 많다. 구글맵으로 이거저거 찾아보고, 부킹닷컴에 검색해보고, 성에 안차면 네이버나 유튜브좀 보고있으면 내가 계획짜러 여행온건 아닌지 헷갈린다. 결국 계획을 세우지도 않을거면서.


나폴리가 생각보다 맘에들지 않으면서 다음여행지를 더 열심히 찾아보게되는 것도 있다. 불만이 많아지면 내 욕구가 뾰족해졌다는 뜻도 되기 때문이다. 지금 불만의 반대로 가고싶기 때문에 조건을 충족하는 다음 여행지, 숙소따위를 한참이고 경우의 수를 세워보고있다. 이러기 싫으면서도 말이다.


아무튼 팔레르모에 도착하면 예의상 하루는 묵어주기로 했다. 나는 내가 팔레르모를 무척 맘에들어하지 않을거라는 사실을 알고있다. 투어리스틱 시티는 이제좀 그만 가라. 내가 이럴거면 발리갔지. 나는 이탈리아를 느끼고 싶고, 지중해 바다와 음식을 알고 싶고, 여유를 가지고 싶고, 만나는 인간은 편안했으면 좋겠다. 그럴러면 시칠리아를 내키는대로 가지말고 좀더 검색하긴 해야했다.


체팔루와 리파리섬은 반드시 갈것 같고, 타오르미나도 묵는게 좋겠다. 가능하다면 부킹닷컴에서 맘에든 카이트 호스텔도 시칠리아를 떠나기 전에 방문하면 좋겠다. 나폴리덕에 이정도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게 됐으니 썩 나쁜일은 아니다. 팔레르모 이후에 시라쿠사로 한번에 섬반바퀴를 크게 이동해서 다시 시계 반대방향으로 조금씩 여행하며 팔레르모로 돌아올 생각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오늘 뭘했더라.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뮤지엄에 갔다. 커다란 대리석 동상이 엄청나게 많더라. 그 큰걸 뭐하러, 그렇게 구체적으로, 깎고 앉았었을까? 배경지식이 없어 재미는 못느꼈고 시간은 잘 보냈다. 싸가지없는 직원이 기억에 남는다. 이탈리아는 친절이 불법.


러닝

나폴리가 아주 조금은 맘에 들어졌다. 애초에 숙소 위치를 잘못잡았지 싶다. 똥과 쓰레기를 피하고 마약에 쩌든 부랑인을 곁눈질로 구경하며 거대한 철장문을 밀고 들어온 이 숙소. 내부야 깨끗하다 하지만 첫인상을 그렇게 박아놓고 나폴리가 맘에들기란 참 어려운 일일 터다. 서울로 치면 서울역 코앞 노숙자 거리에 숙소를 잡아놓고 인사동 거리를 어깨밀치며 활보한 셈이다. 러닝한다고 멀리까지 가보니 좀 괜찮았다.


그렇게 두시간을 조금 넘게 뛰었다. 역시 러닝은 무릎빼고는 만병통치약이다. 나폴리 자체는 썩 괜찮다는 생각이 들고, 다시온다면 기차역 근처에 숙소를 절대 잡지 않으리라는 생각까지 했느니 러닝효과는 대단한 셈이다.


커피

그래도 에스프래소는 늘 메모해야지 싶다. 커피 센트랄 이라는 곳에가서 에스프레소를 더블로 마셨는데 직원이 불친절하진 않았다는 점이 (당연 친절하진 않지만) 기억에 남는다. 커피는 죄다 크레마가 아주많고 초콜릿 맛을 조금씩들 낸다.



8.22(목) 08:47 팔레르모행 배에서


승선

팔레르모행 배를 탔다. 크루즈 크기는 완도에서 제주가는 배 두배정도 되는 듯 하다. 아홉시간 걸린다고 하니 그정도 규모가 맞긴 하겠다. 아파트 한채는 실을 수 있을만한 배에 사람만 탄 경우는 나말고 거의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다 비행기 타고 가는가보다. 제주에 간답시고 인천에서 배를 탄 경우라고나 할까.


여객 터미널은 역시나 엄청나게 불친절하다. 사람이 불친절 하다는게 아니고 어디서 무엇을 몇시에 타야하는지 알기가 참 어렵다. 커다란 전광판에 타임테이블을 띄우고 있어 들여다 봤더니 내가 타려는 배는 없다. 분명히 내가 타려는 선사의 사무실이 여기에 있는데 뱃시간은 없단다. 이탈리아 나흘째엔 이런일에 쫄지 않기로 한다. 나는 눈치코치로 사람들 무리를 따라다니며 내가 예약한 시간이 되면 그냥 배에 올라타면 되리라고 생각했다.


항구엔 아파트도 실을만큼 큰 선박들이 여러채 정박해 있었는데, 그중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곳으로 따라갔다. 하지만 배 입구에서 경비하고있는 군인에게 물어보니 이배는 아니란다.


군인은 무척이나 친절했다. 나는 군인이 친절하게 만드는 방법을 조금 썼는데 나도 한국에서 군인이었다고 했다. 그는 흔치않게 씨익 하고 웃어보였고, 따봉도 날려줬다. 그러더니 나를 아주 멀리있는, 다른 더 큰 아파트를 싣을 수 있는 큰 배로 나를 데려다 주었다.


사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제주에 가는 배낭여행객을 만나기 쉽지않듯이 여기도 마찬가지 인듯 했다. 배낭을 맨 사람이라곤 나랑 피부가 까무잡잡한 여자밖에 없었다. 승무원은 배 입구에서 검표를 하다가 나를 붙잡았다. 내 핸드폰에 있는 티켓을 돌려가며 이리저리 보더니 기계로 바코드를 찍어댔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다른 승무원 이사람 저사람을 부르기도 했다. 이탈리 특유의 고성과 손짓으로. 내가 해석하자면 대충 이런말들을 주고 받는 듯 했다.


이 사람도 여기 타는거 맞는가?

표를 찍으면 되잖아

바코드가 안먹는 군

어이 형씨 본 조르노

이 기계가 왜 안될까

표를 찍으면 되잖아

바코드가 안 먹는 군


내가 문제있나요? 하고 묻자 대머리 승무원은 아무문제 없다고 했다. 나는 바코드를 가지고 씨름하는 승무원을 옆에두고 이십분정도 기다렸고, 승무원은 되지도 않는 바코드에 될때 까지 인식기를 찍어댔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에 마법처럼 바코드가 인식됐고, 승무원은 자랑스럽게 기계가 출력해준 인식표를 나에게 건넸다.


에스컬레이터를 따라가쇼.


배는 왜 출발하지 않느걸까? 물론 이런 생각을 하면 안된다


모비딕

아! 마침 이 페리의 이름이 ‘모비’이다. 이렇게 기분좋게 공교로울 수가. 읽던 모비딕에서 맘에드는 대목.


“고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내 보트에 절대로 태우지 않겠다”고 스타벅은 말했다. 이 말은 가장 믿능 수 있고 쓸모 있는 용기는 위험에 맞닥뜨렸을 때 그 위험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데에서 나온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은 겁쟁이보다 훨씬 위험한 동료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에게 용기는 감정이 아니라 다만 자기한테 유용한 것이었고, 실제로 꼭 필요한 경우에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늘 가까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이 포경업에서 용기란 쇠고기나 빵처럼 반드시 배에..


식당이 준비돼었으니 식사 맛있게 하라는 방송이 흘러나왔지만, 메뉴판을 슬쩍 보고 먹지 않았다. 그 직전에 커다란 피자빵을 먹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꾸 한끼에 이만원정도씩 주면서 그저그런 음식을 해치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자리에 앉아 한숨 잤다. 어쨌든 한시간 정도는 지나있었다. 이제 팔레르모까지 네시간 반 정도 더 가면된다. 서울애서 통영까지 걸리는 시간 정도이다.





18:27

시칠리아가 코앞에 보이는데 배가 갑자기 멈췄다. 관제소의 입항허가라도 기다리는 걸까? 배고프다. 검색해보니 백종원이 팔레르모에서 뭔가를 찍었었나보다. 그 집에서 내장버거를 먹을 생각이다. (줄이

길어서 못먹었다)


22:14

아우 힘들어. 내일부터 일정좀 머리속에 박아보자. 본격 시칠리아. 구월 십삼일 까지 총 22박 23일 시라쿠사 3박노토 2박 타오르미나 4박 리파리섬 4박 체팔루 4박 아그리젠토 1-2박 마르살라3-4박 대충이러면 되나?


생각보다 시간많네? 시라쿠사 3박은 하자


아무생각없이 폰을 한시간정도봤다. 피로가 몰려온다. 여행에대한 어딘가 께름칙한 느낌이있다. 맘에 안든다는 느낌. 하지만 맘에드는게 가능이나 한 일일까? 내일은 시라쿠사로 간다. ’본격적으로‘ 시칠리아 여행을 한다지만, 솔직히 말해 전혀 기대가 안된다. 아니 너무 맘에 들지 않을까봐 되려 걱정되는 수준이다.


왜 이럴까?


남미는 왜 재밌었을까? 인도는 왜 별로였을까? 사실 여행이란건 애초에 이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남미든 인도든 지금이랑 정말 무언가가 달랐을까? 여기보다 친절해서? 깨끗해서? 의외로 전부 사람때문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오늘은 잔다



8.23(금)


시라쿠사 가는 버스 7:57am

버스에 탔다. 이제 광역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덴 익숙해진 듯 하다. ‘여기가 타는데 맞나요?’ 같은걸 묻지 않았으니까. 아침에 커피를 마실때 점원의 무뚝뚝함에도 익숙해졌다. 한가지 기술을 터득했는데, 스페인어로 그냥 말하면 알아듣는다. 마치 무척이나 익숙하다는 듯이 말이다. “삼춘 에쏘 하나 크루아상 하나 주쑈”라고나 할까. 이탈리아 사람들은 손님이 짧은 이태리어로 어버버 하는 시간을 싫어하는 듯하다.


오늘부턴 음식을 해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제는 돈을 아낀답시고 팔레르모까지 오는 내내 피자빵 하나밖에 안먹었다. 뭐그래도 만원이었지만. 그랬더니 저녁에 배가너무고파서 삼만원어치 더럽게 맛없는 피자를 먹었다. 살몬피자를 내가 무슨 배짱으로 시킨걸까?


사실 나는 종달리에서 지내듯이 이탈리아에서도 지내길 원한 듯 하다. 푹 잔뒤 원할 때 일어나 러닝이나 책을 읽고 바다가 가깝다면 수영을 하고 저녁으론 지역해산물로 만든 파스타를 먹는다. 아침엔 과일을 거르지 않으며 때때로 역사유적지에 방문해 눈물이 고일만한 감동을 받고, 글로 남기는 시간을 가진다. 로컬과 가까워지며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다른 배낭여행객과 생각을 공유한다.


헛소리도 이런 헛소리가 없다.


암만 생각해도 여행은 그딴 경험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어쩌다 하루이틀 정도는 그런 날을 보낼 수 있지만, 그건 잘된 여행이라서가 아니다. 불확실한 룰렛에 하루를 던지고 당첨되는대로 살아가는 것이 평소의 삶이라면, 여행은 룰렛를 돌리려는 나에게 뺨을 때리는 듯하다. 가지고있던 기회까지 뺏어버린 채, 자 이제 너는 어떻게 할래용? 묻는듯 하다. 저는 시라쿠사에 가는데요. 내 대답은 그것밖에 없으며 그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언제 알래?


모비딕

나는 내 영혼 속의 두려움 때문에 더 큰 소리로 외치고, 내 맹세를 더 힘껏 망치로 못질하여 단단히 고정시켰다. 나에게는 격렬하고 불가사의한 공감이 있었다. 에이해브의 억누를 수 없는 원한이 내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선원들과 더불어 저 흉악한 괴물을 죽여서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하면서, 그 괴물의 내력을 알고 싶어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저녁식사 18:53

오르티기아 섬을 한바퀴 뛰고 처음으로 마트에 들렀다. 더 이상 이런식으로 끼니를 사먹을 수는 없었다. 맛집을 골라다니는 성격은 아닌데,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 승질이 나는 기질 탓에 여행와서 식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거의 없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돈이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여기서 먹지뭐, 하는 식으로 돈을 쓰면 한끼에 삼만원씩 날아가곤 했다. 지난 며칠이야 애교로 그랬다 치고 이제는 여행자 답게 해먹어야지, 라는 생각으로 마트에 들렀다.


이탈리아 슈퍼마켓은 들어가자마자 가지각색 파스타로 가득 진열되어있다. 집에서 흔히 먹던 긴 면을 집을까 했지만 그 옆에 구멍 뚫린 몽땅연필 처럼 생긴걸 골랐다. 언젠가 유튜브에서 보기론 생김새에 따라 이름이 있던데, 끓이면 다 먹을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대충 고른 것이다. 메뉴는 죄다 이탈리어로 써있는 데다가 점원들도 영어가 안됐기 때문에 눈치코치로 집어 담아야 했고, 눈치코치도 별로 안좋기 때문에 한참의 고민끝에 가장 확실한 야채, 마늘 두개를 넣었다.


내가 파스타면과 마늘을 한참이고 뒤적거리는 동안 점원들의 눈길이 나를 쫓아다니는게 느껴졌기에 나는 조금 민망해졌다. 원래 이런 장보기가 익숙한 사람인 양 눈앞에 있던 사과를 태연한 척 하나 달라했고, 복숭아도 하나 달라했다. 그리고는 자신있게 물었다.


올리바? 올리바? (올리브는 어디있죠?)


올리바는 올리브의 스페인 말인데, 이탈리아 말을 모를때는 그냥 스페인말로 물으면 사람들이 용케 알아듣는다. 문제는 내가 ’올리브오일‘을 찾고 싶었던 것인데, ‘오일’은 뭐라해야하는지 몰랐다. 점원들은 다같이 손가락으로 화려하고 싱싱하게 올리브 바구니를 가르켰다. 나는 올리브 바구니 앞에 가서 이번엔 이렇게 말했다.


웨얼 이즈 올리바 오일?

츄츄츄츄. (기름 두르는 시늉을 하며) 포 파스타.


올리브를 소개한 점원들은 다같이 오일 가판대를 가르켰다. 거기엔 한국에서 본적없는 너무나 많은 종류의 오일들이 나열돼어있었는데 나는 ‘올리브’가 써있는 기름통중에 가장 작고 가격이 싼걸 얼른 집어 담았다. 이게 내가찾는 올리브오일이 맞는진 모르겠지만 이제 그냥 먹을 생각이었고 배가 고파졌다.

얼른 바구니를 들고 계산하러 나오는 길에 슈퍼마켓 쇼룸 한켠에 볶음밥 비스무리 한게 가득 쌓여있는걸 보았다. 나는 눈이 돌아갔더. 뭐냐고 묻자, 점원은 쌀,토마토,피쉬 라고 답했다. 난 그걸 한접시 달라했고 저녁으론 방금 그걸 먹었다. 파스타는 나중에 해먹어야겠다.


짚고 넘어가기

마늘은 이탈리아어로 알리오.

오일은 이탈리아어로 올리오. 이럴수가.



8.24(금) 08:05 똥싸며


아침

잠을 꽤 잘잤다. 길게 숙면하진 않지만 여러번 깨면서 잤는데도 개운한편이다. 바뀐 시차가 리듬에 더 잘 맞기라도 하는걸까? 마그네슘을 잘 먹고있어서 그런가? 술을 오래 안먹어서 숙면모드가 켜진걸까?


오늘은 최초로 계획이 좀 있다. 남쪽으로 11km 정도를 뛰어가면 해변이 나오는데 수영하고 다시 뛰어서 돌아올 예정이다. 일행이 없어서 수영할 동안 짐은 어떡하나 걱정되긴하는데 어떻게든 되겠지. 솔직히 말하면 버스타고 가고싶은데 버스가 있는지 모르겠고 알아보자니 귀찮아서 그냥 뛰어가기로 했다.


러닝을 하면 한가지 문제가 있는데 칼로리값과 물값이 너무 많이든다는 것이다. 운동을 하는 만큼 채워줘야하는데 뭐하나 사먹자면 돈이 순삭이니 적당히 조절하고 있고, 그덕에 살과 근육이 쭉쭉 빠지고 있다. 여기서 더빠지면 마라톤 기록이 올라가겠지?


러닝 수영 보트

구글맵에 경로를 찍고 따라서 뛰면 위험한 순간이 종종 발생하는데 오늘이 그랬다. 네비를 따라 뛰다가 자동차만 다니는 도로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원래는 십키로 정도 뛰어가서 수영하고 밥을 먹은 뒤 십키로 정도를 다시 뛰어올 생각이었다. 근교 구경도 하고, 마일리지도 쌓고, 수영도 하고. 우와 짱이다. 일찍 일어나 카푸치노와 크루아상을 입에 넣고 10분 정도 달리니 나는 완전히 차도에 들어와있었다. 한국으로치면 6번 국도라고나 할까. 지난 일주일간의 경험으론 이탈리아 운전자들은 사람을 반드시 스쳐지나가듯이 차를 몰고 다니기 때문에, 나 하나 차도로 뛴다고 해서 운전자들이 큰 불편을 느끼는건 아닐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건 나좋자고 한 생각이고 실제로 나는 확실히 겁나게 무서웠다. 진작에 돌아갔으면 모르겠건만 이미 중간까지 달려왔기 때문에 해변이 나타날 때 까지 꾹 참고 달리기로 했다.


해는 생각보다 뜨거웠다. 가끔 지나가는 커다란 트레일러는 나보다 큰 바퀴사이로 나를 말려 들여보낼 것같았기 때문에 나는 오공공 페이스로 올렸다. 키로미터당 5분으로 뛰면 삼사십분만 더 뛰어도 이 도로에서 벗어난 해변이 나타났기 때문에 빨리 갈 작정이었다. 들고온 물이 동나고 마음을 비워 걷기 시작했을 때 쯤 해변이 나타났다.


해변이라기엔 민망하지만 아무튼 해변은 해변인 그런 해변. 동네의 노인들이 나와 발을 담구고 있었다.


해변에 대한 기대는 애초에 없어졌기 때문에 실망은 크지 않았다. 수영이고 뭐고 어떻게 돌아가느냐가 문제였다. 뛰어서 돌아갈 계획이었지만 저 6번 국도 같은 아스팔트 길로 다시 빨려들어갈 순 없었다.


나는 해변 끝에있는 작은 오두막을 흉내낸 매점에 가서 물었다.


“물 하나주세요. 미안합니다. 현금이없군요.”

“괜찮아요. 내추랄로 드릴까요?”

“좋아요. 그냥 두개주세요.”

“8유로에요.”

“8유로라고?“

”하나에 4유로“

”알았어요. 주세요.“


“근데 여기 버스없습니까? 오르티지아로 가야해요”

”오르티지아? 버스 없어요“

”택시도 없나요?“

”없어요“

”오르티지아는 어떻게가죠?“

”당신 차 없어요?“

”난 차 없어요. 뛰어왔어요“

“당신은 미쳤군요”


옆에있는 남자가 끼어들었다.

“보트, 보트를 타고가요”

“보트요? 저 보트요?“ 바다를 가리키며 물었다.

”한시간뒤면 보트가와요“

”얼마인데요?“

”20유로“


누구 보트가 무슨볼일로 온다는 걸까? 택시라는 걸까? 나는 타고싶다고 했다. 머리속에 택시비를 삼사만원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20유로가 싸게 느껴졌다. 물을 4유로에 판 남자는 자기한테 계산하면 된다고 했고, 나는 그자리에서 보트값을 계산 했다.


요리

오늘은 최초로 음식을 해먹었다. 햄같은걸 썰어넣은 푸실리 파스타다. 마늘이랑 파프리카 가루를 잔뜩 쏟아넣었는데 옆에있던 유럽인들이 놀랄까봐 허겁지겁 그리고 조용히 먹었다. 너무 소심했나? 그러면 다음엔 우유까지 부어서 이탈리아노에게 맛을 보라고 해야겠다.


마트에서 산 고기 이름은 IL COTTO SAURIS. 판매원은 내가 뭘 알고 고른줄 알겠지만, 나는 매대 정중앙에 손가락을 뻗었고 거기 그 고기덩어리가 있었을 뿐이다. 한국말로 하자면 햄. 아닐수도 있다. 정체가 뭔지 찾고싶은데 못찾겠다.


모비딕

무엇보다도 나를 몸서리치게 한 것은 고래의 색깔이 희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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