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X Aug 09. 2024

혹시 어느 성에 사시는데요?

: 쓸데없이 재미있게 살아볼게


‘이스트 팰.리.스.로 검색하고 오라니까!’


예전 영화판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집들이입니다. 꼭 와야 한다는 협박과 함께 오랜만에 과거 함께 일했던 직장 동료들의 전우애를 다지자 합니다. 옛 친구는 얼마 전 자가로 집을 마련했습니다. 20년 가까이 힘든 영화판, 공연판을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성실히 노력한 결과입니다. 은행빚조차 지지 않았다고 하니, 너 이 녀석… 결국 해냈구나! 축하도 해주고 오랜만에 얼굴도 함께 볼 겸 용인 친구 집으로 찾아갑니다.


‘이스트팰리스라…’


뭔가 환상적입니다. 운전대를 잡고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는 황금빛 아침햇살의 실루엣을 뒤로하고 서있는, 고색창연한 궁전입니다. 베르사유나 상수시 같은 그런 멋진 궁전! 잘 가꿔진 궁전 정원에는 말과 사슴이 뛰어놀고 인근 숲에는 미녀 엘프들이 살 것만 같습니다. 아마 판타지 소설의 동쪽 세계 그 어딘가, 깎아지는 절벽과 숲, 호수에 둘러싸여 찬란하게 빛나는 궁전이 틀림없을 겁니다. 독일 어느 고성,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마법의 성, 디즈니랜드나 롯데월드에 환상의 성을 닮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마트에 들러 잠시 집들이 선물을 사면서도…아! 궁전을 방문하는데 두루마리 휴지나 사가도 되는 건가? 휴지쪼가리나 사가는 내가 어쩌면 참 보잘것없어 보입니다. 물론 친구가 사는 집은  독일의 노이슈반스타인성도, 오즈의 마법사가 사는 에메랄드캐슬도, 태양왕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도 아닙니다. 친구의 집은 고층 건물이 즐비한 대단위 아파트 단지입니다.


주차장에 들어섭니다. '어찌 이리 궁전도 많고 성도 많은 거냐'  쓸데없는 생각이지만... 오페라하우스, 타워팰리스, 트라마제, 마크힐스, 퀸즈파크, 갤리리아포레, 파밀리에, 칸타빌, 이스트팰리스, 유로카운티, 파라곤, 로얄팰리스, 아크로포레스트…아! 아찔합니다. 속이 다 울렁거립니다. 왜 우리는 맞지도 않는 옷처럼 전혀 관계없는 이런 이름들을 아파트 이름으로 짓는 것일까?


혹시 뜻이 너무 좋아서? 이름만 들어도 사람들이 마구마구 열광해서? 이름만 불러줘도 꽃이 되어서? 곰곰이 그 의미를 떠올려봅니다.


오페라하우스 – 웬 음악당? 파리와 시드니의 그 오페라 하우스?

타워팰리스 – 탑으로 된 궁전… 너란 녀석 정말!

트라마제 – 세 가지 오마주? 뭐래?

마크힐스 – 언덕 위에 표식

한남더힐 - 한남동 언덕배기

퀸즈파크 – 대영제국 만세! 여왕폐하 만세!

갤러리아포레 – 긴 복도 숲?

파밀리에 – 가족? 어쩌라고? 종친회 아파트인가? 집성촌인가?

칸타빌 – 노래하는 마을이라구요? 층간소음은요?

이스트팰리스 – 동쪽에 있는 궁전

유로카운티 – 유럽 영지… 왜 이곳에서 찾아요? 왜요?

파라곤  - 모범, 궁극의 모델… 아파트 이름 참…

로얄팰리스 – 왕가의 궁전? 와우!

아크로포레스트  - 가장 높은 숲이라

하이페리온 – 높은 곳이 있는 자?


나만 그런가? 의미를 풀어보자니 낯부끄럽습니다. 얼굴이 다 벌게집니다. 아! 반성합니다. 어쩌면 나같이 광고를 만들고 브랜딩을 밥벌이로 하는 사람들이 한참을 게을러빠져서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팰리스, 포레, 더퍼스트, 센트럴, 리버, 레이크, 오션뷰, 마리나, 파크, 파크뷰, 메트로, 에듀, 시티, 힐, 아크로, 써밋… 적당히 이런 이름을 앞뒤도 붙이고 평생 돈을 모아 집장만하려는 서민들을 현혹시킵니다. 뭐 현혹시키는 것은 좋은데 좀 적당히 성의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뜻도 의미도 없이 마구 붙이는 이름이 참 어색한 장소에 딱 똬리를 틀고 있는 낯선 그 무엇입니다.

 

유능한 세일즈맨였던 그레고르는 하루아침에 벌레로 변신합니다. 그레고르는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고 일한 죄밖에 없는데 말이죠. 그렇지만 단지 열심히 살았다는  문제입니다. 그는 의미가 없이 열심히 살다 보니 벌레가 되었고,  벌레가  그레고르를 사랑하는 가족들도 벌레로 취급을 합니. 삶의 의미, 자신의 존재 이유를 고민하지 않고 방치하다 결국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리게 된 겁니.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 이야기입니다.


갑자기  이런 개똥 같은 이야기냐구요? 아파트 이름들을 보니 어색한 장소에 존재를 잃은 그레고르 같습니다. 아니면 나의 모습일지 모를 일입니다.

 

요즘은 이스텔라, 델루시아, 클라테르, 프레티움, 에클라트, 라클래시...

아… 이건  무슨 뜻인지,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겠어요. 게임 광고주의 일을 의뢰받으면 게임명을 함께 제안하기도 하는데 모두가 게임명이라 생각해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이러다  ‘길드’ ‘클랜’‘레이드 ‘퀘스트’ ‘던전’ '빌런'이란 이름의 아파트도 나올 판입니다.

 

어쩌면 하늘아래  집하나 마련하는 게 인생의 목표인 우리들에게 이런 따라올래야 따라올  없는 이름의 내 집이 하나 떡하니 생기면 더없이 좋겠지만… 아니 어렵게  벌어서 마련한 아파트니 만큼 쉽고 친숙한 이름보다야  있어 보이고 각별해 보이는 이름을 갈망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우습고 요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사는 아이파크도 I 이노베이션을 뜻하는데.... 인노베이션 파크 그러니까 혁신공원 아파트라는 뜻인데 무엇이 이노베이션이고 무엇이 파크인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혁신도  모르겠고 눈을 씻고 봐도 작은 나무조차 보이지 않는데 말이죠.

 

그래 어쨌든, 궁전은 아니더라도, 혁신공원에서 사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입니다.

 

블라디미르: 우린 여기서   있는  없네.
에스트라공: 어딜 가도 마찬가지지.
블라디미르: 고고, 그런 소리 말게. 내일이면    거니까.
에스트라공:  된다고? ?
블라디미르: 자네  꼬마가 하는 얘기  들었나?
에스트라공:  들었네.
블라디미르: 그놈이 말하길 고도가 내일 온다는군. 그게 무슨 뜻이겠나?
에스트라공: 여기서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지, .

 

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늙은 두 주인공은 기다립니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의지도 없이 기다릴 뿐이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런 변화도 없습니다. 고도는 결코 오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뭐라도 좀 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살고 자식이 살 이쁜 집의 이름이라도 좀 공모해 보면서 말이죠.

바꿔보자구요! 이상 오지랖입니다. 뭐 아님 말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