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2.05 금요일, 여행 9일 차
아침에 눈을 뜨니 19시간이 빠른 한국은 이미 내 생일이구나. 하루 전에 여기저기서 생일 축하를 받으니, 생일을 두 번 치러 두 살 먹는 느낌, 그래도 나쁘지 않다.
지우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숙제를 한다. 난 초등학교 때 방학식 하는 날, 친구 성준이 집에 가서 둘이서 숙제를 모두 다 해치우고 그 다음날부터 개학할 때까지는 거칠 것 없이 놀았던 기억인데, 우리 딸은 개학에 임박하여 피치를 올리는구나. 그래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숙제해야 한다며 책을 꺼내는 모습은 귀엽고 대견하다.
[She is doing homework]
오전에는 어제와 동일하게 호텔 수영장으로 나갔다. 여전히 백여 명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체조를 하고 있고 우린 어린이 풀장 앞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는 굳이 보호자가 없어도 애들이 안전하게 놀 수 있는 곳이라, 난 옆에 있는 SPA로 들어갔다.
뜨뜻한 SPA 물에서 피부 속 노폐물들이 씻겨 나가고 순두부 같은 몸이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구석구석 잔재해있는 근육들이 이완되는 느낌이 좋아진 걸 보면, 몸뚱이부터 꼰대가 되어 가고 있구나.
하지만 선을 넘으면 안 된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으… 좋다…”라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에이, 이건 진짜 아니잖아. 저런 추임새를 만 38세로서의 마지막 날을 보내는 사람이 내었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러웠다. 반성하는 의미로 몸을 차갑게 굴리기로 했다. 그래서 스노쿨링 장비를 챙겨서 바닷가로 나갔다.
어제 스노쿨링은 다소 밋밋했었는데 오늘은 애들 없이 혼자 갔고, 스스로를 혼내기 위한 목적도 있는 바, 돌섬을 끼고 제법 멀리까지 나가보았다. 역시 돌 근처에 물고기들이 많다. 물론 여기서도 아쿠아리움에 옮겨 놓고 싶을 만한 휘황찬란한 생명체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수심 깊은 곳에서 조끼도 입지 않고, 펠프스 같은 발차기는 아니지만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한 자세로 스노쿨링을 하고 있는 자체가 스스로 만족스러웠다. 이게 30대의 모습이지. 다시는 SPA에 들어가서 감탄사를 내뱉지 않으리. 오리발만 있으면 상어도 잡으러 나갈 수 있을 듯.
[Ko Olina Marriott Hotel 수영장]
이제 수영장에서 애들을 빼내는 것은 쉬워졌다. 오늘도 라면 먹으러 가자고 하니, 냉큼 따라나선다. 이제 라면의 파워는 거의 아이패드급이다. 남아 있는 라면 봉지를 모두 깠다. 짜왕, 짬뽕, 햇반 조합은 고래고기처럼 어느 하나 버릴게 없었다. 스팸만 있었으면 이게 임금님 수라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디저트로 Island Coffee집에 들러서 아사히 볼 한 그릇을 시켜 먹었는데, 맛은 뭐 그저 그렇다. 집에서 그릭 요구르트에 시리얼, 블루베리, 건과류, 꿀 등을 넣고 비벼먹는 것과 큰 차이 없다.
반쯤 먹고 놔뒀더니 새 한 마리가 날아와서 건과류들을 당당하게 빼먹는다. 며칠 전 집 앞 달팽이들만큼 간이 큰 녀석이다. 근데 이 새가 머리 부분이 붉고 눈썹이 지켜 세워진 것으로 봐서 앵그리버드의 실제 새인 것 같았다. 그래서 검색을 해보니, 앵그리버드의 실제 모델인 레드버드는 몸 전체가 붉고 얼굴도 훨씬 화난 것처럼 생겼구나. 이 새는 앵그리버드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화가 난 것만은 틀림없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Angry 한 Bird의 등장에 놀라는 지아]
[사이좋은 세 모녀]
오후는 쇼핑이다. T.J.MAXX를 갔다가 WAIKELE outlet으로 갔다가, 다시 T.J.MAXX 근처의 KUA’AINA 식당에서 U.S.Army 소현이 만나서 햄버거로 저녁을 먹고, 다시 WAIKELE outlet 갔다가 T.J.MAXX 들렀다가 복귀했다. A→B→A→B→A로 이어진 참 비효율적인 동선이었다. 근데 내일 옷 바꾸러 다시 T.J.MAXX와 WAIKELE outlet을 가야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중국 관광객이 와서 이마트와 오렌지팩토리를 하루 종일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심지어 오렌지팩토리 앞에서 기념사진도 찍는다.
저녁은 U.S.Army 소속의 소현이가 하와이 출장 중이라 식사를 함께 했다. 지우에게 아빠의 군인 친구를 만나러 갈 거라고 하니, 군인이 자기를 죽이면 어떡하냐고 걱정한다. 군인과 경찰은 무서운 사람들이 아니고 그들이 하는 일이 어떤 건지 설명을 해주긴 했는데, 그래도 총을 들고 있지 않냐며 무서워한다.
그나마 우락부락한 군인이 아니라 야리야리한 여군이라 경계태세를 좀 해제하긴 하였으나, 지우는 계속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날카로운 듯했다. 총싸움이 난무한 미드 한 편 같이 보면 기절할 듯.
미군으로서 출장지가 하와이 Pearl Harbor라니, 정말 꿈의 직장이다. 게다가 미국은 군인 할인이 참 많다. 국내에서는 VIPS와 CGV에서 군 할인을 해주는 것을 본 적이 있긴 한데, 미국에서는 이렇게 변두리 햄버거 가게에서도 군인 할인을 해주구나.
미국에서 9일 만에 햄버거를 처음 먹었는데, 맛은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역시 햄버거는 맥도널드 빅맥이 진리다. 어차피 햄버거를 면역력을 증가시키거나, 간 기능 개선을 위해 서거나, 키 크려고 먹는 음식이 아닌 이상, 맛있는 게 최고다.
결국 반나절을 쇼핑했지만, 실제로 산 것은 별로 없다. 우리 것보다 주위 사람들 선물 사는데 시간을 더 많이 할애했는데, 역시 선물 사는 것은 어렵다. 요즘은 해외 출장이나 여행이 일반화되어, 촌스럽게 나갈 때마다 선물을 사 올 필요는 없으나, 쇼핑의 천국 하와이에서 12일 동안의 여행이면, 선물을 해줄 사람의 범위가 넓어진다.
어릴 때, 아버지가 선수단을 이끌고 해외 시합을 자주 다니셨기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마다 선물을 받는 기분이 쏠쏠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선물이 세 개가 있다.
하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일본으로 출장 가시는 아버지한테 로봇을 사달라고 했는데, 당시 형과 나의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내 배꼽까지 오는 커다란 철인 28호 로봇을 사 주셨다. 몸의 뼈대에 자석들이 붙어있어서, 부품들을 자석에 붙이며 조립을 했는데, 크기와 무게가 어마어마했다. 지금으로 치면, 주위 사람들이 다 돌핀 시계를 차고 있는데 난 롤렉스시계를 찬 것과 같이 압도적인 로봇이였다. 당시엔 로봇 제일 큰 걸 가지고 있는 아이가 대장이 되던 시절이라, 주위 친구들이 철인 28호를 구경하고 싶어서 우리 집에 번호표 뽑아서 놀러 오곤 했었다.
두 번째 선물도 아버지의 일본 출장이었다. 오락기를 가지고 싶어서 부탁했더니, 아들들의 간청이면 달이라도 따오실 수 있던 아버지에게 오락기는 너무 쉬운 숙제였다. 근사한 오락기 두 개를 사 오셨다.
하나는 야구 오락기였다. 야구장 모양으로 생긴 오락기였는데, 투수가 직구도 던지고 커브도 던졌고, 타자는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온 공에 배트를 내는 속도에 따라 밀어치기도 하고 당겨 치기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게임이었다. 2루타, 3루타, 홈런이 나올 때마다 나오던 음성과 음악 소리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뚜르르르르뚜르르르르 뚜르르르르 뚜르르를 호무~런!”
그리고 또 하나의 오락기는 괴도 루팡이 4개의 집에 들어가서 물건을 훔치고 도망쳐 나오는 게임이었는데, 뒤로 갈수록 도둑질을 방해하며 날아오는 물체들의 속도가 빨라져 쉽지 않았다. 난 착한 아이여서 남의 집에 들어가서 다이아몬드를 훔치고 금고를 털던 괴도 루팡 오락기보다는, 언제든 홈런을 칠 수 있는 야구 오락기를 끼고 살았던 것 같다. 이 두 개의 게임은 지금도 어딘가 존재만 한다면, 일본으로 날아가서라도 사 오고 싶을 만큼 그립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선물도 일본이었구나. 아버지가 전 세계 골고루 출장을 다니셨는데 유독 일본에서의 선물이 기억에 많이 남아 있네. 내가 중학교 때 거금을 들여 Sony 스테레오를 산 이후, CD로 New Kids On The Block, Micheal Jackson 등 팝송을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했다. 그래서 출장 가시는 아버지 수첩에 몇몇 가수들의 이름을 적어 드리고, 이 가수들의 CD를 사달라고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오셔서 CD를 꺼내셨는데, M.C.Hammer의 CD 7장이었다. 당시 머라이어 캐리, 마이클 볼튼, 마이클 잭슨, 뉴키즈 온 더블락, 바비 브라운 등등의 가수 이름을 먼저 적었고, M.C.Hammer는 재미 삼아 제일 마지막에 적었던 가수였는데, 내 생각엔 음반가게 점원이 웬 한국사람이 종이쪽지를 건네며 이 가수들 CD를 달라고 했으니 호구 물었다 싶어서, 부진재고로 남아 있는 M.C.Hammer CD를 몽땅 아버지께 팔았던 것 같다.
아무튼 난 Hammer형의 Ucan’t touch this만 각종 버전으로 죽도록 들었던 것 같다. 메가 히트 곡이 저 곡 하나였는데, 정말 많이도 우려먹었더라. 훗날 내가 CD를 7장이나 사줬는데, M.C.Hammer가 파산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몇 장을 더 사줬어야 했나 안타까웠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선물 하나가 더 있었구나. 아버지가 러시아에 가셨다가 사 온 선물이었다. 인물의 특징이 너무나 정교하게 그려진 목각 인형이었고, 돌려서 열면 안에 다른 목각인형들이 차례로 들어 있어 있었는데, 작은 인형부터 순서대로 레닌 – 스탈린 – 흐루시초프 – 브레즈네프– 고르바초프였다. 물론 소련에는 브레즈네프와 고르바초프 사이에 짧게 두 명의 대통령이 더 있었지만, 이 목각인형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면 러시아에서 큰 임팩트는 없었거나, 당시 대통령이었던 고르바초프 정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나 보다.
나머지 선물들은 기억나지 않은걸 보면, 초콜릿이었거나 옷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의 철인 28호, 오락기, M.C.Hammer, 고르바쵸프처럼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선물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결국 쇼핑 체력과 경제력의 압박으로 그냥 초콜릿과 옷을 샀다.
그렇게 많이 받았는데, 내가 부모님께 사드린 선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하나는 기억난다. 삼성전자 다니던 시절, 친구 정효 홍콩 출장에 따라갔다가 명품 두 개를 질렀었다. 어머니에게 Hermes 스카프, 아버지께 Versace 넥타이. 나의 명품 데뷔 무대였다. 물론 자금의 압박으로 내 건 IKEA에서 고무장갑하나 밖에 안 사 왔지만. 그 Hermes 스카프는 지금 지영이가 하고 있다.
그때 향수도 하나 살까 말까 고민을 했었다. 하지만 ‘옷에 페브리즈 뿌리고 다니지 뭐’ 하며 끝내 사질 않았다. 당시 자취할 때 페브리즈를 참 많이 뿌렸었다. 그러다 페브리지가 떨어지면, 그냥 스팸을 구웠다. 럭셔리한 스팸 구운 냄새가 조그만 자취방 구석구석에 퍼지면 세상을 가진 기분이었다.
선물을 다 사고 집에 왔더니 애들은 또 에너지가 넘쳐 뛰어다녔다. 저 기분 잡치기 싫어서, 방 안에서 바퀴벌레 한 마리 잡았다는 말은 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잠들기 전, 지아가 빨간 크레파스를 들더니 입술에 바른다. 나도 최근에 비슷한 경험을 했다. 아침에 면도기, 치약, 칫솔을 들고 샤워부스에 들어갔는데, 면도기에 치약을 짰다.
이두 개는 비슷한 행동들인데, 난 짠하고 지아는 귀엽다고 난리다.
생일이 아니었지만, 생일 축하를 많이 받았던 하루가 또 이렇게 끝나 간다. 진짜 이틀 남았단 말인가. 안타깝지만 Good n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