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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우 Apr 04. 2018

월간 김창우 : 2018년 3월

Wish list


3월 들어 갖고 싶은 것이 두 개가 있었다.

블랙베리 핸드폰과 고양이.


둘 다 와이프가 반려하고, 대신 와인셀러를 사줬다.



와인


2016년 하와이, 2017년 영화에 이어, 2018년 새로운 취미를 찾았다. 무려 와인!


소주도 싫고 맥주도 싫은데, 세상은 그 둘을 섞어서 마시라고 한다. 몇 잔은 페이크가 가능하지만, 그걸 눈치챈 독사들이 내 잔을 쳐다보며 파도를 탄다. 아무리 바닷가 마을 출신이래도 파도를 피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나의 주량은 소주 반 병이라 파도 두 번만 맞으면 익사해 버린다.


하지만 난 주량이 약해서 술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맛이 없다. 이걸 왜 마시나 싶다. 난 게장 알레르기가 있는데, 게장은 너무 맛있잖아. 그래서 게장이 보이면 일단 먹어버리고 후에 고통받는다. 알레르기가 있는데도 계속 먹어버리니, 내 몸도 헷갈리는지 요즘은 내성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 몸 하나 속이기는 너무 쉬웠다. 술도 만약 쿨피스, 맥콜, 밀키스처럼 맛만 있었으면, 먹고 죽고 토하고 뻗고를 반복하다가 극복했을 텐데.


그런 술또라이가 와인에 입문했다. 블랙베리 핸드폰과 고양이 대신 와인셀러를 산 것이 도화선이 되었다. 비록 12병 밖에 들어가지 않는 최저가 Carrier 미니 와인셀러였지만 한 두 병만 넣고 전원을 켜 놓기는 아까웠다. 외모도 검고 각진 깡패라 에너지 소비 효율도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한 병씩 채워 넣기 시작했다. 이마트, 코스트코, 와인나라 코엑스점 르 클럽 드뱅, 삼성동 세계 주류 할인점, 삼성점 골든타워 밑 와인타임,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 와인샵 등 내 동선에 걸리는 와인 가게에선 닥치고 한 병씩 샀다.


우선 1~3만 원대에서 국가별, 지역별, 포도 품종별로 다양하게 구매해보며 나와 와이프의 와인 취향을 알아가고 있다. 아직은 너무 초보 단계이고 엔트리급만 마시고 있긴 하지만 호불호가 조금씩 생기고 있다. 내게 와인 취향이 생기고 있다는 걸 적는 이 순간에도 어이없긴 하다. 술? 내가?


와인을 개봉해놓고 구글로 해당 와이너리 사진도 검색하고 제품 설명서도 읽어본다. 그 뒤 잔에 코를 박고 와이너리 사진을 보며 첫 모금을 마신다. 초보가 별 허세는 다떤다.


난 순발력보단 지구력으로 살아온 인생이다. 무엇이건 긴 호흡으로 가져가는 것을 잘한다. 와인을 한 병씩 클리어할 때마다 Vivino 앱에 평점과 I'm a beginner, but...으로 시작하는 후기를 남기기 시작했는데, 3월 이후 벌써 10병을 돌파했다. 생각보다 많이 마셨구나. 작년에 영화 200편을 본 것과 비슷한 추세다. 물론 올해 200병까진 가지 않을 것이다. 주량과 예산 부족으로.


이쯤에서 어린 왕자와 술 주정뱅이의 대화가 떠오른다.


"왜 술을 마시나요?"

"잊어버리기 위해서다."

"무엇을 잊으려는 건가요?"

"부끄러움을 잊으려는 거다."

"무엇이 부끄러운 건가요?"

"술을 마시는 것이 부끄러운 거다."


어린 왕자가 새 취미로 왜 와인을 선택했냐고 묻는다면,

"난 술이 싫다. 맛없어서 싫다. 초딩처럼 맛없다고 싫어하는 것이 부끄러워,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라벨만 보고 구입한 와인 <The Boxer>



뱅쇼


이 맛도 저 맛도 없는 와인은 두 잔이 맥스다.

그러면 오렌지, 사과, 배, 대추, 꿀 등을 때려 넣고 남은 와인 팔팔 끓여서 쌍화탕 만들어 피니쉬 한다.

와인에 대한 예의로, 목욕물에 섞거나 생선 비린내 잡는 용으로는 사용하지 않는다.





집들이


집들이 시즌 개막~
4월 주말 풀 부킹~

#아랫집이 처갓집 #층간소음 무법지대
#집에서 말뚝박기도 가능




신대방역


지하철 2호선.

촌놈의 서울생활 초창기, 레트로 감성의 MD플레이어에 솔리드와 듀스 노래를 가득 담고, 헤드라인을 가장 잘 뽑은 스포츠 신문을 사서 지하철 2호선에 살포시 오르면, 어설픈 반지하 자취방보다 편안했다. 박찬호 메이저리그 진출 및 첫 승, 박세리 양말 벗고 US오픈 우승한 기사도 2호선에서 봤던 기억이 난다.

같이 자취하던 놈 중엔 심심하면 책 들고 2호선 타고 한 바퀴 돈다던 변태 같은 녀석도 있었다. 술 마시고 정류장 놓치고 한 바퀴 돌았다는 건 술 마시고 오바이트했다는 것만큼 흔해 빠진 일이라, 떡실신해서 두 바퀴 반 정돈 돌아줘야 에피소드로 인정해줬다.

그렇게 오랫동안 타 본 2호선이라 웬만한 역에선 다 내려본 것 같은데, 내 기억 속에 신대방역은 없었다. 그래서 오늘 목적지는 구로디지털단지역이었지만, 시간도 남아 신대방역에 그냥 내렸다. 좀 걸어가지 뭐. 이로써 2호선과 난 오랜 숙제를 끝내고 이제야 완전체가 된 기분이 들었다.

아, 신대방역. 내가 처음 와본 것이 확실했다. 90년대 부산 장림, 구평에 온 분위기.


겨울옷들을 다 넣어서 코트도 안 입고 나왔는데 하늘이 "어서 와, 신대방은 처음이지?'"하며 눈까지 뿌려준다. 아, 춥다. 덴장, 구로까지 그냥 타고 갈걸.

그때 내 시야에 영화 포스터처럼 들어온 장면.
떡을 파는 할머니들과 폐지 줍는 할아버지.

요즘 폐지를 한 수레 가득 담아야 천 원이라는데. 오랜만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혹시라도 훗날 내가 돈을 좀 벌게 되면, 그건 내가 잘나서 번 내 돈이 아니라, 난 그저 pass through일 뿐, 쓰여야 할 곳들이 많다. 오랜만에 그걸 다시 떠올리게 하려고, 오늘 3월의 눈 내리는 날, 신대방역에 그렇게 홀린 듯이 내렸나 보다.

신대방역에 장첸은 없었다.




40대


후배들을 만나면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아진다.

아재가 되었다.

그래도 그 말을 다 하진 않는다.

아직 꼰대까진 가지 않았다.


아재가 되었음은 겸허히 받아들이되, 꼰대는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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