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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우 Apr 17. 2018

월간 김창우 : 와인 1~10

술 또라이가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속도가 빠르다.

그래서 흔적을 남겨놓기로 했다.


와인 생초보가 신의 물방울에서처럼 '글라스를 테이블 위에서 가볍게 돌려 공기와 만나게 하면, 향긋하게 일어나는 백가지 꽃향기가 비강을 간질인다. 순간 호화로운 꽃다발을 건네받은 듯한 느낌. 잘 익은 무화과, 후추 등의 숙성된 향이 감돌면서 하늘의 은혜를 한껏 받은 대지의 강인함이 영원한 잠에서 깨어난 맛'처럼 표현할 순 없다. 나의 주량과 후각으론 시간이 지나더라도 불가능한 영역이다. 그런 능력은 욕심나지도 않는다.


대신,

와인잔 속의 맛과 향보단 와인잔 너머의 사람, 상황, 대화, 분위기를 기억해보려 한다.

2018년 와이프의 생일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마셨던 와인... 아버지가 처음 집에 오셨을 때 마셨던 와인... 정도로만 기억해도, 인생이 0.5% 정도는 더 즐거워질 듯.


일단 10병부터 시작하자.



1. Blaye Cotes de Bordeaux (2012)

- Grapes : Cabernet Sauvignon, Cabernet Franc, Merlot

- Winery : Chateau Les Marechaux, Bordeaux, France

- Drink   : 2018.03.14

- Rating : ●● (2.0)


3월 14일. 삼성동 현대백화점 지하를 지나가는데, 아기자기 블링블링한 분위기가 화이트데이 선물을 사지 않으면 양아치가 되는 분위기였다. 케이크나 초콜릿은 엣지가 없었다. 그래, 와인을 사자. 지하 와인샵에 들어갔다.


"손님, 어떤 와인 찾으세요?"


난 이 질문에 어떤 답을 해야 할지도 모를 정도로 난 와인 문외한이다. "2만 원대 달짝지근한 걸로 하나 주세요" 하고 싶었으나 나 나름 삼성동에서 양복 입고 일하는 사람인데. 너무 없어 보이잖아.


"가볍게 마실 수 있고 목 넘김이 좋은 와인으로 하나 추천해주세요."


가볍게 마실 수 있다는 대목에서 나의 예산 범위를 눈치챘는지, 이 녀석을 추천해줬다. 보르도(BORDEAUX), 아는 단어도 보인다. 그래서 이 녀석을 안고 집으로 향했고, 이렇게 나의 긴 와인 여정이 시작됐다.


맛? 내가 알 리가 있나.

목 넘김은 모르겠고, 코를 찌르는 알코올 향이 기분 나빴다. 나 술 싫어한다니까. 알코올향 말고 과일향을 달라.



2. Six Eight Nine 689 (2016)

- Grapes : Cabernet Sauvignon, Merlot, Zinfandel, Petite Sirah, Petit Verdot

- Winery : Six Eight Nine, Napa Valley, USA

- Drink   : 2018.03.17

- Rating : ●●●● (4.0)


이마트 트레이더스에서 Vivino 앱으로 2만 원대 와인을 모조리 검색했다. 대부분 3점대 초중반이었는데, 이 녀석만 4점대였다. 라벨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라벨만 멋있고 알코올 향이 코를 찌르는 녀석보단 낫겠지. Vivino 믿고 구입.


Wow, 아직 와인 초보지만 이 녀석은 제대로다. 내가 지난번 와인보다 낫지 않냐고 묻자, 와이프는 "The best wine ever"라고 했다. 흠,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포도 품종이 이것저것 많이 섞였는데, Zinfandel, Petite Sirah 등 묵직한 녀석들이 가벼운 알코올 향을 다 무찌른 듯했다. 이마트 트레이더스 갈 때마다 한 병씩 업어와야겠다.



3. Da Vinci Chianti Riserva (2013)

- Grapes : Sangiovese, Merlot

- Winery : Cantine Leonardo da Vinci, Toscana, Italy

- Drink   : 2018.03.24

- Rating : ●● (2.0)


삼성동 골든타워 지하 와인샵이 괜찮다고 해서 산책도 할 겸 걸어갔다. 생각보다 와인샵은 크지 않았다. 어떤 와인을 찾냐고 물었는데, 이번에도 클래스 있는 대답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목 넘김이 좋고(그놈의 목 넘김), 가성비가 좋은 걸로 추천해주세요"


그랬더니 7만 원에서 찌익 긋고 22,000원 적혀 있는 이 녀석을 보여주셨다. 다빈치(Da Vinci). Sangiovese-based DOCG wine from Tuscany였다. 폼나는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가성비라는 단어를 내뱉은 이상, 가장 할인폭인 큰 걸로 사야지.


쉣! 이건 1번 Bordeaux 와인보다 알코올 향이 더 강했다. 그냥 마셔도 맛없고, 잔을 빙글빙글 돌려서 마셔도 맛없고, 입에서 호로록호로록 소리 내며 마셔도 맛이 없었다. 그래서 남은 와인은 사과, 배, 오렌지를 넣고 팔팔 끓여서 뱅쇼로 만들었다. 이제 맛없으면 다 끓여버릴 테다.



4. Perez Cruz, Cabernet Sauvignon Limited Edition (2015)

- Grapes : Cabernet Sauvignon

- Winery : Perez Cruz, Maipo Valley, Chile

- Drink   : 2018.03.25

- Rating : ●●◐ (2.5)


삼성동 또 다른 와인샵에도 들렀다. 여기서도 나는 "가성비"를 들먹였다. 그랬더니 아저씨가 "가성비는 칠레 와인이죠"하면서 이 녀석을 주셨다. 탐 크루즈의 광팬인가, 페레즈 크루즈. "이 와인 어때요?"라고 질문했는데, "괜찮죠"라고 성의 없게 대답하는 걸로 봐서 안 마셔봤거나, 양주 팔다가 구색용으로 와인도 들여놓은 듯.


Da Vinci 보다는 조금 무거우니 이런 게 Medium Body인가. 그래도 여전히 포도향이 알코올 냄새에 묻히는 건 용서할 수 없다. 남은 건 또 팔팔 끓여버렸다. 포도들에겐 난 지옥불의 형벌자쯤 될 듯.



5. Terroir Series Ambrosia Malbec (2012)

- Grapes : Malbec

- Winery : Trapiche, Mendoza, Argentina

- Drink   : 2018.03.16

- Rating : ●●●● (4.0)


장인 어르신 생신날 처제네가 사 왔다. 이 가족도 나와 비슷한 수준이라, 구리 와인샵에 들러 "가성비"를 외쳤을 것 같다. 메시의 고향 아르헨티나 와인을 처음 만났다. 지금까지 마신 와인 중엔 가장 고가인 5만 원 짜리여서 그런지 뭔가 야무하게 생겼다.


역시 가격이 올라가면 퀄리티가 달라지네.  와인 초보들이 모여서 "와우, 와우"를 외치며 마셨다.

그런데 상을 펴놓고 식사를 할 땐 와인잔을 조심하자. 두 명이나 팔꿈치로 와인잔을 쳐서, 거실 카펫이 두 잔이나 마셨다. 카펫 따위에는 Da Vinci나 줬어야 하는데.



6. M Moscato d'Asti (2016)

- Grapes : Moscato

- Winery : Piedmont, Italy

- Drink   : 2018.03.16

- Rating : ●●●◐ (3.5)


이마트 트레이더스에 가면 무조건 한 병씩 사 오는 모스카토 다스티.  

사과를 심었는데 포도가 열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달달한 사과맛. 와인계의 쿨피스.

더운 날 병나발을 불면서 벌컥벌컥 마시고 싶다.



7. God Brut

- Grapes : Macabeo, Xarel-lo, Parellada

- Winery : Penedes, Spain

- Drink   : 2018.03.30

- Rating : ●●◐(2.5)


3월 30일 와이프 생일. 이런 날 돈가스나 오무라이스를 먹을 순 없지.

와이프 회사 옆 웨스틴조선호텔의 루브리카에 갔다. 레스토랑 옆 와인셀러 안에는 로마네 꽁티와 같은 고급 와인들이 빼곡하게 들어있었는데, 그 분위기에서 어설픈 와인을 시키긴 싫었다. 그렇다고 모처럼의 외식인데 와인이 주인공이 되어버려도 안되고.


그래서 LUX 두 잔만 간단히 곁들였다. 생일 정찬인데 와인 맛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이다음에 남편이 돈 많이 벌면, 생일날 Richebourg 사줄게. 디켄터에 담아 마시자.



8. Arboleda Syrah (2015)

- Grapes : Syrah

- Winery : Arboleda, Rapel Valley, Chile

- Drink   : 2018.03.31

- Rating : ●●●● (4.0)


와이프 생일 다음날인 3월 31일은 우리 결혼기념일. 이 날은 11번째 결혼기념일은 잠시 나가 있어. 더 큰 이벤트가 있었다. 부산 아버지가 처음으로 우리 집에 오시는 날. 그동안은 서울에 오셔도 호텔에서 주무셨는데, 분가 후 처음으로 우리 집에 오셨다. 겸사겸사 이모네 식구들과 사촌들 7명까지, 총 12명 집들이 날이었다.


이 날을 위하여 사놓은 칠레 쉬라즈 와인 Arboleda Syrah.


상을 펴놓고 마셨지만, 이 날은 조심스런 팔꿈치들만 모여 바닥에 쏟진 않았다. 요리들이 상다리 부러지게 많이 나와서 혀가 기분이 좋았는지, 처음으로 와인이 맛있다고 느껴졌다. 한 병을 비우고 아버지는 한 병을 더 하시길 원했는데, 난 아버지가 취하실까 봐 한 병 더 따진 않았다. 두 잔 마시고 딱 기분 좋아 보이셔서.


아버지 그냥 한 병 더 따 드릴걸.



9. Chianti Classico (2014)

- Grapes : Sangiovese

- Winery : Verrazzano, Chianti, Italy

- Drink   : 2018.04.02

- Rating : ●●◐(2.5)


삼성동 와인샵은 올킬해야지. 이번엔 와인나라 코엑스점 르클럽드뱅에 갔다. 매장 규모, 시설, 저장 상태, 분위기 등 이곳이 진리였다. 소믈리에만 옆에 없다면 하루 종일 구경하고 싶었다. 이 곳은 앞으로 자주 오는 걸로.


주량이 약한 나와 주량은 강한데 와인은 별로 많이 안 마시는 와이프는 매번 두 잔이 맥스였다. 그래서 남는 건 하루 이틀 묵혀서 다시 마시는데, 역시 처음만 못했다. 그러면 또 끓여버리고. 그래서 소믈리에분께 작은 사이즈 와인 중 초보자도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와인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이 녀석을 골라주셨다.


라벨에 있는 아저씨가 노스트라다무스를 닮았다. 안사면 지구 종말이 올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작은 사이즈 와인을 사봤다.


아, 첫 잔의 느낌이 별로였다. 이거 비슷한 맛이 있었는데. 그래서 찾아보니 Da Vinci에서 이미 실패했던 Sangiovese 품종이었다. 이탈리아 산지오베제는 나랑은 안 맞는 걸로. 우린 맛없으면 작은 사이즈 와인도 남기는구나. 그렇다고 끓일 정도는 안 남으니, 이제 작은 사이즈 와인은 사지 말자.



10. Sandara Sparkling Blanco

- Grapes : Sauvignon Blanc, Viura, Verdejo

- Winery : Sandara, Valencia, Spain

- Drink   : 2018.04.11

- Rating : ●◐ (1.5)


현대백화점 지하를 또 지나가는데, 이번엔 벚꽃 행사를 하고 있었다. 이 날은 오랜만에 미세먼지마저 없는 화창한 날이라, 그냥 지나치면 또 쓰레기가 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다 행사장 끝에서 이렇게 예쁜 와인을 발견했다. 게다가 가격이 7,000원. 이건 몇 개를 살지가 고민될 뿐 무조건 구매각이었다. 일단 집에서 한 병 마셔보고 맛있으면 대량 구매를 해야겠다 생각했다.


첫 느낌은 아주 상쾌했다. 화사한 봄내음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기분. 그런데 끝 맛이 이상했다. 그래서 라벨을 보니 아차 싶었다. Sandara Chardonnay까지만 보고 샤도네이 화이트 와인이라 생각했는데, 밑에 '& Sake'가 붙어있는 게 아닌가. 오우, 쉣.


소주, 맥주, 양주, 사케가 싫어서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와인에 사케를 블렌딩 하다니.

맛있는 라면에 우유랑 치즈를 넣는 것과 같은 만행이다. 이러지 말자.

와인도 좋아하시고 사케는 더 좋아하시는 장인어른이나 몇 병 사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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