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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우 May 02. 2016

10년 전 유럽 여행 - #융프라우

예전에 어머니께 여쭤봤다. 신혼여행은 어디로 갔어요? 그랬더니 경주, 설악산, 제주도가 아니라 뜻밖에도 서울로 가셨단다. 서울 어디에 갔었냐고 물으니, 남산타워도 올라가고, 명동에서 칼국수도 드셨다고 하셨다. 남산 밑 어느 호텔에서 묶었는데, 아버지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술판을 벌였다는 기억도 떠올리셨다.


지우 지아도 나중에 아빠 엄마의 결혼 전 모습이 궁금할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서 애들이 태어나기 전, 지영이와 단둘이 갔었던 2007년 8월의 유럽여행을 다시 따라가 보고자 한다. 10년이 훌쩍 지난 여행, 비록 기억이 선명하진 않지만, 당시 사진들과 끄적거린 흔적들을 보면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10년 전 사진들의 디테일을 끄집어내다보면, 잃어버린 기억들과 감정들이 살아나길 희망하며...   






여행 이틀째 날은 참 부지런하게 다녔네.


숙소에 짐만 풀어놓고 융프라우로 향했다. Grinderwald 역까지 차로 가서, 융프라우 올라가는 기차를 탔다. 기차 값이 인당 10만 원에 육박하여 아주 잠깐 망설였지만, 저기까지 가서 그냥 돌아올 수는 없었다.




그리고 해발 2000m 즈음에서 기차를 한 번 갈아타야 했다.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으나, 여기서부터는 하늘에서 시스템 에어컨 자연풍이 내려오듯, 바람이 제법 찼다. 올라가다 보면, 그림 같은 풍경 속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는 소들이 있었다. 저 소들은 이렇게 깨끗한 환경 속에서 좋은 풀을 뜯어먹고 살지만, 그래 봤자 한국에서는 여물 먹고 자란 한우보다 푸대접받으며 싸게 팔릴 운명이란 것을 알까.




정상에 다가섬에 따라, 준비해간 아디다스 커플 후드티를 꺼내 입고 눈을 맞을 준비를 했다.

그리고 융프라우에 차분하게 도착했다.




융프라우는 처음이지만,
내게 특별한 곳이었다.



유럽 여행을 떠나기 두 달 전, 어머니가 우리 곁을 떠나셨다. 꽃다운 60세의 나이로 짧게 찾아온 병마와 힘들게 싸우셨지만, 한 번도 기품을 잃지 않으시고 마지막까지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눈을 감으셨다.


중고등학교 땐 경상도 평균 아들들의 모습처럼 집에서 별 말이 없었고, 대학 때부턴 집을 떠나 살아서 돌이켜보니 어머니와 속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어머니의 마지막 6개월은 회사를 휴직하고 부산에 내려와서 곁에서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어머니는 여행을 좋아하셨다. 많이 다니시진 않았지만, 여행을 가실 땐 항상 설레 하셨고, 예쁜 것을 보고 예쁘다고 표현하실 줄 아는 분이었다. 그런 어머니께 여쭤봤다.


"엄마, 어디 여행이 가장 좋아셨어요?"

"응, 난 융프라우가 제일 좋더라. 그때 지훈이 엄마, 현철이 엄마랑 같이 갔었는데, 스위스는 너무너무 이쁘더라. 융프라우 올라갔을 때가 제일 기억에 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두 달 후, 우린 스위스와 융프라우를 찾았다. 어머니를 곁에 두고 느끼고 싶어, 조그만 유리병에 담아둔 어머니 유골과 함께.



어머니와의 대화가 하나 떠올랐다.


내 인생 가장 기뻤던 날 중 하나, 어머니와 잠깐 나눴던 대화.


중학교 때, 난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지만, 1학년과 2학년 때는 우리 반에 불세출의 공부벌레 몇 명이 1~2등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난 주로 반에서 3등을 많이 했었고, 중 3 때는 사실 절대강자가 없어서 충분히 독주를 할 수 있는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들과 포커 치고 노래방 가고 놀러 다니는데 정신 팔려서, 결국 반에서 1등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졸업을 했다.


그런 내가 당초 고등학교 때 예상했던 기대성적은 반에서 3~5등 정도였다. 중3 겨울방학 때나 고등학교 초반에 특별히 열심히 한 기억은 없는데, 그래도 중3 때의 일탈을 반성하며 나름 공부할 시간엔 공부를 했던 기억이다.


그렇게 한 달을 보내고 4월 초에 첫 시험을 쳤다.


며칠 후, 조례시간에 담임 선생님께서 성적표를 가지고 오시더니,


"이노무손들, 공부 똑바로 안 할래. 성적들이다 이게 뭐꼬. 고등학교는 장난 아니데이. 첫 시험이니까 그냥 넘어가는데,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라…알긋나!"

"그래도 열심히 한 사람도 있다. 이번 시험 우리 반 1등은… 손창우…"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직도 기억이 난다. 난 1%로 기대 안 하고 있어서 한 10초간 코마 상태에 빠졌다가, 정신을 차리고 나니 온 몸에 전율이 흘렀다.


생애 첫 1등이었다.


물론 선생님 말대로 우리 반이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아서, 내가 반에서 1등임에도 전교 석차는 14등이었다. 그리고, 이번 시험 우리 반 1등은… 손창우와 홍성진, 이라고 공동 1등을 한 친구의 이름을 호명했지만, 난 너무 놀란 나머지 성진이 이름은 듣지 못했다. 훗날 대학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도 이 정도 기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사실 이 장면까지는 자주 기억이 났다.


하지만, 불현듯 그 뒷 장면이 떠올랐다. 1등 호명이 된 이후 10분간의 기억. 워낙 임팩트가 강한 순간이었기 때문에, 그 이후에 내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오랫동안 까먹고 있었는데, 그동안 잊고 지냈던 그 이후의 10분이 떠올랐다.


아…


선생님이 조례를 끝내고 밖으로 나가시자마자, 친구들 몇 명이 주위로 몰려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난 1등의 표정과 행동 가짐, 감사 및 겸손 멘트를 알지 못했다.


난 그때까지 멍~하게 자리에 앉아있다가, 쏜살같이 복도로 나가서 매점을 행해 뛰어갔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너무 기쁜 표정을 지으면서 매점까지 뛰어갔다..

그리고, 콜라 자판기 옆에 있던 공중전화로 달려가서,

떨리는 손으로 100원짜리 동전을 넣고, 전화를 걸었다. 50원이 아닌 100월짜리 동전이었던 것도 도 확실히 기억이 났다.


익숙한 번호를 거침없이 꾹꾹 눌렀다..


"엄마.."

"와, 이 시간에 왜? 뭔 일 있나?"

"엄마… 내 반에서 1등 했단다.."

"진짜로? 우와, 우리 아들 잘했네. 진짜가? 우와, 잘했네."

"헤......"

"우리 아들 잘 했다.."

"... 어... 지금 수업 시작해요. 그냥, 1등 했다고..."

"그래, 우리 아들 잘 했다.. 저녁에 뭐 맛있는 거 해주꼬.."

"흠... 자장면.."

"그래, 자장면 시켜먹자.. 우리 아들 잘 했다..."

"응, 끊을게요."


예상치 못한 그 이후 10분이 기억난 날,

두 달간 잘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지만, 융프라우 먼 산을 바라보며 가까스로 참았다.


"우리 아들,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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