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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우 Dec 08. 2019

월간 김창우 : 2019년 12월

다시, 김창우


집 나갔던 김창우 씨가 돌아왔다.


매달 기계적으로 글을 올리다 보니 내가 챗봇인지 챗봇이 나인지, 파이썬 코드가 된 기분이었다. 울고 싶은데 뺨을 때려준 것이 책의 출간이었다. 두 번째 책, '바닥을 칠 때 건네는 농담'이 9월 30일에 나왔다. 8월 한 달은 탈고를 위해 원고 수정 작업을 반복해서 하다 보니, 텍스트 자체에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글을 읽기도 싫었고, 쓰기는 더 싫은, 고2 겨울방학 때의 나로 돌아간 것이다. 그렇게 8월 한 달을 건너뛰었다. 몇 년 간 달려오던 김창우 씨의 시시껄렁 글쓰기가 드디어 멈춰 선 것이다.


짝짝짝, 잘했다. 내가 80년대 월간 만화잡지 보물섬에 기고하던 구영탄의 고행석, 아기공룡 둘리의 김수정 작가도 아니고, 누군가와의 계약에서 기한의 이익을 상실하는 것도 아닌데, 그동안 미쳤지. 잘 쨌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리고 한 번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쉽다. 9월, 10월, 11월, 갈수록 가벼운 마음으로 건너뛰었다.


그런데 왜 글을 올리지 않냐고 물어주신 분들이 있었다. 내 글을 기다려주신 분들이 있다니, 진짜 작가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는 가끔 소식을 올리지만, 브런치만 팔로우하고 계신 분들은 무슨 일이 생긴 거냐며 걱정까지 해주셨다. 그래, 아팠던 사람은 갑자기 잠수를 타면 안 되는 거다. 안부를 물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미 버린 몸, 매달 일지는 모르겠지만 자주 올리겠습니다.




아이패드


아이패드 비밀번호를 지우가 바꾸었다. 난 재미있는 퀴즈를 푸는 기분으로 비밀번호를 찍어 보기 시작했다. 지우의 머릿속에서 나올 수 있는 숫자 네 자리 정도는 언제든 맞출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그게 아빠지. 몇 번을 틀렸다. 아이패드는 틀릴 때마다 잠기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래도 난 무조건 맞출 수 있다. 우리 딸과 얼마나 가까운데. 겨우 4자리 비밀번호쯤이야. 그러다 갑자기 화면에 비활성화되었다는 메시지가 떴다.


그때부터 이 녀석과 기나긴 사투가 시작되었다. 초록 창의 전문가들이 알려주는 방법을 다 했는데도 모조리 실패했다. 아이클라우드 계정이 잠겨 버렸고, 그 비밀번호는 진짜 기억 안 나고, 새로 계정을 만들려는데 내 생년월일도 안 맞는다고. 나 그날 태어난 거 맞다고 화면에 대고 소리도 질러보고, 별 짓을 다해봤다. 안됐다. 나 스트레스 안 받고 생활하고 있는데, 요 조그만 녀석 때문에 스트레스받을라.


다음 날 애플스토어에 갔다. 고향이 용산이나 테크노마트일 것 같은 청년이 '끙끙'이란 소리가 들릴 듯한 살아있는 표정으로 아이패드를 만져보더니, 이건 서비스 센터로 가야 한단다. 노력은 했으니 봐준다. 일련번호를 보더니 "외국에서 산 거죠?" 물어서 고개 끄덕였더니, 그럼 못 풀 수도 있다는 쓸데없는 말까지 곁들인다. 장난치나. 글로벌 시대를 선도하고 있는 투 머치 글로벌 회사 제품을 앞에 두고 그게 할 소리냐. 그래도 웃어 줬다. 난 바닥을 칠 때 농담을 한다는 사람이니까.


다시 지하철을 타고 산 넘고 물 건너, '미기니 마갓떼 히다리니 마갓떼 맛스구 잇떼' 애플 서비스센터에 갔다. 겨우겨우 외우고 있는 일본어 표현 여기서 한 번 써봤다. 센터에서 한 시간을 기다렸다. 방사선 치료도 이렇게까진 기다린 적이 없었는데,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내가 시간이 철철 넘치는 사람이라 가뿐하게 기다렸다. 드디어 내 이름이 불리고, 전생에 맥가이버였을 것 같은 아저씨가 이래저래 만져보더니 전화번호를 하나 적어준다. 거기서 안된단다. 집에 가서 피씨 앞에 앉아서 그 번호로 전화해보란다. 하, 이런 대목에서도 크게 빡치지 않는 걸 보니 스스로가 대견스러웠다. 그 맥가이버분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집으로 다시 갔다. 남양주 있다가 삼성동 애플스토어, 선릉과 역삼 사이 서비스센터를 찍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에스프레소 더블 샷을 마시거나,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뉴 키즈 온 더 블럭 2집을 듣거나, 생산적인 일 하나라도 할 걸. 집 나올 땐 넉넉한 AM이었는데, 돌아오니 곧 저녁이 되는 PM이다. 피씨 앞에서 전화번호의 아저씨가 시킨 대로 이래저래 작업을 하다가, 어둑어둑해진 시간에 결국 재부팅에 성공했다. 공장초기화되었지만.


역시 나의 친정, 삼성전자의 서비스가 최고구나.




특강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가 지금 인스타 라이브 방송 중이란다. 미친 주머니 속 요정이 또 화면을 건드렸나 보다.


내가 인싸력이 폭발하여 틱톡에서 힙한 음악에 랜덤 플레이 댄스를 출 것 같지만, 난 인스타 라이브를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 아날로그적 삶을 살기에 토스는커녕 카카오 페이도 아직 쓰지 않는데, 이걸 안 후배 녀석이 '충격과 공포'라고 했다. 복싱 체육관에서조차 촌스럽던 이재인 따위한테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다니. 그런 내가 인스타 라이브 방송이라니.


방송은 1100번 광역 버스를 삼성역에서 내려 근처 스타벅스에 들어가는 순간까지였을 듯.

나 스벅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그 말을 하고 싶었다. 커피는 배경일뿐. 보통 4분의 3을 남긴다.


이날 스벅에서 8 학군 출신처럼 귀티 나게 커피 홀짝이며 했던 작업은 특강 준비. 무려 이화여대 특강이었다.

그 말을 하고 싶었다. 나 이대 다니는 사람이다.


난 '벤처캐피탈 및 사모펀드'라는 주제로 강의를 다닌다. 내가 특정 분야 전문가는 아니지만,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니 GP도 해보고 LP도 해보고, VC도 해보고 PE도 해보고, Blind도 운영해보고, Project fund도 만들어보고, 벤처 대표도 해보고 투자도 받아보고, 국내외 소송에서 피의자도 해보고 참고인도 해보고 고소인도 해보고, Front 업무도 해보고 middle과 back 업무도 해보고, 지난 10년간 업계 생태계 구석구석을 다 경험해봤더라.


그 경험들로 한 학기 끌고 갈 콘텐츠는 쌓였지만, 내 얼굴의 주름살도 늘었더라.


이화여대 특강은 재미있게 끝냈다. 그런데 특강 후 학생들로부터 아주 특별한 요청을 받았다. 무려 앵콜 요청이었다. 한 번 더 와달라고. 왜 안 가겠는가. 종강 후 다시 하루 가기로 했다. 그날은 일찍 움직여서 그 유명한 이대 앞 스벅에서 뉴키즈의 'You Got It (The Right Stuff)'를 들으며 아래 표정으로 에스프레소 더블 샷 한 잔 해야겠다. 쿠폰으로 케이크까지 가능한 이 넉넉함이란.


커피가 지나간 자리 or 서칭 포 슈가



아폴로


거창하게 우주선 이야기가 아니다. 아폴로 과자, 일명 빨대 사탕. 조그만 빨대에 여러 가지 색소 덩어리들이 담겨 있어서 아래 윗 앞니들로 야무지게 깨물고 쭈욱 당겨서 먹던 불량식품계의 루이뷔통. 한 봉지에 20개 정도 들어 있었다. 80년대 난 혈관의 찌꺼기들을 모두 제거하는 오메가 3와 같은 마음으로, 빨대 하나하나를 깨끗하게 클리어해 나갔다. 가끔 빨대 밖으로 내용물이 살짝 삐져나와 있는 녀석을 발견하면 로또를 맞은 기분이었다. 빨대에 알맹이들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으면 원샷을 하지 않은 소주잔을 보는 것처럼 가슴이 저미어 온 것은 내가 특별히 땅그지여서가 아니라 정상적이고 평균적인 초등학생이면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아폴로를 손바닥에 넣고 비비면 알맹이가 더 잘 나온다는 생활의 지혜도 얻게 되었고, 냉장고에 넣었다가 꺼내 먹으면 완전 클리어하게 내용물이 빠진다는 것을 알게 된 날엔 구구단을 다 외운 날보다 더 기뻤다.


그러다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친구 녀석이 아폴로 10개를 쥐더니 한 입에 넣고 한 방에 쭈욱 당겨 먹는 것이 아닌가. 미친 스웩이었다. 그 친구 집에 농구대가 설치되어 있던 것을 봤을 때도 이렇게 놀라진 않았다. 더 충격적인 건 그다음이었다. 이빨 사이 사각지대에 위치해있던 몇몇 아폴로 용사들은 여전히 70프로 이상의 알맹이들이 남아 있는 상태였는데, 친구는 그대로 휴지통에 10개를 쫘악 던지고 시선은 반대쪽을 가져가며 스타일을 완성했다. 내 눈은 남겨진 아폴로 알맹이들이 버려진 곳과 그 친구를 번갈이 보았다. 와... 세상은 넓고 부자는 많구나. 요구르트를 한 번에 3개를 먹던 친구는 명함도 못 내밀 저세상 스웩이었다.


며칠 전 지아가 친구가 줬다며 아폴로 한 봉지를 가져왔다. 맛없다고 나 먹으라며 쿨하게 던져줬다. 난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아폴로 10개를 한 손에 쥐었다. 어릴 적 그 친구가 떠올랐다. 입 주위 근육은 스케일링을 받을 때만큼 경직되었다. 향긋한 색소 냄새가 코를 찔렀다. 눈이 지그시 감겼다.


하지만 옅은 미소와 함께 10명의 아폴로 전사들을 내려놓았다. 후, 난 아직 10개를 한 번에 먹을 정도는 아니구나.


조금 더 건강해지고, 혹시라도 내게 평균 이상의 부가 허락된다면, 그때 당당하게 10개를 원샷하리라.


미슐렝이 무슨 짓을 해도, 아폴로가 이긴다.


북 토크


북토크란 것을 했다. 내 인생에 북토크라니. 내가 부끄러움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북토크는 살짝 그랬다. 김영하, 정유정, 정현주 작가님들처럼 훌륭한 분들이 하는 것 아닌가. 나 같은 아마추어 무명작가도 이런 걸 해도 되는 것인가. 특히 내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보니, 온전히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자리다. 그래서 지인들이 온다고 하면 온화한 미소로 "꺼져"라고 답해줬다. 날 잘 아는 지인들에게 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괜히 부끄러웠다.  


첫 북토크는 연남동 서점 리스본 포르투에서 열렸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그래도, 사랑'의 정현주 작가님의 서점이다. 15명 남짓 모였는데, 절반이 지인들이었다. 부끄러울 줄 알았는데, 괜히 반가웠다. 인사만 하고 돌아간 후배 커플도 잡고 싶을 정도였다. 북토크란 것이 부끄러운 자리가 아니고, 잊지 않고 찾아와 준 사람들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자리구나. 바쁜 시간 쪼개서 찾아와준 사람들, 얼마나 고마운가.


덕분에 좋은 추억 하나 더 쌓았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에 또 한 번의 북토크가 열린다.

이제 지인들이 온다고 하면 "꺼져" 대신 "고맙다"가 나올 것 같다.




건강


'건강하세요'란 말보다,

'건강해주세요'라는 말이 크게 와 닿았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 오래오래 '건강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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