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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우 Dec 31. 2019

월간 김창우 : 2019년 12월 31일

마감


월간 김창우로 몹쓸 마감병이 생겨, 지난 6개월간 나와의 약속 따위는 가볍게 뭉게버리는 훈련을 했는데, 여기저기서 보내오는 새해 복들에 마음이 약해져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래, 연마감은 지키자. 지겨우시겠지만,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 새해 복 하나 더 받으세요.


버스


1100번 광역버스를 타고 삼성동에 자주 나간다. 버스앱을 통해 도착 시간에 맞춰 나가면, 특대형 타다를 타고 다니는 기분마저 든다. 히터가 살짝 오버스럽게 틀어져 있는 버스 안은, 잠바를 벗는 순간 해먹처럼 편안해진다. 엄마품처럼 포근해진 버스에서 의자와 창문 사이에 머리를 박고 스르르 잠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한 번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온전한 삶을 살고 있다면 이런 대목에서 졸려야 한다. 


팔을 접어 쿠션처럼 베고 잠깐 졸았다가 깨니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익숙한 풍경, 바로 삼성역이었다. 버스가 용무를 마치고 문을 닫으려던  찰나, 난 뒷바퀴 바로 위의 좌석에 앉아 있다가 전속력으로 튀어 나갔다. 급할 게 없어 다음 역에 내려서 걸어가도 되는데,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불연 듯 알을 깨고 나오는 본능이다. 세이프. 


이 맛에 졸지.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언젠가부터 혼밥이 더 편해진 걸 보면 압도적인 선진국 시민이다. 양털처럼 가벼운 allbirds 신발을 신고 계단을 활기차게 내려가는데 뭔가 허전하다. 뭐지. 이 찝찝한 기분은.


앗, 가방. 


급히 나오느라 버스에 가방을 놓고 내렸다. 여유있는 버스에서도 꼭 내 옆에 앉으려는 덩치들이 있어서 4분의 3 좌석이 차기 전까진 옆 자리에 짝꿍처럼 가방을 둔다. 가방은 나 대신 뒷자리를 가르쳐 준다. 젠장, 자다 깨서 세이프를 위해 전력질주하느라 가방을 놓고 내린 것이다. 


집중을 해봤다. 가방 속에 뭐가 들었지? 노트? 오케이. 아카시아 껌? 겨우 한 포 씹은 거라 좀 아까워도 오케이. 가방? 면세점에서 샀던 tumi 가방이었지만 제법 오래 썼으니 오케이. 노트북? 오, 노우. 앱솔루틀리 낫 오케이. 노트북에는 나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아니, 어쩌면 그 녀석이 나다. 무조건 가방을 찾아야 한다. 


잠시 이 버스의 동선을 생각해봤다. 신사동에서 회차를 한 후 다시 돌아오는 녀석이다. 머릿속으로 고등학교 때 배운 '시간은 속력분의 거리' 공식에 임의로 몇 개의 숫자를 대입해봤다. 40분 후에 돌아오겠군. 씨익 웃음은 이럴 때 나와야 폼이 난다.  


난 여유롭게 코엑스로 내려가서 혼밥을 즐겼다. 초초하면 지는 거다. 시계 따위는 쳐다보지 않았다. 밥을 다 먹고 산책을 하며 오늘 걸음수를 3,500에서 5,500으로 올려놓은 후 반대편 정류장으로 갔다. 버스앱을 켜보니 3분 후 도착. 캬, 이그잭틀리.


버스를 타고 다시 뒷바퀴 위 자리로 갔다. tumi는 새 주인을 만나지 못한 채 계속 버려져 있었다. 지겨운 녀석. 덕분에 잘 놀았다. 이날 내가 가장 잘한 일은, 당황하지 않은 것이었다. 


가방 부메랑 놀이처럼, 생산적이지 않아도 하루를 꽉 채워주는 것들이 있다. 내년은 365개의 시시껄렁하고 사소한 기억들로만 채워지길. 굵직굵직한 사건들로부터의 안식년을 기대한다.


반려


79년생 김지영 씨의 지인이 여행을 떠나게 되어, 그 집 강아지를 일주일간 맡았다.

그 강아지의 입장에선, 우리 집이 괌 한 달 살기 정도였겠지.

하루 세 번을 산책시켰다. 훈련이 잘 되어 있어서 똥오줌은 산책 나가서만 해결했다.


다시 돌려보내고,

그 집도 가족회의를 하고, 우리 집도 고민에 고민을 했다.


그리고, 1월 중순에 입양하기로 했다.

날 산책시키기 위해 그 녀석이 다시 온다. 

이름이 '푸른이'인데, 난 '타이슨'이라 부를 테다.


우리 집에 도착하면 2020년 첫 번째 일정으로 이발부터 하자.



얼굴이 빨개지는 아이


난 유난히 얼굴이 빨개지는 아이였다. 수업시간에 이름이 불려서 모든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는 시추에이션이 생기면 얼굴에 피가 쏠렸다. 아, 또 얼굴이 빨개졌구나. 아, 얼굴 빨개지기 싫은데, 피들아 제발 좀 내려가라. 그 사실이 너무 부끄러워 얼굴은 더 빨개졌다. 당시 영어 이름을 짓는다면 burgundy Son이 적당했으리라.


그래서 수업시간에 발표도 안 했다. 사부작사부작 잘 놀긴 했는데, 공개적으로 주목받을 일은 거의 하지 않았다. 성격은 외향적이었지만, 단지 피 쏠리는 것이 싫었을 뿐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받기 싫어 일부러 100점을 안 받았다고 하면 믿을까. 흠, 이건 아닌걸로.


하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한 번씩 주목을 받는 상황이 벌어졌다. 바로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우리 고향에서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유명한 스포츠 선수 출신이셨다. 야구, 축구, 농구 등 인기 스포츠도 아닌 복싱 선수 출신이셨지만, 부산 최초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라는 상징성에 특유의 사교적이고 유머러스한 성격 덕분에 주변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체육 선생님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가끔은 음악 선생님, 역사 선생님, 국어 선생님 등도 "이 반에 손창우가 누고?"하면서 아버지와의 일화를 이야기하기 시작하셨다. "내가 인마 느그 서장이랑 인마 어저께도 으! 같이 밥 묵고 으! 싸우나도 같이 가고 으! 마 다했으..."와 같은 스토리들이 매일 쏟아졌다. 심지어 "느그 아버지 진돗개 키우셨재? 우리 진돗개랑 젓붙였다 아이가. 우린 사돈이나 마찬가지 인기라"와 같은 에피소드까지 나왔다. 물론 우리 아버지는 그 사돈 선생님의 성함도 모르셨다. 


시간은 나의 실핏줄도 성장시켜, 어느 날부터 얼굴이 더 이상 빨개지지 않았다. 

그때부터 발표란 것을 하기 시작했다. 발표가 쌓이고 쌓여 강의까지 연결되었다.


강의


2019년 3월, 분에 넘치는 강의를 시작했다. 한 학기만으로도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를 이루어 좋았는데, 2학기도 맡겨 주셨다. 너무 고맙잖아요. 1년으로 충분히 만족하며, 학기가 끝난 후 관련 분들께 감사 메일까지 보냈는데, 바로 전화가 오더니 내년에도 강의를 개설해 놓았다고 하셨다. 부족한 제게 너무 잘해주시는 것 아닌가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영어 강의한다고 손들어서, 고마 쉐리 부산 사하구 발음 엉망진창으로 한 번 하고, 각종 짤들 만들어서 유튜브 스타 한 번 되어 볼까. 


올해 강의를 들었던 후배님들, 여러분들 덕분에 제 마음만은 이미 1타 강사입니다.

2020년 수업, 많은 추천 부탁드립니다. 

아직 학교에 남아 있는 분들은 내년에 경영관에서 만나 진하게 허그합시다.


2019년


이발을 끝으로 2019년 공식 일정을 끝냈다. 송구영신 예배가 남았지만, 여기에 사무적인 '일정'이란 단어를 붙이기엔, 지난 1년 제법 홀리하게 살았다. 많은 분들이 나의 올 한 해는 힘들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나에겐 충분히 복된 시간이었다. 씨익 미소가 걸릴 정도로.


올 한 해를 떠올릴 때 생각나는 단어들. 강의, 유튜브, 60kg, 출간, 2쇄, 북토크, 방송 등

올해 최고의 영화는 '기생충' 

올해 최고의 책은 '우주로 간 김땅콩(윤지회)'

올해 최고의 멘트는, 친구의 '너희 아빠 뭐하셔'에 대한 지아의 대답  '우리 아빠 세브란스 다녀'



많은 분들의 응원과 기도 덕분에, 이것저것 많이 해보며 즐거운 한 해였습니다.

모두 건강해주세요. 건강하기만 하면, 행복하셔도 됩니다.

비트 주세요! 2020년에도 김창우씨는 조금 더 즐거워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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