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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우 Jan 31. 2020

월간 김창우 : 2020년 1월


진돗개


어릴 때, 아버지가 진돗개 새끼를 데리고 오셨다. 내 나이 6~7살 정도였던 것 같다. 아파트에 살던 우리 집에선 키울 수 없어서 마당이 있던 큰아버지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 녀석을 보려고 버스 타고 30분 거리의 큰아버지 집까지 틈만 나면 갔다. 일주일마다 다른 개체인 것처럼 복리 이자의 속도로 크더니, 몇 달이 지난 후엔 더 이상 귀여운 강아지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 녀석이 내 똥보다 더 큰 똥을 싸는 것을 본 즈음부터 동심에서 비집고 나온 견아일체의 마음도 사라져 버렸다.


하루는 사촌 형이 그 개의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개똥이, 바둑이 레벨이 아니라 무려 영어 이름이었다. 1980년대 영주동 산복도로 마을에서는 외국인이 영어 이름을 쓴다 해도 이상하게 쳐다볼 것 같은 분위기였다. 막 영어 단어를 하나씩 알아가던 초등학교 고학년이던 사촌 형은 어디서 들었는지 짧고 강렬하면서도 이보다 더 고급스러울 수 없는 영어 이름을 만들어 왔다. 미스 트롯 1위를 발표하는 순간과 같은 긴장감 속에서 개 이름을 짜잔~ 선포하는 순간, 사촌 형에게는 초등학생에게 느낄 수 없는 저 세상 스웩이 느껴졌고 위인전에서 본 인물들 외 현존 인물로는 처음으로 존경의 마음까지 갖게 되었다.


영어 이름은 역시 멋있었다. 뜻이나 출처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냥 이름 자체가 쿨했다. 내가 훗날 영어 이름을 갖는다면 그 이름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진돗개와 나는 함께 무럭무럭 자랐다. 몇 년 후, 내가 영어 단어를 알아가는 나이가 되었고, 무수한 영어 단어들 속에서 우연히 진돗개 이름으로 쓰인 그 단어를 만나게 되었다. 충격과 전율이었다. 사촌 형에 대한 존경심이 사라지던 순간이었다.


그 개의 이름은, "도그"였다.


영화 국제시장의 엔딩컷. 어릴 적 도그가 뛰어놀던 큰아버지댁에서 찍은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비슷했던 뷰와 집안 내부



푸들


어린 시절, 없는 것이 없던 성준이 집에는 개에 관한 책이 한 권 있었다. 책의 3분의 1까지는 한 페이지에 6장의 사진과 견종이 나와 있었고, 나머지 3분의 2는 견종별 설명이 나와 있었다. 처음 소개되어 있던 견종이 '올드 잉글리쉬 쉽독'이었고, 내가 가장 멋있다고 생각한 개는 '복서'였다. 그때부터 boxer를 내 아이디로 쓸 운명이었나 보다.


당시 어머어마하던 성준이 집 앞마당엔 진돗개가, 뒷마당엔 도베르만이, 그리고 그 두 마리가 묶여 있던 반경을 제외한 온 집안을 코커스파니엘 한 마리가 뛰어다니고 있던 개 천국이었다.


자동차에 관한 책도 있었지만, 난 개 책에 푹 빠져서 몇십 번을 읽었다. 당연히 세상의 모든 견종을 다 외웠고, 내가 모르는 개는 '잡종견' 카테고리에 넣으면 끝이었다. 세상의 모든 개들이 모두 사랑스러웠지만, 유독 정이 안 가는 견종도 있었다. 꼬불꼬불 덥수룩한 털 사이사이를 굳이 미용이라며 분홍빛 맨살이 드러나도록 깎아놓은 푸들이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패션이었다. 만화에서도 푸들은 개구지거나 어리숙한 캐릭터가 아니라, 언제나 양산을 든 아줌마 옆에서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우아하게 걸어가는 모습으로만 나와서 괜히 싫었다. 그 책을 들고 화장실에 갔다가 휴지가 없는 사태가 벌어졌다면, 난 아마 푸들 페이지를 뜯어서 뒤처리를 했을 것이다.


와이프 회사 동료가 외국으로 가게 되어서, 그분이 키우던 개의 새 보금자리가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안 그래도 아이들이 개나 고양이를 키우자고 노래를 부르던 터라, 우리가 살포시 손을 들었다. 우선 일주일을 데리고 왔다. 난 데리러 가기 전날까지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적당한 아이를 키우고 계셨겠지. 일주일만 키울 텐데 야생 여우인들.


근데 무슨 종류래?

푸들.


아, 내 마음속 랭킹에 푸들 위로 100여 개의 견종이 있었는데 하필 최하위 푸들이라니.

그리고 첫인상이 깜놀이었다. 난 조그만 토이 푸들을 생각했는데, 거의 코커스파니엘급 푸들이었다. 난 아장아장 걷는 아기를 원했는데, 이미 한 살 반짜리 성견이었다.


그래, 일주일만 맡자.


일주일 후 다시 돌려보냈다.

회사들이 왜 trial version을 무료로 배포하는지 알 것 같다. 일주일이면 게임 끝이다.

그리고 한 달 후, 입양을 결정하고 다시 데리고 왔다.

함께 열흘을 살았는데, 우리 가족의 일상에 제법 빠른 속도로 침투해 들어왔다.


사람으로 치면, 행복한 집안에서 사랑 듬뿍 받으며 가정교육 잘 받고,

사춘기도 잘 보낸, 공부 잘하는 모범생 고 2 느낌이었다.

똥오줌도 산책 나갔을 때만 해서, 집안에 냄새날 일이 없었다.

물론 털도 빠지지 않아 검은 옷도 마음껏 입을 수 있다.

키워보니 푸들은 꽤 괜찮은 견종이었다. 똑똑하고, 착하고, 사랑스럽고, 의젓하고.


전 주인 분들의 부탁으로, 이름은 '타이슨'으로 바꾸지 않고 계속 '푸른이'로.


코커스파니엘, 도베르만, 진돗개랑 함께 뛰어놀던 성준이 집에서.
타이슨도, 도그도 아닌 푸른이



복서


계속 미루던 운동을 시작했다.

푸른이를 수시로 데리고 나가서 함께 조깅하고, 동네 할아버지들과 사이좋게 산책로 운동기구를 쉐어한다.

그리고 드디어 복싱을 시작했다.


겨울 잠바를 기구에 걸어서 샌드백을 만들었는데 타격감이 제법 괜찮다.

잠바는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잠바 위에 붙은 모기 한 마리만 죽이고 온다는 기분으로 원 원투 원투 훅 어퍼 훅.

록키 4에서 스탤론이 돌프 룬드그랜과 붙기 위해 이렇게 자연 속에서 운동했었지.


비록 체육관과 링 위는 아니지만, 복싱을 다시 시작하니 살아 있음을 느낀다. 난 이렇게 살아야 한다.

푸른이에게 '타이슨' 이름을 붙이진 못했지만, 내가 타이손(Ty Son)이 되기로.


남양주에 가면, 옷 걸어놓고 막 때리는 미친놈이 있다.



태국


장인어른, 장모님 모시고, 우리 가족, 처제네, 처남 등 총출동하여 태국 방콕에 다녀왔다.


1966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아버지가 금메달을 따신 이후로, 54년이 흘러 아들이 지우, 지아라는 두 개의 금메달을 걸고 다시 그곳을 찾았다. 처제가 짠 스케줄에 따라온 가족이 패키지여행을 하듯 꽉꽉 채워서 다닌 여행이었다. 태국을 천하통일해놓은 그랩 덕분에 11명의 이동도 전혀 문제없었다. 좋은 세상이다.


야시장들을 다니며, 그곳에서 어릴 때 우리 집에 장식되어 있던 것들을 다수 발견했다. 코끼리 목각, 박제되어 있는 나비, 기타 장신구 등등. 아버지가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릴 때 그곳에서 못하는 영어와 바디 랭귀지로 가격을 흥정하며 그 물품들을 사는 모습이 그려졌다. 시장에서 뭉클해지다니.


태국은 내게 젊은 아버지를 다시 보여주었다. 그것으로도 충분한 여행이었다.




TV


작년의 대학 강의, 유튜브, 출간, 북토크도 신선한 경험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TV에도 나오게 되었다.

cts 기독교 방송의 '내가 매일 기쁘게'라는 프로그램.


두레학교 학부모인 김지선 씨가 진행하는 코너인데, 두레학교 및 기독교 교육에 대한 소개를 위해 교장 선생님과 함께 출연하였다. 내가 기독교 방송이라니. 허허. 그리고 올해부터 교회 초등부 교사로도 섬긴다. 내가 교회 봉사라니. 그것도 봉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가장 피하고 싶었던 초등학생들 선생님이라니. 허허. 인생은 푸들이구나. 가장 꺼리는 것들부터 만나게 된다. 내가 할 일은 그저 감사와 기도 뿐.


당연히 본방, 재방 모두 보지 않았다. 내 안에서 내 얼굴, 내 목소리를 거부한다.

그래도 새로운 경험들이 여전히 재미있는 것을 보면, 아직 늙지는 않았구나.


더 건강하고 젊어질 2020년, 그리고 1월.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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