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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우 Jan 30. 2019

월간 김창우 : 2019년 1월

SonKY 캐슬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때니,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사이에서 한 템포 쉬어가던 1987년의 일이다. 등수가 나오지 않아서 정확히 위치를 알 수는 없었으나, 이 즈음부터 시험을 치면 나보다 점수가 낮은 아이들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내가 피라미드 꼭대기의 성적은 절대 아니었다. 주변에 특별히 좋은 중학교도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뺑뺑이 추첨만이 나의 다음 학교를 정해주던 시기라 성적이 좋았어도 큰 메리트가 없던 시절이었다.


2학기 중간고사를 치던 날이었다. 키가 작아서 앞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아있던 난, 열심히 날리는 분필 가루를 호흡을 통해 내 폐에 담갔다가 깨끗이 정화시켜 내뱉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쉬는 시간엔 키 큰 아이들에게 교실 뒤편을 양보한 채, 교실 앞 쪽 일대를 지배했다. 그날도 키 작은 아이들 중 가장 컸던 내가 중심에 서서 열심히 놀고 있었다. 그러다 삐걱거리는 교탁 위에서 웬 종이 뭉치를 발견했다. 시험감독을 하셨던 선생님이 놓고 가신 모양이었다. 5학년이면 호기심과 장난기가 하늘을 찌를 때라, 그 종이 뭉텅이를 살펴본 후 한 장을 꺼냈다. 글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글자들 앞에는 번호가 붙어 있었고, 그 밑에는 보기가 1, 2, 3, 4번까지 적혀 있었다.  


헉! 그것은 다음 시간에 시험을 칠 체육 시험지였다. 


난 시험지란 것을 깨닫기 전에 이미 세 문제 정도를 본 상태였다. 나이가 나이다 보니, 참 창의적으로 나쁜 짓들도 많이 했지만, 시험지를 미리 보는 것은 해서는 안될 짓이란 정도는 알고 있었다. 페어플레이가 생명인 엘리트 체육인의 자식으로서 공정한 경쟁에 대한 중요성은 누구보다 많이 들어왔다. 그래서 시험지를 다시 넣고 시험지 뭉텅이를 교탁 밑으로 잽싸게 치웠다. 내가 본 것이 다행이었다.


물론 세 문제는 봤지만, 난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내가 예체능 과목에는 원래 강했다. 스포츠 서울로 한글과 독해력을 키운 사람답게, 특히 체육은 틀리는 것이 더 힘든 과목이었다. 게다가 난이도가 평이한 1, 2, 3번 문제였고, '배구 경기는 몇 명이서 하냐?' 수준의 문제들이었다. 틀릴 수가 없다.


그런데, 잠시 후 선생님께서 헐레벌떡 교실로 뛰어 들어오셨다. 얼굴이 벌게져서 여기 있던 시험지들 어디 갔냐고 큰 소리로 물으셨다. 내가 손을 들고 교탁 밑에 넣어뒀다고 했다. 그러자 선생님이 날 쳐다보시더니 문제를 봤냐고 물으셨다. 그래서 "네"라고 말씀드렸다. 본 건 본 거니까. 5학년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다른 표현이래 봤자 "세 문제만 봤어요" "원래 알던 문제예요" 정도뿐이라, 애드리브로 머리 굴리지 않고 짤막하게 "네"라고만 대답했다. 


선생님은 긴 한 숨을 내쉬더니 날 앞으로 나오라고 하셨다. 목소리가 심상치 않으셨다. 


쫘악~! 


찰진 귀싸대기가 날아왔다. 맞을 걸 예상했다면 고개를 살짝 돌리는 페이크를 통해 충격을 완화시켰겠지만, 난 선생님이 날리신 체중 실린 손바닥 공격 에너지를 1도 흘려버리지 않고 고스란히 온몸으로 흡수했다. 근데 당시엔 귀싸대기는 아주 흔한 체벌이었다. 나 역시 자주 맞던 터라, 이번 케이스가 특별히 더 억울하다던지 분하진 않았다. 오히려 세 대쯤 안 맞고 한 대만 맞고 끝내서 살짝 기분이 좋기까지 했다. 그래서 자리로 돌아오면서 친구들에게 슬쩍 미소도 보였던 것 같다. 


1987년 부산 조그만 학교에서 벌어진 시험지 유출 사고에는 앞마당에서 총을 쏘는 사람도, 뛰어내린 사람도, 부모들끼리의 육탄전도, 경찰에 억울하게 잡혀 간 사람도 없었고, 그저 귀싸대기 한 대로 상황이 종료되었다. 당시엔 내가 맞을 짓 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떠올려보니 선생님이 본인의 실수가 무안해서 날 때리신 거네. 내가 억울하게 누명을 쓴 Would You역할을 한 거였군.


경쟁자가 아닌 친구들과 학교를 즐겁게 다니며, 단지 귀싸대기만 흔했던 그 시절의 손카이 캐슬, 

그립다. 



영화


2017~2018년, 영화 300편 보기 프로젝트.

12월 31일 마지막 날, 300번째 영화를 보면서 결국은 성공했다.


내용을 정리하고 싶은데, 300편 정리는 엄두가 나질 않아서 계속 미루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난 직후의 감정과 몇 달이 흐른 후의 느낌이 완전 다른 영화들도 제법 있어서,

평점과 리뷰를 다시 써보려 한다. 

영화 100편 리뷰 글은 간혹 있지만 300편 리뷰글은 구글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언젠간 정리하리라.


맛보기로 300편 중, 10점 만점을 주는 영화는

허공에의 질주, 맨체스터 바이 더 씨,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 이렇게 단 세 편.



피아노


난 가나다, ABC, 123 보다는 DO-RE-MI가 더 좋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가 피아노 학원을 보내주셨는데, 우리 집 밑에 피아노 학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1학년 꼬꼬마라도 어머니의 라이드 없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하농으로 손을 풀고, 체르니, 소나티네, 어린이 명곡집 순서로 하루 한 시간씩 쳤다. 하농으로 더 이상 손을 풀지 않아도 되고, 체르니는 30번을 끝내고 40번을 치고, 소나티네가 모차르트로 바뀌었지만, 어머니는 딱히 그만두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나도 딱히 그만두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순종하는 아들이었다. 그래서 남자아이로는 드물게 중 2 때까지 피아노를 쳤다. 그때 우리 집 밑에 주산학원이 있었다면 난 지금쯤 피타고라스가 되어 있겠지. 


고등학교 땐 학예회에서 피아노를 치면 인기를 끌 것 같다는 딱 고삐리다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머니를 졸라 키보드를 샀다. 집에 피아노도 있는데 굳이 키보드가 왜 필요하냔 질문에, 나 1년 후 서울로 대학 가면 피아노는 가지고 갈 수 없으니 키보드가 필요하다고 대답했던 것 같다. 어머니를 가장 잘 움직일 수 있는 영역을 건드린 거지. 서울로 대학을 갈 거라는 아들 - 키보드 사주면 더 열심히 공부를 하겠다는 모종의 약속이었던 셈이다.


난 그 키보드로 학예회에서 교실 하나를 가라오케로 만들었고, 그 방의 이름은 ‘물랑루즈’라 지었다. 고등학생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로맨틱한 발음의 단어였다. 막판까지 '팜므파탈'과 경합을 했던 것 같다.


100곡을 선곡해서 벽에 붙여 놓고 신청곡이 들어오면 내가 키보드로 연주해줬다. 그땐 툭 건드리면 100곡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나중에 나도 노래 한 곡 해보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지금은 skt 다니고 있는 박재성의 외침으로 기억하고 있다. 마침 주변의 성일여고, 삼성여고 여학생들이 물랑루즈 안으로 막 들어오고 있었다. 


그래, 제가 손창웁니다. 한 곡조 뽑겠습니다. 겁 없던 시절이라 무조건 오케이였다. 

난 김건모의 ‘첫인상’을 불렀다. '긴 머리~ 긴 치마를 입은~' 


당시 나의 18번은 이승환의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이었는데, 왜 연습도 안 해보고 가창 난이도도 더 높은 김건모의 곡을 골랐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눈을 지그시 감고 얼굴이 시뻘게지고 얼굴 실핏줄 전부를 터뜨려버릴 듯 열심히 노래를 부른 후, 눈을 떠서 주변을 둘러봤다. 


아... 몹시 놀란 표정들이었다. 많은 눈빛들이 내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시켜서 미안하다' '키보드 치면 노래 잘하는 줄 알았지' '시킨다고 하냐?' '내 귀 어쩔' '이제 건반만 치자' '아냐, 넌 건반도 치면 안 되겠다’ '이제 아무것도 하지 말자, 숨도 쉬지 말자' 등등


노래를 시킨 박재성을 봤더니, 혼자 낄낄거리며 좋아하고 있었다. 죽여뿔까.


시간이 흘러, 난 다짐대로 서울로 대학을 갔지만 부피가 큰 키보드는 서울로 함께 데려오지 못하고 부산 집에 머물다 누군가에게 기증했다. 나와 '물랑루즈' 한 번 불태우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난 학교 노래동아리에 키보드로 오디션을 본 후 떨어졌다. 그 후 피아노를 잊은 채 10년 가까이 잘 살고 있었는데, 2004년 운명처럼 '파리의 연인'에서 박신양이 '사랑해도 될까요'를 피아노 치며 부르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피아노는 내가 더 잘 치고, 노래는 비슷하고, 외모는 내가 밀리는 1승 1무 1패의 감정이 내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그리고 다음 날, 동거인 박정효를 데리고 낙원상가로 직행하여 거금 120만 원을 주고 YAMAHA 디지털 피아노를 사버렸다. 


그리고 15년이 흘렀다. 디지털피아노도 나와 함께 나이를 먹어 건반 몇 개가 고개를 처박고 들어가서 올라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지우가 가끔 피아노에 앉아서 자살한 몇 음은 건너뛰고도 열심히 연습을 했다. 그래서 오늘 이 녀석의 아갈머리를 열고 수리를 했다. 건반 하나에 8,000원이란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하드웨어 껍데기와 디지털 파트는 사실 별거 아니었구나. 건반이 비싼 거였다. 


나도 몇 개월 전에 아갈머리를 열었는데, 이 녀석도 나이가 들었네. 괜히 짠했다.

우리 둘 다 잘 살아왔다. 살아온 만큼보다 더 건강하고 신나게 살자.


아갈머리 속엔 CD와 과자봉지도 들어있었다. 어떻게 들어간 거지.


https://www.youtube.com/watch?v=uRvmEanNydI

10년 전 지우 갓난아기 때. 이 영상만 보면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워밍업


사회로 나가기 위한 워밍업을 조금씩 하고 있다. 


앞으로 내 앞에 어떤 스토리가 펼쳐지건, 내가 어디서 어떤 일을 하게 되건, 

그건 내가 잘나서, 열심히 살아와서, 충분히 자격이 되어서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난 다시 바닥에 떨어져도 할 말이 없다. 


모두 그분이 하신 일이다. 

그래서 작년의 아픔도, 쉬고 있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일들도, 

난 모든 것이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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