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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우 Sep 23. 2018

월간 김창우 : 2018년 9월

2018년 7월, 8월 그리고 9월.

또 한 달이 흘렀다. 복기조차 하기 싫을 만큼 무표정한 시간들이 지나갔다.


수술을 끝내고 병원에서 퇴원하던 두 달 전, 집으로 가던 차에서 바라본 하늘은, 80년대 부산 대신동 문화아파트 놀이터에서 시소가 오르락내리락할 때 5초에 한 번씩 시야에 들어오던 그 하늘빛이었다. 물론 outside temp는 41도로 찍혀 있어었지만.


몸은 별로였지만 기분은 최고였던 날이었다. 그 날이 내 생애  컨디션이 가장 바닥일 거란 믿음이 있었으니. 하지만 나랑 싸우고 있는 녀석은 무한 긍정 에너지와 자기 최면만으로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돌이켜 보면, 퇴원하던 날의 컨디션은 지하 3층 정도였다. 웬만한 건물들은 지하 3층이면 바닥 이잖아. 내 인격의 크기가 지상 3~4층 밖에 되지 않기에, 더더욱 지하 3층이면 충분히 내려왔다 생각했다. 난 자신감이 충만하였고 즉각적인 리바운딩을 꿈꿨다. 하지만 내게는 방사선 30회라는 다른 트랙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몸의 지하 바닥은 더럽게 깊었다. 난 퇴원 후 지하 3층에서 시작해서 매주 한 층씩 더 내려갔다. 내려갈 공간이 계속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이번 주, 드디어 6주 30번의 방사선 치료가 끝났다!


그동안의 치료를 생각하면 이 대목에선 눈물이 찔끔 나와도 될 것 같은데, 방사선이 눈물샘도 태워버렸나 보다. 마지막 치료의 기계음이 꺼졌을 때, 난 수고 많았다며 날 한 번 쓰담 쓰담하고 병원을 무뚝뚝하게 걸어 나왔다.

참 멋대가리 없는 엔딩이었다.


이제는 실감이 난다. 정말 길었던 사투가 끝났구나!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바로 밑에 맨틀이 있을 것 같이 깊숙한 지하 10층이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말수도 많이 줄어들고, 표정도 최강희 감독님처럼 무표정해지고, 조금만 빠르게 움직여도 현기증이 나고, 콧물 줄줄 흐르고, 하루에 담배 3갑씩 피는 사람처럼 기침을 많이 하고, 수면제를 안 먹으면 아침까지 불면에 시달리고, 기력이 딸릴 땐 고려장 나가는 할아버지처럼 "으어, 아이야, 아이고, 아이고야~" 신음소리도 내고... 쓰면 끝이 없다. 확실한 건 지하 10층은 정말 추한 곳이었다.


여기저기서 안부를 물어오면 이까짓 거 견딜만하다고 대답하고, 나를 만나러 온 사람들에게 괜찮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도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하여 버거웠다. 그래서 지난 6주간 날 보러 온다는 약속들도 대부분 양해를 구하고 캔슬을 했다. 핸드폰도 전자파가 뇌종양 원인 중 하나일 수 있다는 찌라시를 읽은 후 저 멀리 던져졌으며, 95년 나우누리를 통해 통신에 입문한 후 매일 켜던 컴퓨터도 한 달간 꺼 두었다.


그저 말을 줄이고 힘든 티를 너무 모양 빠지게만 내지 않는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래도 최선은 다 한 것 같다.


그러다 갑자기 컴퓨터를 켰다. gloomy sunday지만 오늘 꼭 글을 쓰고 싶었다. 멍 때리고 안마의자에 몸을 맡기고 있는데, 불현듯이 내일부터 컨디션이 상승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점심때, 내가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햄버거와 콜라를 마침내 먹게 되어 기분이 반짝하는 걸까. 그래도 내 감을 믿는다. 내일부터 한 계단씩 올라갈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훗날 지하 10층에서도 힘을 내어 글을 남겼다는 것을 기록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글에선 척을 할 수 있다. 괜찮은 척, 강한 척. 게다가 이럴 때일수록 발랄한 기운을 끌어내는 것이 내 특기가 아니던가. 하지만 이번 글은 발랄함이나 씩씩함을 쏘옥 빼고 지금 컨디션과 기분을 가감없이 전달하고 싶었다. 지금 내 얼굴이랑 헤어스타일로는 길 가는 사람 아무나 웃길 수 있는 상태지만, 글만은 진솔하게.


위 문장을 쓰고 많은 글을 썼다 지웠다. 너무 우중충했다. 아픈 걸 진솔하게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아픈 내용은 여기까지. 9월에 아픈 거 말고 또 무엇을 했을까.  


책은 20권, 영화는 10편 정도를 본 것 같다. 역시 난 책보단 영화다. 어차피 내겐 둘 다 킬링타임 용인데, 영화를 볼 때의 집중력과 감동이 훨씬 크다. 책은 20권을 읽어도, 내가 읽은 책 제목도 잘 기억이 안 난다. 영화는 월감 김창우 영화 편에 다시 리뷰하기로 하고,  


발랄함과 씩씩함은 뺐지만, 솔직함을 가득 담아 한 사람에게 고마움을 전하려 한다.


그 사람은 당연히 우리 와이프, 지영이.


결혼한 지 10년 이상된 부부들은 서로에 대해 더 알 것도, 더 알고 싶은 것도 없을 것이다. 지난 두 달간, 지영이가 내 곁에 있었다. 나와 친한 사람들은 다들 안다. 넌 결혼을 참 잘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 결혼은 진짜 잘했어"라고 대답을 한다. 아프기 전에도 그랬다.


그런데 지난 두 달을 옆에서 함께 지내고 나니, 내가 생각한 것보다 지영이는 훨씬 훌륭한 사람이란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이야기를 하자면 아라비안 나이트처럼 끝이 없을 것 같지만 오랜만에 솔직함을 꺼냈으니 쭈욱 써보려 한다.


지영이는 참 좋은 사람이다.


방사선 쬐고 개코가 된 이후, 주방에 들어가거나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것조차 힘들어져서 이제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집안일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하는 게 건조가 끝난 세탁물을 꺼내와 곱게 개어 서랍장에 넣는 일 정도만 남았다. 그런데 와이프 옷들을 정리하며 또 한 번 놀랐다. 정말 메이커 옷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 이거 비밀인가. 에이, 몰라. 남편 지하 10층이니 막 쓸게.


난 의외로 메이커 옷들이 좀 있다. 므흣.


폴스미스, 브룩스 브라더스, 폴로, 빈폴, 마시모두띠, 자라, 나이키, 아디다스 등. 물론 대부분은 하와이 Ross 등 저가 아웃렛에서 업어온 녀석들이지만, 메이커는 메이커다. 그런데 지영이 옷들은 대부분 남대문, 이태원 보세 옷들이었다.


J : 오빠, 이 옷 어때?

C : 괜찮네.

J : 얼마로 보여?

C : 50만 원? (일단 세게 지른다.)

J : 아니, 80만 원.

C : 80만 원이면 저렴하게 잘 샀네. 몇 개 더 사 오지. (남자들 이런 허세 좋아함)

J : 그치, 이쁘지?

C : 응, 잘 샀네. 근데 진짜건 80만 원이라 치고, 얼마에 샀어?

J : 80만 원이라니까.

C : 그래, 잘 샀네. 싸네. 근데 진짜 얼마?

J : 3만 원. 진짜 거랑 똑같아. 완전 득템 했어.


돌이켜 보니, 내가 곱게 개고 있는 지영이의 옷들은 항상 이런 대화를 통해 우리 집에 들어온 것들이었다. 명품백도 결혼할 때 샀던걸 제외하면 거의 없다. 액세서리는 명품 짝퉁을 다 떠나, 개수 조차 몇 개 되지 않는다.


내가 같이 살고 있는 79년생 김지영은 이렇게 아주아주 검소하다. 소유물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다. 우리가 무슨 옷을 입고, 무슨 차를 타고, 어느 동네에서 살고, 이런 것들이 우리의 모습을 설명해준다고 1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12년 된 아반떼를 여전히 처가 식구들과 공용으로 타고 다니며, 우리 차를 어르신들이 타고 나가시면 12살 아반떼를 타고도 값비싼 외제차를 탄 친구들을 만나러 당당하게 나갈 수 있는 사람이다.


대신 자기계발이나 경험을 쌓는 것에 대해선 아낌없이 쓸 줄 안다. 지난 2년간 하와이를 11박으로 3번을 다녀와서 하와이 패밀리가 된 것도 와이프의 과감한 결정 덕분이다. 그리고 우리 둘 다 회사를 다니며 야간 대학원을 다녔다. 단순히 하와이 비용과 대학원 등록금만 합쳐도 독일산 B 차량을 거뜬히 한 대 살 수 있다. 하지만 우린 둘 다 소유물엔 별다른 관심이 없다. 그래도 난 폴스미스도 한 번씩 입는데 지영이는 훨씬 더 쿨하다. 참 멋있는 마인드를 가졌다.


"내가 이 옷을 입으면, 내가 이 빽을 들면, 내가 이 구두를 신으면, 다들 진짜 꺼라 생각하지 않겠어?"

"명품은 좀 더 나이가 들었을 때 입어야 멋질 것 같아. 우리 50 넘으면 에르메스 입자."


명품을 입지 않아도 사람이 명품인 사람 지영이, 참 멋있다.



지영이는 돋보이는 인품을 가진 사람이다.


하와이 패밀리 책 가족 소개란에선, 지영이를 모두가 좋아할 만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썼다. 11년간 함께 살면서 버럭 화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특히 아이를 키우면 스스로의 분을 못 이겨 폭발할 위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 숱한 상황에서도 단 한 번도 폭발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남들이면 고성부터 터져 나올 법한 훈계 장면에서도 항상 적당한 톤 앤 매너를 유지하고, 엄마가 지금 왜 화를 내는 건지 조곤조곤 설명해주고, 아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준다. 아무리 아이가 혼나도 싼 짓을 했을 때조차 "그래도 화를 낸 건 엄마도 잘못했어. 엄마도 부족한 부분이 많아. 미안해"라는 사과와 함께 허그를 하며 훈훈하게 장면을 마친다.


수술을 앞두고 가장 큰 고민이 아버지였다. 현 상황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 주위 분들에게 내 수술 소식을 알리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도 건너 건너 아버지에게 전달될까 봐였다.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을 지영이는 당연히 눈치를 챘다.


"오빠, 부산 아버님 때문에 스트레스받고 있지?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지금 이 순간부터 오빤 부산 쪽 신경은 전혀 쓰지 마."


그 후로 두 달 동안 아버지 걱정을 전혀 하지 않았다. 아프기 전에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꼭 전화를 드려서 이런저런 대화 상대가 되어 드리고 있는데, 내가 아픈 이후로는 더 자주 통화를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답게, 나의 현재 상황을 정확히 전달을 하되 아버지가 걱정하지 않을 수준으로,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문장들을 사용하여 잘 전달한다. 아마 내가 아버지와 직접 통화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면 이게 가장 큰 스트레스였을 것 같다. 아픈 아들만큼 아버지에게 큰 불효가 어디 있겠는가. 지영이 덕분에 지난 두 달간 부산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스트레스받지 않고 나에게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개코와 식어버린 혀를 동시에 가진 이후, 매 끼니 먹는 것이 고역이었다. 지영이는 회사생활을 하면서도 새벽과 밤늦게까지 남편 먹을거리를 만드느라 애를 썼다. A를 못 먹으면, B를 해서 먹이고, B도 못 먹으면 C를 꺼내오고. 그 덕분에 평소 68kg였던 내가 수술 후 퇴원할 때 63kg가 되었는데, 7주가 지난 지금도 63kg를 유지하고 있다. 밥을 먹고 나면 걸어야 한다며 다리 힘도 차갑게 식어버린 내 손을 잡고 동네 한 바퀴씩 산책을 돌아주었다. 지영이의 이런 노력이 없었으면 곡기를 끊고 앙상한 뼈만 남아 있었을 수도.


음식 준비뿐만 아니라, 애들 뒷바라지, 설거지, 청소, 분리수거 등등 집안일을 하고 중간중간 노트북을 켜고 일을 했다. 수시로 싱가포르와 컨퍼런스 콜을 하러 구석방으로 들어갔다. 일을 할 땐 10년 전 제일기획 김지영 대리 시절의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정말 집에 있는 시간엔 단 1분도 쉬지 않았다.  


그리고 자기 전엔, 내 옆에서 성경을 읽어주었다. 내게 힘을 주는 해석을 곁들여서.


79년생 김지영으로 글을 쓰면 끝이 없을 것 같다.


지난 두 달간 아내로서, 딸로서, 엄마로서, 며느리로서, 직장인으로서 이 모든 것들을 슬기롭게 이겨내는 것을 보는 것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내 와이프 지영이,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긴급 컨퍼런스콜이 하나 잡혔다며 부랴부랴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나오더니, 수줍게 한 마디 한다.


"오빠, 나 승진했대"

"오빤 이제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아. 돈은 내가 벌면 되지 뭐."




내가 가끔 하는 말이 있다.

"저희 와이프도 한 번 소개시켜드리고 싶네요."

"우리집에 놀러오세요. 저희 와이프도 손님 오는거 좋아해요"

"다음에 와이프랑 같이 한 번 뵈요."


이 말들은 내가 진심으로 구사하는 최고 수준의 인사말이다.

이 말을 듣는 사람은, 정말 내가 좋아하고, 계속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다.




김지영 이사님, 승진 축하해.

너로 인해 내가 완치되고, 너로 인해 내가 더 크게 쓰일 수 있는 사람이 될 것 같아.


우리 더 행복하자.

 



자, 이제 전 올라갑니다.

절 걱정해주시고 기도해주신 모든 분들,
10월에 지상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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