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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우 Feb 04. 2018

월간 김창우 : 2018년 1월

약속


월간 김창우를 매월 마지막 날에 올리기로 한 것은 나와의 약속이다.

오늘은 2월 4일, 이 대목에서 나를 관통하고 있는 중요한 삶의 철학 하나가 나온다.


"4일쯤은 늦어도 되잖아?"


뭐든 좀 늦어도 된다. 내일도 해가 뜬다.

해야 할 것을 째지만 말자.



퍼즐


첫째 지우는 아주 평범한 아이다. 평균적인 11살 소녀의 감성, 두뇌, 이해력, 판단력, 관심사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 부부는 지우를 11년간 키우면서 '우리 아이 천재 아냐?' 순간이 거의 없었다. 모든 영역에서 딱 그 나이에 맞는 능력치들을 보유하고 있다. 물론 학원을 다니지 않아 상대적으로 학업능력은 떨어질 수 있으나, 우리가 판단할 때 11세 아이로서 적당한 사고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걱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우가 재능이 좀 있다고 느꼈던 분야가 몇 개 있었는데, 대부분은 줄넘기, 훌라후프, 자전거, 달리기 등과 같이 운동신경과 관련된 영역이라 패스하고, 유일하게 비운동 관련 부문 재능이 퍼즐이었다.


4살 때부터 퍼즐 앞에만 가면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했다. 한 손으로 퍼즐을 360도 뱅글뱅글 돌려가면서 퍼즐판을 째려본 후 정확한 각도로 꽂아대곤 했다. 퍼즐을 화날 때 사방으로 던져버리는 조각 정도로만 알고 있는 둘째 지아를 키워보니, 저 나이 때의 지우는 확실히 퍼즐은 잘했다.


초등학교 들어간 이후엔 3년간 퍼즐을 사주지 않았다. 온 집안 구석구석에 널브러져 있는 퍼즐 판들을 치우는 게 귀찮아서 퍼즐을 끊었다. 그러다 최근 지우가 너무 닐니리 맘보 겨울방학을 보내느라 두뇌활동(?)을 거의 안 하는 듯하여 150조각 300조각 퍼즐을 몇 개 사줬더니, 150개 조각은 페더러가 서브를 넣는 것만큼 편하게 성공시키고, 다소 터프해 보였던 300개 조각도 앉은자리에서 끝냈다. 퍼즐을 할 땐 옆에서 초코송이를 우적우적 씹어먹고 구경을 해도, 몇 개 달라는 소리도 없이 집중했다. 300개 퍼즐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날 땐, 다리에 쥐가 난다며 털썩 주저앉더니 웃으면서 울었다.


우리 딸 여전히 퍼즐을 잘하구나.



걸후드(girlhood)


세상에서 가장 슬픈 영화를 만들고 싶다면,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만 담으면 된다.

그런 영화가 이미 있다. 비포 선라이즈의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무려 12년간 동안, 1년에 한 번씩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동창회 하듯이 만나서,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담은 '보이후드'란 영화. 160분짜리 영화가 끝날 때, 12년간 아등바등 사느라 본인의 청춘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렸다는 것을 탄식하는 엄마의 한 마디, "I just thought there would be more." 영화 200편 통틀어 가장 슬픈 대사였다.


나름 치열하게 열심히 살면서 애들도 키웠는데, 그렇게 살면 뭔가 더 있을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며.

There would be more를 쫓으며 현재를 희생하다 보면, 우리도 훗날 똑같은 대사를 하게 되지 않을까.

이사를 앞두고, 인테리어의 범위와 버짓 사이에서 고민하며
이런 지출 후, 올여름 휴가는 당연히 안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와이프에게

고민하지 말고, 돈쓰기 대잔치를 해버리고
올여름 네 번째 하와이도 미리 질러버리라고
긴 글로 부추기는 철없는 남편



테니스


빠른 퇴근 후,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정현의 호주오픈 테니스 16강전을 시청했다.

외할아버지가 아이들에게 다소 어려울 수 있는 테니스 경기 방법 및 점수 룰을 엄청난 질문공세에도 멘탈이 무너지지 않으시고 차분하게 설명해주셨고, 외할머니는 적재적소에 엄청난 데시벨의 웃음소리, 물개 박수, 감탄사로 경기 관람에 입체감을 불어넣어주셨고, 지우는 내 품에 꼭 안겨 스트로크 하나하나를 월드컵 8강 승부차기를 보는 듯 가슴 졸이며 긴장하면서 봤고, 지아는 거실을 혼자 방방 뛰어다니며 선수들의 세리머니를 흉내 냈다.

이렇게 스포츠로 하나 되는 저녁시간이었다.

와이프는 거실에서 딴 일을 하며, 모든 사람이 스포츠 경기에 열광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고, 지아는 혼자 외국인을 응원하길래 이유를 물어보니, 상대가 더 잘생겼고 이름도 '초코비치'라서 더 좋단다.

정현이 전설의 조코비치를 3-0으로 누르고 사상 첫 8강에 오르는 감격적인 순간,

난 "캬, 주모 여기 막걸리!"를 외치고 싶었으나, 이 집에서 내가 제일 아래 직급인데 누굴 시켜.
심지어 난 술또라이쟎아. 그래서 혼자 요구르트 두 개를 까며 승리를 자축했다.

스파이크 강서브 리시브. 테테테테 테니스~



콜트(colt)


SUV 택시를 처음 탔다. 조용하게 운전만 하시던 택시기사님께 아이스브레이킹 차원에서 차종이 무엇인지 여쭤봤더니, "어서 와, 카렌스 택시는 처음이지?"로 시작하여 방언 터지셨다. 어르신 말을 끊기 미안해서 잠깐 일하는 척하며 이 글을 적고 있다. 저렇게 신나서 떠드시는데 이어폰을 귀에 꽂아버리는 건 너무 모진 듯하여, 뭐라도 쓰기로 했다.


어떤 사진으로 글을 쓸까 사진첩을 뒤지다가 얼마 전 문방구에서 찍은 이 사진이 레이다에 포착되었다.


어릴 때 우리 집엔 스카이콩콩도, 자전거도, 제믹스 게임기도 없었지만, 콜트 BB탄총은 있었다. 당시 스미스나 M16을 사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초4병 간지남들 사이에서 단연 콜트가 대세였다. 그래도 난 스웩 빠지게 어깨 견착용 액세서리나 확장 탄창은 사지 않았다. 또한 피스톤에 BB탄이나 이물질을 넣어 압력을 세게 조작하지도 않았다. 그건 양아치 초딩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콜트 총은 30년 전에 5000원이었는데 지금 8500원이었다. 자장면 값은 10배가 넘게 올랐는데 우리나라 총기 가격규제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손의 그립감이 그리워 하나 사려고 박스를 들었는데, 사용연령이 14세부터 20세까지란다. 헷갈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난 20세가 넘었다. 나도 내가 언제 이렇게 커버렸냐 싶다.

당시에도 장난감 총이 아이들의 폭력성을 조장한다고 한바탕 사회문제가 됐었는데, 그때 학교 가방에 필통은 안 넣어도 총은 꼭 챙겨 다니던 나도 이렇게 평화적으로 잘 살고 있다.

여전히 택시 아저씨의 방언은 계속되고 있으며 지금은 화제가 비트코인으로까지 넘어갔다. 내가 왜 평화로운 퇴근시간에 아저씨에게 북한 핵과 비트코인 강의를 들어야 하나. 그렇다고 이제 듣기 싫다며 내가 총을 꺼내진 않는다. 착한 하이톤 목소리로 "네~ 네~ 그러게요~" 추임새 잘 넣고 있다.

행복하세요, 택시 아저씨.
저희 집 다 왔습니다.




아카데미


위 아카데미 장난감 박스를 보니 떠올랐다. 제 90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3월 초에 있다. 작년 영화 200편을 보고 나서, 나름 영화 아마추어들 중엔 뱀 대가리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영화인으로서,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을 미리 예측해보자.


올 주요 후보작들 중 하나도 보지 않은 상태로 남녀주연상, 감독상, 음악상 등을 예상하는 것은 무당의 영역이라 건너뛰고 줄거리, 감독, 스태프, 예고편, 나의 바램을 바탕으로 작품상만 예상해보면, '판의 미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셰이프 오브 워터(The shape of Water)'가 수상할 듯.


다른 작품이 받더라도, 총을 들진 않겠다.



Sweet Home


2018년 1월 31일.


슈퍼 블루문 개기월식이 관측되었고, 삼성전자가 액면분할을 발표했고, 두 자릿수 영하 날씨가 한 자릿수로 잠깐 올라와서 따뜻함마저 느껴지던 2018년 1월 31일, 드디어 이사했다.


5년간 장인어른 장모님, 그리고 처남과 알콩달콩 잘 살았다. 먼 곳으로 이사였으면 아이들을 자식처럼 키우신 어르신들은 눈물 한 바가지 쏟으셨을 것 같다.


어린 시절 전세를 살다 처음 집을 사서 이사했을 때 어머니는 감동하신 듯했다. 어린 눈에도 어머니가 집을 애정 하는 것이 보였다. 매일 쓸고 닦고 먼지를 털어내셨고 새로 도배한 벽에 얼룩이라도 묻으면 걸레로 한없이 닦아내셨다.


그 집을 산지 25년,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그 집에 살고 계신다. 집구석구석 어머니의 흔적들이 보여서 그 집을 못 떠나시겠다고 하셨다.  


와이프와 몇 달 동안 발품 팔며 이사를 하나하나 준비하다 보니, 아머니의 걸레질과 아버지가 계속 살고 계신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이사를 할 때 아저씨들은 신발을 신고 다니셨지만, 우린 신발을 현관에 벗어놓고 다녔다. 그런 마음이었다. 우리의 첫 집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이미 우리에겐 이 집을 얼마에 샀고, 나중에 얼마나 가격에 올라줄 것이며, 근처에 어떤 학군이 있고, 주변 편의 시설들이 뭐가 있는지 등은 중요하지 않다.


이 집엔 결혼생활 11년의 기억, 아이들의 성장, 장인어른 장모님의 헌신, 5년간 우리 집에 와보시지 못한 아버지의 불편함 등이 집안 구석구석, 가장 사소한 방문 문콕 방지 패드에조차 스며들어 있다.


이 집의 최초 모습은 빈 공간이었다. 이런저런 물건들을 채워 넣으려 노력하지 말자.

그저 웃음소리만 가득 채워지길.



자장면


바로 위층 이사라서 포장이사를 하지 않았다. 이삿짐 아저씨 두 분만 초빙하였다. 하지만 하루 종일 "포장이사를 했어야 해~"를 되뇌었다. 지성인답게 앞뒤로 "ㅅㅂ"는 넣지 않았다. 박스에 짐을 넣고 계단을 올라 다시 박스에서 짐을 꺼내느라 허리를 수백 번 구부렸더니, 키가 2cm는 줄어든 것 같다. 폭발적인 막판 스퍼트로 180까지 잘 크고 있었는데, 여기서 키가 멈추면 이사 탓이다.


육중한 사이즈와 몸무게를 자랑하는 바디프렌드를 보시더니, 아저씨께서 젊은 사람들은 운동을 해야지 이런 거 쓰면 안 된다고 혼내셨다. 묘하게 설득력 있었다. 그래서 바디프렌드는 아래층에 두고 왔다. 지금 생각해보니 엄청난 일 반사 능력인 듯. 이 정도로 일 잘 덜어내시는 분이면 회사일도 잘하셨을 듯.

이삿날 자장면은 제사 차림상 홍동백서와 조율이시처럼 하나의 공식이다. 그래서 우리도 당연히 점심을 자장면을 시켰다. 그러자 아저씨가 말씀하셨다. "우린 맨날 자장면만 먹어요" 헉, 그렇겠다. 우리야 몇 년에 한 번씩 이사하지만 이 분들은 매일 자장면만 드시겠구나. 그때 라디오에선 음악이 흘러나왔다. "아저씨는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이제 이사할 때, 아저씨들에겐 건강한 밥 시켜드립시다.



이사 후


와이프의 요청으로, 이사하고 앉아서 소변보기 시작했다. 40년 넘은 습관을 바꾸긴 쉽지 않지만,

이번엔 라디오에서 싸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오빤 앉은 스타일~"


새 집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어제 코스트코, 이마트에서 이것저것 샀더니 100만 원에 육박했다.

이제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이 된 것 같아 밥을 먹으려 했더니, 밥솥이 없구나.

그러면 계란이나 구워 먹을까 후라이팬을 들었는데, 식용유도 없구나.


우린 100만 원어치 뭘 산 걸까.



영화관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작들을 감상할, 우리 집 별다방 도서관 옆 영화관을 완성하였다.



평창올림픽


와이프가 조금 전 평창으로 한 달짜리 출장을 떠났다.

슬프다.

(^_^)/

아, 이모티콘 오타 났네. 진짜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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