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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우 Jan 31. 2017

월간 김창우 : 2017년 1월

잠버릇


넘버 투 지아의 잠버릇은 옆에 누운 사람의 귀를 만지는 것이다. 물고기가 산소를 공급받기 위해 아가미를 팔딱팔딱 움직이는 것처럼 지아는 이불속에선 손가락 끝으로 숨을 쉬 듯 쪼물락 쪼물락 끊임없이 상대방의 귀를 만지며 잔다. 혹시 아기들이 귀를 만지는 행위의 심리학적인 분석글이 있나 찾아보니, "아이가 귀를 만지면 중의염을 의심하세요"라고 한다. 본인 귀 말고 상대방 귀라고!


나야 지아랑 단 둘이 침대에 누워서 자는 일이 드물다 보니, 지아의 귀 쪼물락 공격은 주로 함께 자는 엄마나 외할머니가 피해를 본다. 특히 서울생활 어언 40년이 되셨음에도 사투리를 걸쭉하게 쓰시는 장모님이 - 어르신들은 우리처럼 억양을 쉽게 못 고치신다 - 지아와 함께 자고 일어나시면 "아이고야, 쟈는 와 저럴꼬. 밤새 얼굴 만지작거리고 귀를 쪼말락대서 잠을 잘 수가 없다. 와저래 만저싼노? 느그랑 잘 때도 저래 만지나? 아이고야, 잠을 한 숨도 몬잤다"하신다. 그럼 난 손석희처럼 막힘없는 서울말로 대답드린다. "네, 저랑 잘 때도 귀를 만지긴 해요. 전 상관없는데, 장모님은 못 주무셨죠? 어허, 저 버릇 고쳐야 할 텐데요"


말은 저렇게 하지만, 난 죄책감으로 서둘러 자리를 피한다. 다들 모르고 있어서 완전 범죄가 가능하지만 양심 고백하자면, 사실 지아의 귀 만지는 버릇은 나 때문에 생겼다. 


사람들이 사라지면 움직이기 시작하는 토이스토리의 장난감들처럼, 지아는 밤 9시가 넘어가고 언니가 잠이 들면, 그때부터 입가에 씨익~ 만족감이 걸리며 제대로 한 번 놀아볼 준비를 한다. 태어날 때부터 존재하고 있던 경쟁자 언니를 제치고 엄마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는 시간이라 얼마나 소중할까. 생물학적인 본능으로 춤추고 노래하며 귀여운 에너지를 맘껏 뽐내려 하지만, 우린 시크하게 재워야 한다. 그래서 10시 전후의 말괄량이 지아를 재우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러 시행착오 속에서 나만의 지아 재우는 루틴이 생겼다. 우선 책을 두 권 읽어준다. 대신 두 권 읽고는 무조건 자야 한다는 약속을 받아 놓는다. 지아는 책 두 권의 끝이 그렇게 빨리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덜컥 미끼를 문다. 그렇게 책을 다 읽고 나면, 비록 약속은 했지만 이건 너무 금방이란 것을 깨닫고 더 놀 거라며 짜증을 낸다. 그때 난 회심의 카드, 도깨비 이야기를 꺼낸다. 지아에게 도깨비 이야기를 해준다고 하면, 자석처럼 침대 속으로 쏘옥 이끌려 들어온다.


내가 해주는 도깨비 이야기는 혹부리 영감님을 베이스로 중간에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흥부와 놀부, 선녀와 나무꾼, 곶감과 호랑이 이야기들이 마구 뒤섞여 있다. 이를 테면, 나무꾼이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를 보느라 시간이 늦어져, 어두컴컴한 산길을 가다가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려서 갔는데 호랑이가 곶감을 등에 태우고 달아나는 것을 보고, 그 옆 집에 들어갔는데 그게 도깨비 집이었다는 스토리로 시작된다. 최근엔 금도끼 은도끼와 늑대와 일곱 마리 아기 염소 이야기까지 콜래보를 시켰다. 매번 스토리가 조금씩 달라지니, 내가 밤마다 침대에서 해주는 도깨비 이야기는 굳이 장르로 치면, 연주할 때마다 feel이 달라지는 Jazz와 같다.


참 말도 안 되는 뒤죽박죽 이야기인데, 지아는 300번 이상은 들은 것 같은 그 이야기를 또 해준다고 하면,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포기한 채 이불속으로 들어온다. 일단 침대로까지만 유인하면 그다음은 쉽다.


도깨비 Jazz 이야기가 끝나면, 다시 산만해지며 놀거리를 찾아서 몸을 일으킨다. 그때 지구 상 가장 무서운 존재들이 등장한다. 도깨비, 호랑이, 이놈아저씨, 망태할아버지, 지네, 사마귀 등. 지아 안 자면 잡아가려고 지금 문 앞에 저 끔찍한 존재들이 와있다고 하면, 금세 겁을 먹고 다시 이불속으로 쏙 들어와서 내 품에 파묻힌다. 무서운 존재의 범주를 시험해보고자, 한 번은 심각한 목소리로 "지아야, 문 앞에 산타할아버지가 와있어. 어떡해"했더니, 반사적으로 겁을 먹고 내 품에 안겼다가, 한 10초 후 "산타할아버지는 무서운 사람 아니쟈나"하면서 다시 일어났다. 그때 지아도 생각이란 것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요즘엔 동물은 별로 무서워하지 않고, 망태할아버지가 가장 잘 먹힌다. 망태할아버지는 도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일까.


그런데 한 번은 내가 너무 연기를 리얼하게 했는지, 바들바들 떨면서 내 품에 안겼다. 놀고 싶어 하는 애 억지로 재우는 것도 미안한데, 아빠라는 사람이 딸래미를 그렇게 무서운 상태로 잠이 들게 할 순 없었다. 그래서 "아빠 귀를 만지면 무서운 놈들이 다 사라져"라고 아무 생각 없이 내뱉었는데, 그 뒤로 내 귀를 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귀 만지는 습관이 시작된 것이다. 매일 귀를 희생당하고 있는 와이프와 외할머니에게 심심한 사과와 위로를 드린다. 그나마 종아리, 아킬레스건, 허벅지, 골반 등이 아닌 게 어디야.


심지어 양쪽 귀 다 만지기



새치기


서점에서 계산하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그 날은 명절을 앞두고 유난히 서점에 사람이 많았다. 매번 영풍문고 적립금을 써버릴지 계속 쌓을지를 고민하며 대기한다. 이제 다음이 내 차례였다. 그런데 웬 할아버지가 슬금슬금 옆으로 들어오시더니 "다음 손님요"라는 말을 듣자마자 우사인 볼트처럼 치고 나가셨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핸드폰을 보느라 잠시 넋을 놓고 있던 5명을 제치고 너무나 당당하게 계산대로 향하셨다. 우리나라가 근대화 된 이후, 근래에는 보기 드문 역대급 새치기였다.


뒷사람들은 "당신 아는 사람이에요?"하는 눈빛으로 날 쳐다봤고, 난 아니란 것을 알리기 위해 과장된 표정으로 어이없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런데 다들 분노를 앞사람 앞사람에게 떠넘기다 보니, 결국 제일 앞에 있는 내가 한마디 해야하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럴 때 참 난감하다.


신이 나에게 많은 것을 주지 않으셨지만, 그중 하나가 화내는 감정이다. 와이프는 가끔 내게 불만을 토로한다. 오빠도 제발 화도 내고, 저 사람에게 가서 한 마디 좀 하라고. 하지만 난 화를 잘 내지 않는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오해가 있을 수가 있지만, 화를 참는 것이 아니라 웬만하면 정말로 화가 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화를 낼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사람에게 화를 내라고 하는 건 생각보다 가혹한 요청이다. 물론 그런 불편한 요청을 받을 때 역시 화가 진 않는.


그런데 이번 새치기는 그 수법의 대담성으로 인해, 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의구현을 위해 내가 한 마디 할 만한 상황인 것만은 확실했다. 와이프에게 새치기당한 후 버럭! 했다고 자랑할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면서 더 힘이 났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등을 두드리며 "저기요"를 막 뱉으려던 참이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할아버지가 계산하려던 책 제목 <미국 서부>


아, 여행을 가시구나. 여행의 시작은 여행 가이드 책 사는 것부터라는데, 내가 할아버지의 여행의 시작을 망칠 순 없지. 미국 서부 잘 다녀오세요. 이번엔 이렇게 넘어가지만 다음에 저질 책 사면서 새치기하는 사람 있으면, 싸대기 때리면서 혼내리라.



1월 마감 및 2월 전망


통계학적으로 의미가 있는 Last 12 years를 되돌아보면, 항상 남은 11개월은 1월만큼 계획적으로 살지 않았다. 그래서 1월만큼이라도 열심히 살아놔야 남은 11개월의 본보기가 된다. 그래서 1월의 목표를 뭘로 세울까 고민하다가, 정말 창의성 제로인 책 10권 읽기로 정했다.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스스로를 혹독하게 다룰 필요가 뭐 있나. 나 자신에게 한 없이 너그러운 기준을 적용하여, 절반 이상 읽고 도저히 재미없어서 이쯤에서 덮자고 한 책, 성의 없게 활자 위로 눈알만 빠르게 굴려 다 읽은 것으로 치기로 한 책까지 포함하면, 열 권을 읽었다.


제일 재미있게 읽었던 책은 서진의 <파라다이스의 가격>. 소설가 서진이 하와이에 두 달간 체류하며 쓴 일기 형식의 책인데, 하와이 여행기를 두 번 써 본 입장에서 너무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다. 대부분의 장소들이 머릿속으로 그려져서 좋았고, 같은 공간에서 동일한 경험을 하고도 글쓰기 프로들은 이렇게 표현하고 풀어내는구나, 감탄을 하며 읽었다.   


그리고 추가로 요시모토 바나나, 오쿠다 히데오, 하루끼, 밴 헤치의 여행기를 읽었는데, 그들은 잘 썼지만 번역자의 문제였겠지. 나머지 책들을 읽고는 무작정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특히 하루끼 아저씨는 그동안 기고했던 글들 이것저것 모아서 책 막 찍어내지 말고, 제발 책의 Quality 관리를 좀 해줬으면 좋겠다. 우리 세대 상당수의 90년대 후반의 영웅이신 분이고, 나 역시 거의 20년째 충성을 하고는 있지만 최근 책들은 한결같이 아쉬웠다. 잡문들 그만 내고, 다시 이탈리아나 그리스 섬으로 들어가서 마지막으로 대작 장편 소설 하나 만드셨으면.


여행기들 사이에 강신주의 감정수업도 읽었는데 깜짝 놀랐다. 감정수업의 프롤로그를 읽는데 살짝 소름이 돋을 정도로 <두 번째 하와이> 여행을 떠날 때 나의 생각을 관통하고 있었다.



요즘 나의 화두는 희로애락 감정의 부활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특별히 기쁘거나 노엽거나 슬프거나 즐거운 일이 줄어든다. 범위를 사랑, 미움, 욕심까지 넓힌 희로애락 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 측면에서 보더라도, 난 죽을 죄를 지은 사람도 크게 미운 마음이 들지도 않고, 언젠가부터 돈, 물질, 경쟁, 인기에 대한 욕심도 없어지고 있다. 사람은 희로애락을 느끼는 동물로 태어났는데, 이런 감정들을 잃은 채 살아가는 것은 자연의 섭리에도 어긋난 일인 것 같다. 그렇게 감정을 잃은 아재가 되긴 싫다. 이 시점에서 나의 희로애락의 감정을 증폭시키고 싶다. 그래서 내가 일상에서부터 조금씩 하려는 노력은 글쓰기, 음악 듣기, 여행하기 등이다.    <두 번째 하와이 - Prologue 중>


감정을 죽이는 것, 혹은 감정을 누르는 것은 불행일 수밖에 없다. 살아 있으면서 죽은 척하는 것이 어떻게 행복이겠는가. 그러니 다시 감정을 살려내야만 한다. 이것은 삶의 본능이자 삶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관에 들른다. CD플레이어에서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 소나타를 들으려고 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소설이나 시집을 사려고 서점을 방문할 수도 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여행을 떠날지도 모른다. 떨어지는 벚꽃을 보며 슬픔을, 친구의 행복에 기쁨을, 시부모의 무례한 행동에 분노를, 주변 사람들의 평판에 치욕을, 번지점프에서 뛰어내리면서 불안을. 이 모든 감정들의 분출로 우리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강신주의 감정수업 Prologue 중>



내가 고민하고 써놨던 내용을 유명한 철학 교수님이 이미 베스트셀러에서 이 시대에 화두로 던져주고 계셔서 놀랬고, 내용의 유사성에 놀랬고, 동일한 감정이지만 표현의 세련됨에 더욱 놀랬다. 내가 작년부터 영화 보고 책 읽고 여행 다니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감정수업 중이었구나.  


1월은 이렇게 10권의 책과 함께 마무리한다. 한 달씩 사는 것도 나쁘지 않네.

2월의 목표는 이미 정했다. 턱걸이 15개!


이것도 그다지 창의적인 목표는 아니지만, 마음의 양식으로 시작했으니, 육체적인 부분도 한 번 건드려야 신년초스럽지.


최선을 다해 보되 숫자의 압박에 너무 겁먹지 말자. 난 스스로에게 아주 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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