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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우 Apr 30. 2017

월간 김창우 : 2017년 4월

April


4월은 뭔가 애매하다.


그렇게 느끼는 이유로 죽을 4자를 들먹이며 시작하는 건, 마법천자문 만화책에 심취한 초딩들이나 언급할 수준이라 넘어가겠다. 참고로 70~80년대엔 부정 탄다고 층수에 4를 건너뛴 건물들도 많았지만, 난 당당하게 4층이 존재하는 아파트에 살았다. 그렇다고 우리 집이 4층은 아니었다. 그러다 4층, 심지어 414호에 사는 이웃집 형 집에서 '13일의 금요일' 영화를 본 이후론 매달 13일이 금요일에 걸리는지 아닌 달력에서 항상 체크했다. 혹시라도 7분의 1 확률로 13일이 금요일 날이면, 등굣길에 무단 횡단도 좀 줄이고 괜히 뒤에 마스크를 쓴 사람이 쫓아오진 않는지 두리번거다. 그래도 겉으론 티를 내진 않았다. 당시 교실에 들어가면 꼭 한 명쯤은 "오늘 13일의 금요일이데이. 다들 조심해라이. 뒤진다"를 외치는 놈들이 있었지만, 내가 그 부류에 속하진 않았다. 그 외에는 빨간펜으로 이름 쓰는 것 정도만 피하며 살았지, 4라는 숫자에는 의미 부여하며 살진 않았다.


다만 4월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3월과 5월 사이에 그냥 통과하는 페이퍼컴퍼니와 같은 느낌의 달이었다. 3월엔 새 학기가 시작되니 "마, 니 이름 뭐고. 좀 치나. 학교 끝나고 떡볶이 한 그릇 같이 물래"하며 새 친구들도 사귀고, 운동장엔 알록달록 꽃도 피니 뭔가 활기차다. 매일매일 에너지 드링크 세 개 정도는 원샷을 하고 High 되어서 하루를 보내는 느낌, 난 이런 기운을 좋아했다. 그리고 붉은 날짜가 많아 박수받아 마땅한 5월은 각종 이벤트들이 몰려있다. 특히 크리스마스를 누르고 생일에 이어 Big Day 랭킹 2위에 빛나는 어린이날이 초순에 포진해있어, 4월 달력이 찢겨나가고 5월의 진입만으로도 설레임이 폭발했다.


그에 반해 4월은 마치 모든 시선이 머무는 낙타의 혹들 사이에 움푹 파인 공간처럼 3월과 5월을 돋보이게 할 뿐 참 특징 없는 달이었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4월엔 특별히 챙겨야 할 생일도 없었다. 훗날 인연을 맺어가는 사람들 중에도 유독 4월 생일자는 별로 없었다. 나중에 월을 영어로 배울 때도 1~3월은 노래 가사처럼 잘 외워졌는데, 4월에서 첫 번째 허들을 만났다. Ap로 시작하는 단어는, 전체 영어단어 중 가장 먼저 외운다는 그 유명한 Apple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April이란 스펠링이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을 방해했고, 발음도 '에이프릴'인지 '에이프럴'인지 헷갈렸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4월 5일 식목일이 공휴일에서 제외되는 악재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 국토를 푸르게 푸르게 만들지 않을 것인가. 달력에서 빨간 숫자에서 검은 숫자로 변해버린 4월 5일을 보며 내 조국에 처음으로 실망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 나에게 4월은 일 년 중 가장 느낌이 없는 애매한 한 달이 되었다.


날씨도 애매함을 거든다. 요즘 4월은 겨울도 봄도 여름도 아니다. 그렇다면 가을인가. 계절을 특정하기 어렵다. 4월은 애매하게 모든 계절을 모두 다 걸치고 있어서, 운전할 때 춥다며 26.5도에 맞춰 히터를 켰다가 잠시 후 겉옷을 벗고 18도 에어컨으로 바꿀 땐 내가 미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 와중에 올 4월은 대선까지 껴있어 뉴스나 타임라인들도 너무 지저분해졌다. 서로 티는 안내지만, 우리 집안엔 1~5번 지지자들이 모두 함께 산다. TV토론을 보고 지지 후보를 바꿀 만큼의 유연성도 가지고 있다. 서로 몇 번을 뽑을 것이냐며 묻지도 않고,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을 설득하지도 않는다. 좋게 표현하면 다양성이 건강하게 살아 있는 가정이며, 나쁘게 말하면 쿨 병이 진동한다. 물론 그렇다고 6번부터 15번 후보들까지 관심 가질 정도로 쿨하진 않다. 흰 양복 입으신 분, 콧수염 기르신 분 등, 큰돈 들여 나왔는데 얼굴은 고사하고 이름도 몰라 죄송하다. 5지선다 객관식 문제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에게 6번부터는 뭘해도 그냥 오답처럼 보임을 이해해달라.


그렇게 애매한 4월이 애매하게 끝나고 있다.



독일학교


와이프가 한남동의 서울 독일학교 바자회에 다녀오자고 했다. 거긴 어떻게 아냐고 물었더니, 그 학교를 다녔단다. 서울 독일학교? 난생처음 듣는 이름이다. 난 와이프에 대해 도대체 뭘 알고 있는 걸까?


근처 사는 지우 친구 두 명까지 데리고, 끊임없이 재잘거리는 여자아이 넷을 태우고 한남동 독일학교로 출발했다. 다행히 날씨는 화창하고 교통체증은 심하지 않았다. 근처 뮤지엄에 차를 세우고 봄 반 여름 반인 계절을 느끼며 학교까지 걸어갔다. 가는 길에 간지 나는 한남 더 힐 빌라를 보더니, 와이프가 이다음에 저런 곳에서 살고 싶단다. 그래서 "나도"라고 대답했다.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공감대를 표현하는 동시에, 그렇게 하기 위해 주도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행위 주체를 교묘하게 섞어버리는 노련한 답변이었다.  


독일학교는 생각보다 작았다. 독일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이 반반 섞여서 열심히 거래를 하고 있었다. 대부분 독일산 장난감, 옷, 책, 장신구, 빵, 케이크들이었는데 오랜만에 학교를 방문한 와이프는 백 년 만에 독일어를 쓰며 고향에 온 듯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나도 제2 외국어로 독일어를 배웠지만, 저들이 쓰고 있는 게 독일어란 사실조차 모르겠다. 독일학교니까 독일어겠지.


아이들은 만원씩 쥐어주고 풀어놓으니 신났다. 언어도 안 통하는데 이것저것 잘도 산다. 이렇게 모두가 즐거울 수 있었던 것은 둘째 지아를 전담 마크했던 나의 공이 컸다. 지아 데리고 구석에 놓여있던 정글짐과 미끄럼틀을 50번쯤 탔다. 30번이 넘어가니 다람쥐가 된 기분이었다.


나무 그늘에서 잠시 쉴 때 내가 다닌 중학교가 떠올랐다. 부산 대동중학교. 울 학교에서 이런 바자회를 하면 학생들이 뭘 가지고 나올까. 쌍절곤, 담배, 야구방망이, 거북이 박제, 핫윈드 잡지, 훔친 참고서들...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니잖아. 난 심지어 고등학교까지 중학교와 운동장을 쉐어하는 대동고등학교를 나왔는데, 내가 그러면 안되지.


핫도그나 먹자. 당케 쉔. 아우프 비 더젠.





아버지


아버지는 새벽마다 성경구절 한 마디씩 카카오톡으로 보내주신다. 그 톡이 안 올 땐 해외를 나가셨거나 몸이 무척 안 좋으실 때다. 그래서 아버지의 건강 상태는 눈을 뜨면 카톡 메시지 여부로 파악이 된다. 인쇄술, 바퀴, 전기, 인터넷 등과 유사한 레벨로 인류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Ctrl C + Ctrl V' 세상을 모르시기에, 아버지는 그 두꺼운 손가락으로 한 자 한 자 타이핑해서 메시지를 보내신다. 오늘도 출근길에 메시지를 확인하러 카톡에 들어갔는데, 아버지 카톡 프로필 사진이 바뀌었다는 10시 방향 붉은색 점 표시가 보였다. 어지간하면 잘 바꾸시지 않는 분이라 의아해하며 확인했더니, 아래 기사 링크였다.


http://m.sport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12&aid=0002823862


조영섭이라는 복싱체육관 관장님께서 아버지에 대한 기사를 기고하였다. 전문 기자분이 아니셔서 표현들은 다소 투박하지만, 조영섭 관장님의 아버지에 대한 충정이 느껴졌다. 다만, 자식 농사 대목은 사실과 조금 달라서 공유가 망설여졌다. 특히 출신 대학이 나와 있는 부분이나 '입지를 탄탄하게 구축하고 있는' '강남에 있는 대규모 펀드회사 상무로 재직 중' 대목에서의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다.



이 대목은 아버지의 정확한 워딩은 아니었을 듯하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 잘 모르신다. "느그 둘째 아들은 서울에서 뭐하노?"라는 질문을 얼마나 많이 받으셨을까. 그래서 가끔 아버지가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물어보셔서 몇 번 설명은 드렸지만, 내가 하는 일은 쉽게 설명하기가 더 어렵다. 설명하는 나조차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이 뭐지?' 헷갈릴 정도이니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 입장에선 내가 삼성전자 다닐 때가 제일 설명하거나 자랑하기 좋았던 시절이었을 것 같다. 그래서 이 기사의 자식들 대목은 아버지가 이해하시는 범위 내에서 일부 희망사항을 섞어 설명하신 것을 기자님께서 아버지에 대한 충정으로 다소 과한 단어들을 선택해서 포장해주신 것 같다.


하지만 그 대목을 제외하곤 아버지가 살아오신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듯했다. 내가 피부로 느끼며 살아온 아버지의 인생이 기사 한 줄 한 줄에 녹여져 있다. 훗날 우리 아이들에게 할아버지의 삶을 전해주기 위한 목적으로 이 기사를 킵. 여기엔 담겨있지 않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수많은 아버지의 무용담과 에피소드들과 함께.


자식을 길러보니 알겠다. 아직까진 우리가 아이들에게 좋은 친구이자 슈퍼히어로지만, 언젠가부턴 우리 도움 없이도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날들이 오겠지. 그때가 되면 많은 슈퍼히어로들이 조금 쓸쓸할 듯하다. 하지만 울 아버지는 그러실 필요가 없다. 난 아직도 내가 테러리스트들에게 인질로 잡혀가면 아버지가 바바리코트를 입고 중절모를 쓰시고 "아빠가 좀 늦었재"하시며 나타나실 거라 믿고 있다. 살면서 흐트러지거나 약한 모습을 단 한 번이라도 보여주셨다면, 나이가 40이 된 자식이 아직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난 저렇게 기사화될 삶을 살고 있진 않기에, 우리 딸들을 위해 이렇게 글이라도 계속 남긴다. 바바리코트와 중절모가 어울리는 아빠를 꿈꾸며.



세 번째 하와이


미리 스터디 시작.

이젠 준비도 디지털화.

구글맵에서 체크포인트 별표치기 시작.

별표는 빅아일랜드지만, 마음은 이미 네 번째 카우아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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