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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우 Nov 30. 2016

월간 김창우 : 2016년 11월

넘버원 지우


할아버지의 스포츠 DNA를 정통 계승한 넘버원 지우. 줄넘기, 훌라후프, 인라인스케이트, 자전거를 배울 때 놀라운 습득력과 균형감각에 나를 놀라게 했다. 지금도 제일 잘하는 게 뭐야?라고 물어보면, 자신 있게 “한 발로 서 있기”라고 대답한다. 그래서 시켜보면, 한 발로 서서 겨울잠도 잘 수 있을 태세다.


그래서 난 지우가 운동을 한다고 하면 전폭적인 지원을 해줄 생각도 있다. 물론 스포츠 DNA를 물려주신, 우리 집안 의사결정 최대주주 할아버지가 강력하게 부결 놓으시겠지만. 하지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지우는 운동하는 것을 정말 싫어한다. 태권도도 억지로 했고, 수영도 하는 걸 보니 이제 폼이 나오려는데, 하기 싫다고 박박 우겨 12월 등록은 하지 않았다. 대신 스케이트를 시킬까 했는데, 요이땅 하자마자 3초 만에 마감되어버렸다.


그리고 엄마에게 영어를 가르쳐달라고 한다. 이름도 ‘김지영의 영어교실’이라 지어왔다. 근데 엄마가 바빠서 진도가 안 나간다. 이럴 때 해결사 아빠가 나서야지. ‘손창우의 영어교실’을 시작해야겠다. 찰지고 구수한 부산 영어의 끝을 보여주마. 몇 번 하고 나면, 차라리 태권도나 수영을 다시 하겠다는 말이 나올걸.


[수영하는 넘버원]



넘버투 지아


지난 토요일. 거실에서 놀다가 엄마와 지아가 대화를 했다.

엄마 : "우리 지아 앞머리 조금 자르면 이쁘겠다."

지아 : "응"

그리고 지아는 쿵쿵 쿵쿵 뛰어 방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나타난 지아. 머리를 감싸 쥐고 있다. 절대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왜 그러냐 물으니, 얼굴 보지 말라고 소리쳤다. 몹시 당혹해하는 목소리였다. 난 본능적으로 뭔가가 대단히 잘못되어버린 분위기를 감지하고 지아가 뛰쳐나온 방을 들어가 봤다.


헉! 수북하게 쌓여있는 머리카락과 구석에 은폐 엄폐 버려져있는 문방구 가위.


혼자 방에 들어가 신나게 머리를 잘랐다. 앞머리 옆머리 뒷머리 골고루 난사질을 해놨다. 지아는 자르고 나서 거울을 보고서야 본인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았던 것 같다. 계속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지우가 “헉, 이게 뭐야. 너 남자 됐어” 한 마디 하니, 그제야 참았던 울음을 터뜨린다. “나 남자 아니야. 남자 아니야”


그래, 지아야. 너 남자 아니야. 남자도 그렇게는 머리 자르지 않아.


매너리즘에 빠졌던 동네 미장원 선생님께 오랜만에 난이도 높은 가위질의 기회를 드렸다. 다행히 특정 부위를 쥐 파먹은 것처럼 사고를 쳐놓진 않아, 나름귀 엽게 마무리가 되었다.


‘손창우의 생각좀하자 교실’도 시작해야겠다.


[사건 현장과 수습 후 걸 크러쉬 지아]



시청역


프라자 호텔에서 10시부터 열리는 포럼을 듣기 위해 시청역에 내렸다. 오전 8시 50분, 출근하는 사람들 무리에 섞였다. 아, 시청역, 출근하는 사람들. 갑자기 10년 전으로 돌아간 듯했다. 난 표지판이나 출구를 확인하지 않고 본능에 몸을 맡겼다. 자연스럽게 발길 닿는 대로 계단을 올라가서 출구를 빠져나와, 빠른 걸음으로 건물 입구에 도착했다.


나의 첫 근무지, 삼성전자 본사 건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10년 만에 와보는데, 그대로였다. 내부도 그대로고 입구에 서 있는 에스원 직원분들의 코트조차 그대로인 듯했다. 입구에 서 있으니, 갑자기 병조 형이 와서 늦었다고 빨리 들어가자고 말을 걸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그 계단이 날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매일 내려가던 그 계단도 그대로였다. 다만 리빙플라자 태평로점이 있던 장소에는 아티제 빵집이 들어서있다. 난 10년 전 감성으로 달달하게 크림빵과 카라멜마키아또를 시켰다.


직원이냐고 묻길래, “저 직원 아닌데요”라고 대답했다. 그냥 “아니요”하면 될 것을.

더 이상 직원이 아니란 것이 아쉬웠는지, 그 시절이 그리웠는지.


혼자 빵을 먹으며 이 건물에 누가 없을까 생각해보니, 맞다, 윤경이가 여기서 일하고 있군. 과동기 20년 지기 삼성증권 윤경이. 내려오라고 톡 보냈더니, 20분 후에 내려온다. 단톡 방에서 매일 쓸데없는 톡들을 하다 보니 얼마 전에 본 것 같은데, 둘이서 곱씹어보니 적어도 6~7년 만에 보는 것 같다. 가스나, 매일 힘들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얼굴만 좋구먼.


건물을 나와서 위를 올려다보니 기분이 묘하다. 20대 후반 내 청춘을 불태운 곳. 빨리 19층으로 올라가서 엑셀을 돌려야 할 것 같다. 미안한데, 나 이제 엑셀 별로 안 쓰며 산다.


지우의 ‘손창우의 영어교실’과 지아의 ‘손창우의 생각좀하자 교실’이 각 10회 차가 넘어갈 때, 아이들 데리고 이 곳을 한 번 와보고 싶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엄마의 20대를 송두리째 앗아갔던 제일기획도 들리자.


[다시 찾은 옛 삼성본관 내부]




2ND Hawaii 글은 다 써놨는데, 책 편집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건, 다가올 크리스마스 선물 타이밍에 맞추려는 시간 끌기로 볼 수 있다. 하루하루 쓴 글들이라 전체를 쭈욱 읽어본 건 지난 주말이 처음이었다. 흠, 매일매일 컨디션이 달라 퀄리티도 뒤죽박죽인데, 적어도 우리 가족들은 좋아할 것 같다.


지난번에는 12부를 만들었고, 이번에는 몇 부를 만들지 고민 중인데, 가끔 빈말로라도 글 재미있게 읽었다는 단자릿수 “샤이 김창우” 팬들,  나 다 기억하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으니 그분들께도 몇 부는 선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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