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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우 Sep 29. 2016

월간 김창우 : 2016년 9월

추석


어린 시절엔 추석과 구정을 기다리는 마음가짐이 조금 달랐다. 연초에 구정, 가을에 추석이 있다는 것은 명확하게 인지했으나, 세배를 하는 날이 언제인지가 항상 헷갈렸다. 여기서의 핵심은 세뱃돈이었다. 구정 땐 제사를 지내고 세배를 하면 세뱃돈을 받았는데, 추석엔 공식적인 세뱃돈이 오가진 않았다. 그래서 추석은 구정만큼 들뜨게 기다리지는 않았다.


초등학생들에게 세뱃돈은 중요했다. 명절만 끝나면 친구들끼리 모여서 각자 얼마씩 수금했는지 액수를 깠다. 우리 집안에는 불행하게도 세뱃돈 가격 카르텔이 존재했다. 제일 큰 어른이신 할머니께서는 치맛자락에 꼬깃꼬깃 넣어두고 있던 지폐들을 꺼내 손주들에게 나이불문 각 5천 원씩 나눠 주셨다. 그러면 삼촌들은 할머니의 금액을 넘지 않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기라도 한 듯, 무조건 그 금액을 맞춰주셨다. 5천 원짜리 한 장이냐, 천 원짜리 다섯 장이냐의 차이만 있었을 뿐, 항상 정액이었다. 그래서 나의 세뱃돈은 3~4만 원을 넘기기 힘들었고, 가끔 10만 원을 넘게 수금했다고 자랑하며 떡볶이를 쏘던 친구들이 부러웠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할머니께서 만 원짜리 지폐를 꺼내 주셨다. 할머니의 변심 이후, 몇십 년 동안 잘 지켜져 내려오던 집안의 세뱃돈 가격 통제가 완전히 무너졌다. 어르신들은 1만 원, 2만 원, 5만 원도 주셔서 나의 세뱃돈 총액도 10만 원을 훌쩍 넘어갔지만, 그때는 이미 친구들끼리 얼마 받았는지 서로 까 보던 나이가 훌쩍 지난 후라, 금액은 내게 더 이상 큰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내게 구정은 고소한 스팀밀크(세뱃돈)가 첨가된 에스프레소 마끼아또의 맛이라고 하면, 추석은 뭔가 밍숭 밍숭 한 아메리카노 같은 느낌의 명절이었다.


지우 지아가 태어난 이후, 명절 때마다 애들 데리고 번거롭게 내려오지 말라고 하시는 아버지 배려 덕분에 몇 번의 명절을 건너뛰었다. 어차피 제사는 지내지 않으니 아버지가 대목을 피해 서울에 올라오셔서 애들 한 번 보고 내려가시곤 하셨다.


난 이번 추석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지영이가 이번엔 부산에 꼭 내려가자고 했다. 그러면서 혼잡 시간대를 피해 4인 가족의 표를 구해놓았다. 애들 교육 차원에서도 명절의 의미도 되새겨보고, 아빠가 성장한 집, 동네, 학교, 친구들을 애들에게 보여주자고 했다.


나이가 들면서 깨닫게 된 것이 하나 있다. 남자는 그냥 여자가 하자는 대로 하며 살면 된다. 남자가 의사결정 주도권을 지는 집구석은 위계는 있을지 몰라도, 대부분의 경우는 혁신도 없고 발전도 없다. 그렇게 와이프 말에 토를 달지 않고 부산에 갔다.


첫날은 부산 집에서 잤고, 둘째 날은 해운대 호텔을 예약했다. 부산 집과 동네는 20년째 그대로인데, 해운대는 갈 때마다 별천지가 되어 가고 있었다. 렌트도 해야 했기에 비용 조금 아끼려고 한 레벨 낮은 호텔에서 묶었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조선 호텔 커피숍에서 커피 두 잔과 조각 케익을 하나 시켰는데, 지우가 지금까지 먹은 케익중 제일 맛있다고 했다. 난 속으로 지금까지 먹은 케익 중 제일 비싼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도 딸내미가 그렇게 맛있다는데, 똑같은 케익을 하나 더 시켜줬다. 그렇게 해운대 야경을 보며 놀고 있었는데, 류지훈과 정현철이 완전 동네 아재가 피시방에서 게임하다가 열 받아 고등학생과 현피 뜨러 가는 복장으로 조선 호텔로 찾아왔다.


“쭉빼, 이 비싼데서 커피를 다 마시고 있노?”

“접시 봐라. 케익도 두 개 먹었다. 지기나?”

“지기네. 숙소는 어디고?”

“OOO호텔”

“거기 묶으면서 여기서 커피 두 잔에 케익 두 개 먹고 있나. 임마 완전 도라이네. 그 돈으로 여기 묶겠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다. OOO호텔값에 여기 커피숍 가격을 더하면 조선 호텔 오션뷰 룸에서 자고도 남았다. 어처구니없는 놈들이지만 가끔 날카로울 때가 있긴 하다.


지영, 지우, 지아를 호텔에 내려주고 두세 시간 정도 자유시간을 얻어, 난 이 놈들과 장어를 먹으러 갔다. 우리의 대화는 대부분 <부산생활 #2>스러운 이야기들이다. 이 놈들은 내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 잘 모른다. 그리고 나도 그들이 요즘 어떻게 살아가는지 잘 모른다. 우린 서로 묻지도 않는다. “또 살쪘네. 돼지 같은 기.” “대가리 그게 뭐고?” 이런 질문들로 안부를 대신한다. 그것 만으로 충분하다.



<2016 추석 부산 흔적들>





턱걸이


오늘 다시 턱걸이에 도전했다.


6월 4일 : 2개

7월 8일 : 8개

8월 3일 : 8개


거의 두 달이 흘렀는데, 9월은 추석 연휴로 인해 운동을 3번밖에 가질 못했다. 그래도 몸뚱이가 많이 망가지지는 않은 것 같아 오늘도 조심스레 8개 정도를 예상했지만, 완전 스타일 개 구기더라도 10개를 채워보자고 다짐했다.


Start!


https://youtu.be/dq3FGiRAo84


용쓴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관대해지기로 했다. 마지막 하나도 인정해주며 10개!


별거 아니지만, 턱걸이 10개는 고등학교 이후 처음 해본 것 같다. 스스로가 대견하여 운동 후 늦은 점심으로 18,000원짜리 ‘연어 스테이크 벤또’를 먹었다. 이걸로는 선물이 부족한 것 같아서 Lululemon에 가서 간지 나는 운동복 하나 살까 생각했지만, 마지막 개구리 포즈가 계속 맘에 걸렸다.


다음번에 제대로 12개 하는 날, 2000원 더 비싼 ‘장어 벤또’를 먹고 lululemon 운동복을 사리라.



복싱


힘을 빼고 샌드백을 쳤다. 정말 고수는 힘을 빼고 상대가 들어오는 움직임을 잽싸게 포착하여, 상대가 밀고 들어오는 힘을 역이용해서 몸의 회전력만으로 땅! 때려 넘어뜨린다. 하지만 내가 힘을 뺀 이유는 이것과 전혀 상관이 없었다. 진짜 몸에 힘이 없었다.


턱걸이도 무리해서 했고, 2주 만에 체육관을 찾았더니 1라운드 3분이 너무 길었다. 그래서 관장님한테 “체육관 시계 고장 난 것 같아. 확실해”라고 했더니, “행님 몸이 고장 난 것 같은데요. 확실해요”라고 카운터 펀치를 맞았다.  그렇게 미트 2라운드를 치고 나니 온 몸의 모든 기가 빠져나갔다. 그래도 루틴인데, 샌드백 3라운드는 쳐야 한다. 그래서 힘 빼고 시간 때우기용 샌드백을 쳤다. 위빙 더킹을 하거나, 바디를 치거나, 어퍼나 훅을 칠 힘은 없어서 오직 만만한 스트레이트만 쳤다. 중간엔 관둘 수 없으니 빨리 공이 울리기만 기다렸다. 그 모습이 관장님 카메라에 담겼다.


https://youtu.be/DBAYrfAAg3c


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단 밸런스가 무너지진 않았다. 이 정도면 영상을 살려야지. 그래서 아버지께 동영상을 보냈다. 그랬더니 다음과 같은 답장이 왔다.


아직 자판 누르는 것이 익숙하지 않으신 아버지로선 엄청난 시간을 들여 작성하신 답장이다.


역시 우리 아버지.

오히려 ‘지우 아빠 아직 폼이 살아있네요’와 같은 피드백을 받았으면 조금 서운했을 것 같다. 저 답장을 보니, 아버지가 중국 국가대표 감독하실 때, 샌드백에 머리 딱 붙이고 샌드백이 찢어져라 양 훅만 무식하게 계속 치던 습관이 있던 중국 선수들에게, 저 원투 스트레이트를 가르쳐주려고 무던히 애를 쓰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지도방식과 복싱에 대한 철학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내가 운동을 한지 오래된 만큼, 언젠가부터 설렁설렁 운동하며 까먹고 있던 포인트다. 지적하신 대로 치기엔 지금 스텝이 죽어 있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원 포인트 레슨을 받으니 정신이 번쩍 든다.


9월도 수고했다.




https://brunch.co.kr/@boxerstyle/46

https://brunch.co.kr/@boxerstyle/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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