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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우 Dec 27. 2017

월간 김창우 : 2017년 12월

카페


회사 근처에 커피숍이 세 개가 있는데 이름이 너무 헷갈린다. 테라로사, 로네펠트, 클로리스. 내 귀에는 셋 다 '클라펠트' 정도로 똑같이 들린다. 로네펠트 약속인데 테라로사에 앉아서 왜 안 오냐는 톡을 보내질 않나, 밀크티가 맛있는 클로리스에 가서 로네펠트의 모르겐타우를 찾질 않나. 가뜩이나 어려운 세상살이, 커피숍들마저 헷갈리는 네이밍으로 날 괴롭힌다. 아, 카페라고 해야 하나. 커피숍이나 카페나 다방이나.


이 어려운걸 척척 구분해해는 사람들이 신기했다. 그들도 종이에 여러 번 적고 소리 내서 발음하며 외운거겠지? 그래도 내가 잘 기억하는 분야도 있다. 축구에 관심이 1도 없는 와이프에겐 호나우두, 호나우딩요, 호비뉴, 호아킨 등이 그저 똑같이 '호가든' 따위로 들리겠지.


얼마 전 회사 옆 오크우드 1층에 새로운 프랑스 베이커리가 생겼다. 나에겐 또 하나의 빵도 파는 다방이다. 앞서 언급한 '클라펠트' 세 곳보다 찾기가 수월하여 약속 장소로 제격이었다. 이번엔 제발 이름이 어려운 네 자가 아니길 바랬다. 간판이 불어로 적혀 있어서 이름을 물어보았다. '르푸도레'


이런 젠장.

회사 근처 '클라펠트'가 '클라펠레'가 되는 순간.


그냥 커피를 끊자.

카페는 네이버 카페나 다음 카페만 가는 걸로.




X-mas


지금껏 X-mas의 X가 무엇을 뜻하는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연립방정식을 풀 때 치환법을 배운 이후, Christ를 X로 치환하여 줄인 것이 아닐까 의심을 해보았지만 거기까지였다. 며칠 전 아무 생각 없이 X-mas라는 단어를 보다가 줄일 거면 이니셜을 따서 C-mas로 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데, 굳이 X로 치환한 이유가 뭘까 궁금해졌다. 나이가 드니 이제야 궁금한 것들이 생긴다.  


내가 좋아하는 카페인 네이버 카페에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었다. Christmas는 그리스도를 뜻하는 Christ와 예배를 의미하는 Mass의 합성어이며, 그리스어(헬라어)로 그리스도인 Χριστός의 머리글자를 따서 X-mas라고 했다. 이거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건가.


일본에 있는 주노가 크리스마스 날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길래 왜 휴일까지 일하고 있냐고 하자, 일본은 크리스마스가 공휴일이 아니라고 했다. 한 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건데, 이것도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건가.


페이스북이 보여주는 7년 전, 5년 전, 3년 전 사진들을 보니 크리스마스 선물을 참 다양하게 준비했었다. 완전 어른들을 위한 선물(양주 두 병, 와인 네 병, 맥주 한 박스)도 해봤고 아이들 보드게임만 잔뜩 사 준 적도 있었다. 나도 어릴 때 해마다 선물을 받았을 텐데 7살 때 받은 심형래 캐럴밖에 기억이 안 난다.


와이프가 작년에 남편의 재가도 받지 않고 아이들에게 산타가 없음을 기습적으로 커밍아웃한 이후, 여전히 산타가 없다는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아만 속이긴 너무 쉬워서, 올해 선물 준비 과정은 긴장감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장모님께선 전날 이마트 장바구니에서 포장 안된 선물을 지아 눈 앞에서 꺼내 주셨다. 이건 너무 심하다 싶어서, 외할머니가 주차장에서 산타할아버지를 만나신 것 같다며 대충 둘러대긴 했다.


아이들은 성탄절 아침에 일어나 선물 두 개를 보더니, 둘 다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내 선물이 더 작다느니, 갖고 싶었던 엄마까투리 인형이 아니라느니, 불평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것들이 실컷 포장해서 갖다 놨는데 선물 투정이라니. 그리고 애꿎은 화살이 내게 날아왔다. 아빠가 평소에 책을 너무 자주 사줘서, 애들이 선물 고마운지 모른다고.


그래, 이제 책도 끊자




헤어스타일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스포츠머리를 하고 있다. 그 해 여름이 유독 더워서 시원해지려고 스포츠 머리로 민 이후 다시는 장발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마치 경기도로 한 번 나오고 나면 서울로 다시 들어가기 힘든 것처럼.


얼마전에도 주노헤어 청년이 나에게 머리를 길러보는 게 어떻냐고 했다. 미용학원 교재에 겨울에 짧은 머리 손님이 오면 그 멘트를 던지라고 적혀 있기라도 한건지, 매년 겨울이면 머리를 길러보란 권유를 받는다. 그러면 난 평소보다 더 짧게 잘라 달라고 한다.


"제가 머리 기르면 이렇게 돼요. 머리 밀기 전 별명이 시릴로에요"

커피도 끊고 책도 끊어도, 짧은 머리는 못 끊는다.




건망증


가끔 미치도록 떠오르지 않는 이름이나 단어들이 있다. 이건 카페 이름 헷갈리는 것과는 조금 다른 차원이다. 그래도 이 순간을 즐긴다. 뭔가 가물가물할 때 고도의 집중력이 나온다. 끝까지 떠올리려고 애쓰다 보면 끊어진 뉴런이 다시 연결되는 기분이다. 그쯤 되면 오기가 생겨, 절대 검색해서 쉽게 알려고 하지 않는다. 나와의 싸움이다.


며칠 전 날 괴롭혔던 단어는 '데릴사위'였다. 이 쉬운 단어가 순간 기억나질 않았다. 혼잣말로 "아, 가물가물한데. 이 단어 뭐였지?" 했더니 어처구니없게 '가물가물하다'는 'on the tip of my tongue'이란 영어 표현이 떠올랐다. 아니, '가물가물'이 아니라 처가에 들어가 사는 사위를 칭하는 단어를 떠올리라고. 그리고 영어말고 우리말!


이렇게 순간 집중을 해서 머리를 돌려놓으면 반드시 맥락 없는 타이밍에 단어가 톡 튀어나오긴 한다. 새벽에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잠시 깼을 때 떠오를 때도 있다. 이번에는 세 시간쯤 지난 후 전화벨이 울려서 손을 뻗어 전화기를 잡으려는 찰나에, 맥락 없이 '데릴사위'란 단어가 떠올랐다.


그래, 다음 달이면 나의 데릴사위 5년이 끝난다.



자취방


응답하라 시절 나의 자취방엔 항상 친구들과의 사진과 글러브를 벽에 붙였고, 행거엔 4계절 옷이 빽빽하게 모두 걸려있어서, 곳곳에 비치해두었던 냄새 먹는 하마들과 물먹는 하마들이 떼죽음을 당하곤 했다.

심플 모던 스타일을 추구하는 손무지 MUJI 답게, 책상과 침대 사이 수납박스가 미관을 해친다며 빨간색 화장실 발매트로 그 위를 덮어버렸다. 이런 센스는 ELLE, GQ, ARENA 잡지를 읽는다고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타고나야 한다. 신촌의 색감 깡패 웨스 앤더슨이라 불릴만했다.

(중략)

데릴사위에서 윗층사위가 될 이사가 임박했다.
새 집 이사 준비에 관심 가질 시기지만 남편이 너무 인테리어에 무관심하다 생각 말길.

내가 나서는 순간, 이런 방이 튀어나옴.

#응답할래? 2018?
#진정 시대를 앞서가는 인테리어를 원하는가
#벽에 붙일 글러브 3개 대기 중




룩셈부르크


나의 모든 아이디에 boxer가 들어간다. 자취방에 글러브를 걸어놓은 정도의 오타쿠인데 왜 안 그러겠는가. 그런데 와이프의 모든 아이디엔 luxem이 들어간다. 심지어 처제와 장인어른의 아이디도 luxem으로 시작한다. 우리 처가 식구들이 luxem으로 시작하는 모든 아이디를 아도치고 있는 셈이다. 아, 아도치다라니, 배운 사람이. 우리 처가 식구들이 luxem으로 시작하는 모든 아이디를 알박기 하고 있다. 아, 알박기도 저렴하다. 아무튼 나의 boxing만큼 처가 식구들이 애정을 가진 나라가 luxem, 룩셈부르크다.  


와이프가 고등학교 다닐 때 룩셈부르크에서 3년을 살았다. 독일 생활도 했지만 처가 식구들은 룩셈부르크 시절 이야기를 더 많이 한다. 아마 독일 살 땐 어린 막내도 있었고 첫 번째 해외 생활이라 힘든 점도 많았을 텐데, 두 번째 룩셈부르크 시절엔 유럽 생활에 적응도 되었고 아이들도 중고등학교 다닐 때라 행복한 기억들만 가득하셨던 것 같다. TV나 책에서 룩셈부르크 관련 내용이 나오면 모두 입꼬리가 귀까지 걸리며 이야기 꽃을 피운다.


베네룩스 3국의 '룩'이 룩셈부르크고 1인당 GDP가 10만 불이 넘어가서 압도적으로 1위인 나라 정도밖에 몰랐다. 하지만 데릴사위 5년을 하고 나니, 나도 마치 룩셈부르크에 살았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룩셈 사진을 보다 보면 용두산 공원, 초량, 감천 느낌도 좀 나고. 그래서 오늘 와이프와 함께 아주 친숙하게 'A day in Luxembourg'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룩셈부르크 기자를 한 분 만났는데,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5개국어를 하는데, 6번째 언어로 우리말을 유튜브로 독학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수준이 부산에서 갓 올라왔을 때의 내 수준이었다. 6번째 언어를 유튜브로 공부한 사람이 저렇게 막힘없이 술술 말하는게 말이 되는가. 난 영어 30년째인데. 아직 클로리스, 로네펠트, 테라로사도 잘 구분 못하는데.


룩셈부르크에서 감천을 느끼는 아빠와는 달리, 우리 아이들은 luxem 및 외국어에 친숙해지길...


대신 아빠가 luxem2008, luxem2013 아이디는 알박아 놓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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