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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우 Nov 28. 2018

월간 김창우 : 2018년 11월


요즘 나의 일과 중 가장 큰 세 개를 꼽으면, 아이들 등하교시키기, 산책 1만 보 하기, 그리고 책 보기다.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 TV 전 채널을 한 바퀴 돌려본 후 TV에서 미세먼지가 나올 정도로 끼고 살 것 같지만 우리 집 예쁜 Serif TV는 그저 장식품이었다. 그 좋아하는 영화도 보지 않았다. 이번 달엔 책만 봤다. 소파 위에서, 침대 위에서, 식탁 위에서... 엉덩이 붙일 곳만 있으면 그곳이 나의 독서 공간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집 근처에 도서대여점이 생겨 시드니 셀던, 마이클 크라이튼, 존 그리샴, 로빈 쿡 등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던 때를 가뿐히 넘어서서, 이번 달이 역대 가장 많은 책을 읽은 달인 것 같다. 책은 영화처럼 카운팅 하지 않아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20~30권 사이를 본 것 같다. 스스로 '청춘 스케치'의 에단 호크 같다고 생각했다. 내 맘이다.


그중 '문 앞의 야만인들'이라는 야만적인 두께를 자랑하는 책도 포함되어 있다. VC, PE 업계분들 중, 책꽂이에 이 책이 없는 분도 없고 끝까지 읽었다는 분도 없다는 전설의 책. 무려 912페이지다. 그것도 삽화나 여백도 거의 없고, 벽돌만큼 무거워 읽는 자세도 잘 안 나온다.    


그런 책을 숨도 쉬지 않고 다 읽었다.

그만큼 재미있었다는 말은 아니고, 이 책을 다 읽었다는 타이틀이 가지고 싶었다.

현재 화폐가치로 따졌을 때 70~80조 정도 될 것 같은 RJR 네비스코란 회사를 KKR이 1987년에 인수합병에 성공하며 사모펀드계의 제왕으로 등극한 스토리다. 사실 필요 없는 내용도 많다. 등장인물도 너무 많다. 업계 사람들에겐 딜 개요 간략히 설명해주고 SPA, SHA 첨부했다면 훨씬 각광받았을 텐데.

 
어쨌든 중요한 것은, 난 이제 이 책을 다 읽은 사람이 되었다. 조금 더 훌륭한 사람이 된 것 같다.

'문 앞의 야만인들'은 워밍업에 불과했다. 드디어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무려 성경 통독을 시작했다. 하루에 20분 정도씩 읽고 있다. 한 달 반 정도가 되었는데 '창세기 - 출애굽기 - 레위기 - 민수기 - 신명기'까지 끝냈다. 나 모세오경을 정독한 사람이 되었다. 이 페이스로 가면 내년 여름쯤엔 끝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어린 시절 표준전과 이후로 가독성이 가장 떨어지는 책이지만, 천천히 가서 끝을 보는 것이 내 특기이기 때문에 완독까지 한 번 가보자.



산책


산책을 할 때 반려견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개를 워낙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귀여운 개들이 지나다니면 아빠 미소를 지어 보내기도 한다. 주인 말고 개에게. 그래도 불편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다. 큰 개들도 많이 지나다닌다. 요즘은 대부분 목줄을 하고 다니긴 하지만 산책로가 좌우로 3m 정도밖에 안되는데, 개들의 목줄은 5m 정도 되게 길게 늘어놓고 다닌다.


문제는 주인들이 하나같이 스마트폰만 쳐다보며 지나간다. 저 시커멓고 곰 만한 개들이 나에게 쓰윽 다가와도 주인들은 모른다. 산책할 때 내 모습은 롱코트에 모자 그리고 마스크까지 쓰고 있다 보니, 개들이 충분히 시비를 걸 만한 몽타주다. 개들이 공격적으로 다가올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며칠 전에도 미드를 보는지 이어폰까지 끼고 스마트폰에 빠진 주인이 목줄을 5m로 늘여놓고 지나가고 있었다. 검은색 중형견이었다. 천천히 그 녀석이 내게 다가오더니, 느닷없이 으르렁거리는 게 아닌가. 난 깜짝 놀라서 옆 잔디밭으로 점프했다. 맞짱 타이밍에서 화들짝 도망친 것 같아서 쪽팔렸다. 주인 놈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고 스마트폰을 보며 계속 걸어가고 있었다. 아놔, 죽여 말어.


사람이 개를 사람처럼 대하면 개가 사람을 개처럼 대한다는데, 지가 사람인 줄 알고 나보고 산책할 때 묵줄 하고 다니라고 으르렁한 것 같아 더 기분이 나빴다.


그래, 안 물렸으니 오늘은 감사히 생각하고 봐주자. 대신 주인과 개를 잘 봐 놨다. 다시 마주치기만 해라. 그래도 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겠다. 마음은 하나뿐이니. 대신, 우리 몸의 뼈는 206개니 뼈를 아프게 해 주겠다. 하나의 마음과 205개의 뼈로 남은 인생 살고 싶으면, 다시 으르렁대라.



미세먼지


새벽에 창문 밖을 봤더니 눈 앞의 산이 보이지 않았다.


아, 캄캄한 밤이구나. 이 어둠 속에서는 부엉이도 쉽지 않지. 그런데 옆 단지 아파트도 잘 보이지 않았다. 공기청정기를 틀었다. 잠시 윙윙거리며 공기질을 파악하더니 나타낸 숫자가 미세먼지 999, 초미세먼지 350이었다. 에이, 이 사람아. 잘 자고 있는 새벽에 깨워서 일 시킨 건 미안한데, 그래도 이렇게 성의 없는 숫자를 던지면 안 되지. 미세먼지가 999면 사람 죽어.


서둘러 애들 방에 갔더니 다행히 공기청정기를 틀어 놓고 자고 있었다. 지난번에 공기청정기를 무리해서 두 대 샀던 것은 내 인생에 손꼽히는 굿 초이스였다.


999가 미안하면 빨리 50~100 사이에서 제 자리를 찾길 바랬는데, 한참 있더니 바뀐 숫자가 겨우 998. 그리고 997, 996, 995. 에이, 그 숫자면 사람 죽는다니까.


우리 집 실내는 두 대의 기계가 주간 52시간 근무시간도 가볍게 넘겨가며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바깥공기는 정말 심각하다. 하루 두 번 산책을 주업으로 삼고 있는 내게 치명적이다. 마스크를 하고 산책을 해도 코가 막히고 가래가 생기고 눈이 따가웠다. 공기의 침투를 허용치 않는 수경을 쓰고, 미역으로 마스크를 만들어서 쓰고 나가야 하나.


이럴 땐 항상 궁금하다. 이런 미세먼지 속에서도 마스크 끼고 운동을 하는 게 나은지, 아니면 운동하러 나가지 않는 게 나은지. 슈바이처 선생님이 나오셔서 그 답을 알려주셨으면.



솜털


온 가족이 날 둘러쌌다.


“와, 여기 머리 나기 시작했다.”


이 한 마디에 온 가족이 밥을 먹다 말고 내 뒤통수 앞에 옹기종기 모였다. 드디어 머리에 솜털들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방사선 치료로 머리가 빠진 지 두 달 반 만이다.


“어 진짜네. 여기도 나기 시작했어”


우리 집 식탁은 갑자기 활기로 가득 찼다. 지우는 머리가 다시 나는 의미를 아는지 기분 좋은 딸 미소를 짓고 있었고, 지아는 지금이 더 예쁘다고 머리가 안 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수염은 천장에 닿을 때까지 기르라면서 일관성이 없잖아.


내 머리의 솜털들은 우리 집의 네 잎 클로버가 되었다. 동시에 여러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 아들 낳고 싶은 분들, 건강해지고 싶은 분들, 모두 와서 다 만지세요. 머리카락으로 가족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안겨준 것 같아 나도 좋구나.



지우의 글


지우가 가끔 글을 써준다. 이 글은 처음으로 컴퓨터로 썼다. 그래, 원고지에 쓰란 말은 안 할게.


<제목 : 늑대 이야기>


안녕? 난 늑대라고 해. 보통 이야기에선 늑대들이 악역으로 나오지. 하지만 우리 늑대 입장으로 들어보면 상황이 달라질 걸? 저번에는 “늑대가 들려주는 아기 돼지 삼 형제” 이야기를 들려줬잖아. 이번엔 “늑대가 들려주는 일곱 마리 아기 염소” 이야기를 들려줄 거야. 늑대가 악역으로 나오는 동화는 엄청 많아~‘아기 돼지 삼 형제’, ‘늑대와 일곱 마리 아기 염소', '빨간 모자’ 등. 아무튼 이제 이야기를 시작할게.


이 날은 내가 3째 아기돼지 때문에 감옥에 갔다가 풀려난 날이야. 난 엄청 신이 나서 집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어. 그런데 가만있자! 오늘이 친구 결혼식 날이였어. 난 부리나케 집으로 뛰어갔어. 집에 도착하자 마자 바로 옷장을 열었지. 그런데 입을 옷이 없는 거야~! 옷 잘 만들기로 소문난 일곱 마리 아기염소 네 집으로 뛰어갔지. 일곱 마리 아기염소 네 집에 가려면 산 한 고개를 넘어야 했어. 나는 헉헉거리며 간신히 도착했지. 그런데 그때 엄마 염소가 시장바구니를 들고 밖으로 나가는 거야! 난 엄마 염소가 눈에 안 보일 때까지 숨어서 기다렸지. 왜냐고? 엄마 염소가 날 보면 바로 내쫓을게 뻔했으니까. 산 한 고개까지 걸어왔는데 이대로 가면 안되지!


난 엄마 염소가 눈에 안보이자 곧바로 아기 염소들이 있는 집으로 갔어. “똑똑똑! 아기염소들아! 엄마야~ 문 좀 열어줘~” 이때 내가 왜 엄마라고 했냐면 늑대라고 하면 문을 안 열어 줄게 뻔하니까! 그러자 아기염소들이 “어? 이 목소린 우리 엄마 목소리가 아닌데?”라고 말했지. 그때 내 손목시계에서 알람이 울렸어! 이 알람은 10분 후에 이제 결혼식이 시작한다는 뜻이야! (난 무슨 약속이 있을 땐 안 잊어버릴려고 10분 전에 알람이 울리도록 맞춰 놓아.)


난 바쁜 나머지 내 까만 손을 그만 문틈으로 보여주고 말았어! 이젠 아기염소들도 내가 늑대인걸 알게 되었지. “이 나쁜 늑대야! 우리 집엔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마!” 아기염소들은 이렇게 소리쳤지. 난 그냥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친구 결혼식에 이런 허름한 옷을 입고 갈 수는 없잖아. 그래서 난 포기하지 않았지. 내 까만 손에 밀가루도 묻히고 목소리도 가다듬었어. 이제 준비는 다 끝난 거 같았지. 난 다시 일곱 마리 아기염소 네 집에 문을 똑똑똑! 하고 두드렸어. “똑똑똑! 아기 염소들아! 엄마야~ 문 좀 열어줄래?” 그러자 이번엔 아기염소들이 믿는 거 같았지. 그래서 문을 열려고 할 때 지나가던 동물들이 또 우리 할머니 욕을 했지. 그러자 난 순간적으로 나쁜 늑대로 변해서 일곱 마리 아기염소들 집에 들어가 몽땅 잡아먹었지. 첫째부터 여섯째까지 말이야. 난 여섯째까지 먹고 정신을 차렸어. 정신을 차려보니 엉망진창인 집에 있는거야. 난 그 집을 치워주고 싶었지만 그땐 엄청 졸렸어. 그래서 밖에 나가 잠깐 잠을 잤지. 그런데 뭔가 찜찜한 마음이 들었어. 한참 자다 일어나 보니 벌써 저녁이었지. 아쉽게 친구 결혼식은 못갔어.


나는 이제 결혼식도 끝났으니 집으로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난 집으로 갈려고 일어났지. 그런데 몸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우물가에 빠졌지. 그때 일곱 마리 아기염소와 아기염소들의 엄마 목소리가 들렸어. “야호~! 늑대가 물에 빠졌다! 만세~”


난 엄청 슬펐지. 지금 내 글을 읽는 너라면 나에게 예쁜 옷 한 벌 만큼은 줄 수 있겠지?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이 글을 쓴 손지우라고 합니다. 이 글은 원래 있는 책 ‘늑대가 들려주는 아기 돼지 삼 형제 이야기’를 읽고 비슷하게 만든 책입니다.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는 늑대는 항상 악역으로 나오니까 이번엔 늑대에 입장으로 생각해 보면 좋을 거 같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손지우의 책을 많이 봐주세요. 감사합니다.



지아의 멘트


지아의 깨알 같은 멘트들이 쌓이고 있다.


#1

외할아버지가 지아에게 무언가를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자 지아가 대답했다.

“할아버지 생각도 있고 내 생각도 있는데, 왜 할아버지 생각만 이야기해요?”


그때, 듣고 계시던 외할머니가 한 마디 하셨다.

“우리 지아가 내가 40년간 하고 싶던 말을 대신해주네.”


#2

지아가 친구와 놀고 있었다. 각자 아빠에 대해 이야기 중이었다.

“우리 아빠는 학교에 갔어. 학교에서 일해.” 그 친구의 아버지는 대학교수셨다.

그리고 그 친구가 지아에게 너희 아버지는 뭐하는지 물었다. 지아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응, 우리 아빠는 세브란스 다녀.”

흠, 세브란스라.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내가 세브란스를 좀 많이 다니긴 했지. 그래도 뭔가 의사 같고 좋네. 굳이 수정해주지 않을게. 좋은 답변이었어.


지아, 나이스~!


기념일


우리 딸들아,


나중에 커서 남자를 사귈 때, 기념일 날 "남자 친구 자유이용권 3회" 따위의 쿠폰을 오려 주는 남자는 절대 만나지 말거라. 내 경험 상 가장 성의가 없는 놈들이다. 돈이 없으면 이태원 길거리 리어카에서 귀걸이라도 좋으니 만져지는 것을 주는 사람을 만나라.


물론, 프러포즈를 결혼 일주일 전 편지 한 장으로 대신하고 12년째 살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크리스마스 선물 잘 고민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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