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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우 Feb 28. 2019

월간 김창우 : 2019년 2월

마감


취침시간이 빨라진 나, 자려고 불 다 끄고 누웠는데

아 덴장, 2월 28일 마지막 날이네. 월간 김창우가 떠올랐다. 깜빡하고 있었다. 귀찮은데 내일 할까 하다가, 이게 뭐라고 내가 정한 마감까지 어기나 싶었다. 다행히 2월이 한 시간 남았다. 


와이프가 이 시간에 컴퓨터를 켜는 걸 싫어하는데, '월간 김창우' 제목을 보더니 그냥 간다. 쓰자, 까잇거.



금수저


난 금수저인가 아닌가. 


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심지어 말투에서도 럭셔리함이 묻어 나오지만, 사실 부자로 살아본 적이 없다. 한 때 부자였거나, 지금 부자이거나도 아니고 시종일관 부자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우리 집이 가난한 것은 분명 아니었지만, 확실히 평균 이상의 부자였던 적은 없다. 깜짝 놀라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누가 봐도 부잣집 외동아들 귀티를 폴폴 풍기는 내가 부자가 아니었다니. 


울 아버지, 어머니는 돈에 큰 욕심이 없으셨다. 게다가 운도 지지리도 없었다. 인생에 한 번쯤은 얻어걸려서라도 월급 이외의 돈을 벌 기회가 있는데, 우리 가족에겐 예외였다. 부산에 주변 아파트 값이 몇 배가 오를 때 우리 집은 20년째 같은 값을 유지하고 있다. 미친 일관성이다. 재물복이 항상 우리 주위를 맴돌았지만, 그때마다 우리를 약 올리며 다른 사람들에게 안겼다. 


커서도 마찬가지다. 삼성전자 - 외국계 기업 - Venture Capital - 사모펀드로 이어지는 커리어 내내 월급은 남들 받는 만큼은 벌었지만, 내 통장 잔고는 언제나 초등학생 세뱃돈 통장 수준이었다. 일생에 딱 한 번 월급 이상을 꿈꿨다가, 잔인한 세상으로부터 귀싸대기를 맞으며 매몰찬 교훈을 얻기도 했다. 내 삶은 불로소득이나 플러스알파가 끼어들 수 없도록 타이트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것을 한 순간 망각했었다. 


현재 자본시장의 끝판왕인 사모펀드 업계에서 수년째 일하면서도, 소위 말하는 대박의 기회들은 항상 날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하지만 난 단 한 번도 아쉽지 않았다. 이번 생에 플러스알파는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인생이니. 주변에 성공신화를 써 내려가는 업계 선후배들을 볼 때, 시샘보다는 진심 어린 박수가 나왔다. 그들이 부자가 되면 그냥 나도 좋았다. 


이는 부모님의 영향이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부모님이 돈에 아쉬워하시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분들은 돈 많은 사람들을 부러워하지도 않으셨고, 돈 많은 사람들 앞에서 기죽지도 않으셨다. 사람의 멋과 매력은 돈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한평생 몸소 가르쳐주셨다. 그 결과 아버지는 여전히 내겐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세고 멋진 분이고, 어머니는 그분이 천사가 안되셨으면 과연 누가 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마음씨가 고운 분으로 남아 있다. 그거면 족하다.  


그래서 "더! 더!"를 외치는 세상은 왠지 불편하다. 


잔고는 초등학생이지만, 

사랑하는 아내, 귀여운 두 딸, 다시 찾은 건강, 날 위해 기도해준 사람들, 마지막으로 내 마음속 영웅 부모님까지

무엇이 더 필요하리오. 


부모님으로부터 이 넉넉한 레거시를 물려받은 난, 그래서 금수저다. 



묘비


우린 대부분 죽음이란 것을 생각하지 않고 산다.


마치 우리가 영원히 살 것처럼,

우리의 젊음이 끝없이 지속될 것처럼,

우리 아이들의 어린 시절이 계속될 것처럼,

재미도, 의미도 없는 "일"이란 것만 하면서 하루하루 그냥 살아간다. 


물론 일은 필요하다. 

다만 내가 한 발짝 떨어져서 보니, 대부분 필요 이상의 시간, 감정, 건강을 소모하며 일을 하고 있다.

일만 하려고 태어난 인생은 분명 아닐 텐데. 

나도 그랬다. 아프기 전까진.


인생에 죽음이라는 상수를 넣고 보면, 많은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우린 모두 죽는다.  

우리 가족들의 남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울 얼굴 모습은 지금 이 순간이다. 

그러니 후회 없이, 아끼지 말고 실컷 보자. 그 말을 하고 싶었다.


프리챌 시절이었나, 싸이월드 시절이었나.

자신의 묘비명을 적어 보기가 유행했었는데, 이제야 생각해 본다.

며칠 전에 방시혁도 서울대 졸업식 축사에서 자신의 묘비명을 언급했었다. 나름 비슷한 세대 맞구나. 


훗날 내 묘비명에는 이렇게 적히길 희망한다.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의 웃는 모습을 실컷 보다가

 나이가 차서 죽었다."



출격


예전에 업계 선배 한 명이 내게 물었다.

"창우야, 넌 나중에 뭘 하고 싶냐?"


난 솔직히 말씀드렸다.

"강의를 하면서 살고 싶어요. 글도 쓰고. 돈이 좀 남으면 복싱체육관도 하고."


예상 범위를 벗어난 뜻밖의 대답이라, 그 선배는 적잖이 당황하셨다. 

"상장사 대표를 한 번 해보고 싶어요" "3,000억짜리 블라인드 펀드 대표펀드매니저가 되고 싶어요" 정도의 대답을 할 걸 그랬나. 보통 꿈 대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어야 하는데, 이 대화는 선배의 "그래?" 한 마디로 끝이 났다.


난 걷고 있는 커리어를 쭈욱 걸어갔을 때 나오는 꿈들에는 큰 매력을 못 느끼는 것 같다. 천직이 아닌 건가. 그래도 내 직업을 아주 좋아하긴 하는데, 내 꿈만은 항상 다른 곳에서 찾고 있다.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와이프가 이런 말을 했다. 

"돈은 내가 벌 테니, 이제 오빠는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내가 진짜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할 때는, 그건 진심이었다. 진심에는 응답을 해야지. 그 말에 힘을 얻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을 떠올렸다. 역시 강의, 글쓰기 등이 생각났다. 


글쓰기는 언제라도 할 수 있으니 잠시 후순위로 미뤄두고 강의를 떠올려 보았다. 내가 강의를 하고 싶은 이유가 몇 가지 있는데, 우선 난 앞에 나가서 발표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 듣는 사람들의 선한 눈빛과 잔잔한 웃음은 내게 엄청난 에너지를 준다.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힘이 더 나는 스타일이다. 10명보다는 50명, 50명보다는 100명이 좋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내가 무슨 컨텐츠로, 어디서 강의를 할 수 있을까. 막상 하려니 부족한 것 투성이었다.


하지만 난 부족한 생각은 오래 하지 않도록도 설계되어 있다. 콜드 콜, 콜드 메일은 나의 전공 분야이다. 큰 고민 없이 이력서를 업데이트하고, 자기소개서를 쓰고, 임용 지원서를 다운받아서 여기저기 학교들에 콜드 메일을 보냈다. 


그때부터 많은 우연들과 고마운 사람들이 견우직녀에게 오작교를 만들어 주 듯 나타나더니,

다음 주부터 모교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한 학기가 될지, 더 길게 이어갈지는 해봐야 알겠지만, 

세상으로 다시 나아가는 나의 첫걸음은 이러했으면 좋겠다는 나의 기도를, 

말도 안 되게 과분하게 들어주신 그분께 감사드린다.


와이프야, 고생했다. 이제 하고 싶은거 다해.

난 네가 시킨대로 돈은 좀 더 천천히 벌고, 하고 싶은 거 먼저 할게. 우리 애들도 금수저로 키울게.


두둥! 저 드디어 출격합니다. 다시 일어서는데 8개월 걸렸네요. 

그동안 응원과 기도를 해주신 모든 분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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