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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우 Mar 29. 2019

월간 김창우 : 2019년 3월

우리 교수님


내가 동아리를 만든 스토리는 다른 글에서 한 번 추억한 적이 있다.


4학년 1학기 복학을 앞두고, 남들은 복학 준비를 CPA 학원, 영어 학원에서 할 때, 난 마포 라이온 복싱체육관에서 했다. 지하에 있어 환기가 안돼 땀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르는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난 주 6일 두 시간씩 미친 듯이 운동했다. 사람이 적당히 바빠야 하는데, 난 운동 후 링 코너에 걸터앉아 세월아 네월아 시간을 혼자 보내곤 했다. 그러다 생뚱맞게 동아리나 한 번 만들어볼까, 생각이 들었다. 모든 종목에서 전통의 스포츠 강호인 우리 학교에 그때까지 복싱 동아리는 없었다. 무려 4학년을 앞둔 놈이 정말 공부는 하기 싫었나 보다. 그래서 학교 홈페이지에 배너 하나를 만들어 띄웠다. “연세대학교 복싱 동아리 부원 모집”. 그렇게 Yonsei Boxer는 시작되었다.


동아리를 만들려면 지도교수가 있어야 했다. 체육학과 교수님들 중 복싱에 관심 가져주실 만한 분이 없을까 찾고 있던 중, 운명처럼 학교 앞 식당에 밥 먹으러 갔다가, 버려져있는 신문에서 치과의사 복서로 유명하신 세브란스 최병재 교수님의 기사를 보게 되었다. 난 신문을 접고 숟가락을 던진 다음, 곧장 나의 애마 스쿠터를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 치과병동에 교수님을 무작정 찾아갔다. 간호사분께서 어떻게 왔는지 물어서, 이빨이 아픈데 꼭 최병재 교수님께 진료를 받고 싶다고 말했다. 참고로 교수님은 소아치과 담당이셨다. 그렇게 충치 치료하러 엄마 손잡고 온 아이들 틈에서 한 시간을 기다려 내 차례가 되었다.


교수님은 아이가 아니라 다 큰 놈이 들어오자 순간 놀라셨다. 어떤 일로 찾아왔는지 조심스레 물어보신다. "교수님, 사실 이빨 때문에 온건 아니고요, 제가 복싱 동아리를 만들 테니 지도교수가 되어주세요" 그 말에 교수님은 환한 미소와 함께 쿨하게 "만들어지면 연락해요"라며 본인의 직통 번호를 친절히 적어주셨다. 교수님은 핸드폰 따위는 가지고 다니지 않으시던 쿨남이셨다.


그렇게 만난 교수님을 모신 지 18년째다.


그렇게 젊고 멋지고, 링 위에서도 어느 학생들에게도 안 밀리시던 최병재 교수님이 지난달 정년퇴임을 하셨다. 퇴임식에서 오래간만에 뵌 교수님은 여전히 복싱을 하시며 60대라곤 믿기 힘들 정도로 탄탄한 몸과 눈빛을 가지고 계셨다. 그리고 여전히 핸드폰 따위는 안 가지고 다니셨다. 한 사람의 일생이 이렇게 쿨 할 수 있다니. 마지막까지 멋져주셔서 감사드린다.



승계


그렇게 소아치과 진료실에서 의기투합했던 두 남자의 운명은 묘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교수님이 학교를 떠나시던 그 날, 바통터치 하 듯 난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감사


강의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몸이 회복세에 접어든 지난 12월이었다. 그리고 3개월이 흐른 후 난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이 가끔 인생에서 벌어진다. 작년의 수술처럼. 좋은 것만 주시지도, 그렇다고 나쁜 것만 주시지도 않는다. 그래서 어떤 것이든 주시는 대로 그저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강의


강의 4주 차가 끝났다.


시간 장소를 물어보시는 분들이 있다. 물어보는 사람 치고 오는 사람은 없지만,

매주 목요일 4~7시, 연세대 경영관 104호에서 '벤처캐피탈'이란 과목을 맡고 있다.


내가 집에서 바깥에서 일어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 스타일은 아니라,

와이프가 오늘 강의 어땠는지 물어보면, "좋았어" "재밌었어"정도로 끝냈던 것 같다.


53명의 3~4학년 생들.

학생들이 모두 노트북이 있어서 고개를 푹 숙이면 수업 끝나고야 눈을 마주칠 수 있다는 말도 들었다.

요즘 학생들은 우리 때랑 많이 달라서 조심할 것들이 많다는 충고들을 여기저기서 해주셨다.


그런데 내가 4주 동안 경험한 요즘 학생들, 90년대 생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순수하고 선한 눈빛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얻는다. 오랜만에 심장의 바운스를 느낀다.

몇몇 학생들에게는 벌써 엄청난 미래가 보인다. 몇 마디 하지 않았지만 느껴진다. 이게 아우라구나.

목요일 수업이 끝나면 벌써 다음 수업이 기다려진다.

53명 모두에게 적어도 각기 다른 느낌표 하나씩은 줄 수 있는 선배가 되고 싶다.


화이트데이 때 츄파춥스 53개를 사려다, 두 번째 시간에 오바일 것 같아서 그건 하지 않았다.

뭐든 안 한 행동들이 잘했다 싶을 때가 많아지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다.

마지막 날 하와이 패밀리 53권이나 돌릴까.  



하와이


나의 투병생활 마침표는 하와이로 찍고 싶었다.

하와이 예약해놓고 수술 날짜가 잡히는 바람에 항공, 숙박 등 취소 수수료도 좀 날렸는데,

아플 때도, 괜찮아지면 하와이부터 다시 꼭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매주 목요일 수업이다 보니, 목요일이 공휴일인 날을 찾아봤다. 현충일이 목요일이었다.

후다닥 광 클릭질을 시작했다. 이젠 전문가답게 일사천리로.


드디어 4번째 하와이 패밀리 출격한다.

오아후, 마우이, 빅아일랜드에 이어 이번에는 4번째 섬 카우아이로!

남은 두 달 컨디션 100%까지 끌어올리는 일만 남았다. 록키가 드라곤과의 시합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바이블


작년 10월 경에 시작한 성경 통독 모임. 아프면 무리하지 않고 빠진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모임에 나갈 시간만 되면 신기하게 아픈 것도 멈췄다. 그래서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다음 주면 구약을 끝낸다. 가끔 스스로를 칭찬하고 싶을 때가 있다.



생일


1999년 모토로라 PCS로 지영이에게 사귀자는 문자를 보낸 이후, 20년이 흘렀다.

그리고 3월 30일, 생일 축하한다.


생일날 맞춰서 브런치 글 올린다.

생일 축하 나부터 시작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받는 하루가 되라고.

이런 말 항상 쑥스럽지만 고맙고, 사랑한다.


그렇다고 20주년인데 글로 때운다고 생각하지 말길.

장난 삼아 츄파춥스 이런 거 준비했을 거라 생각도 말길.


금붙이 하나 있다.



3월의 사진들


교수님, 원래 정년 퇴임은 할아버지들이 하는 거 아닌가요? 퇴임사에서 권투 동아리에 감사한다고 하셨다. 18년간 복싱이라 말씀드렸는데, 끝까지 권투라고 하셨다.


교수님과 그렇게 시작했던 동아리가 18년 후 이렇게 되었다. 이제 아는 얼굴도 별로 없다. 남녀 비율 실화인가.


9개월 만에 출격하며 구두를 신었다. 역시 좋은 구두는 발이 아프다. 구두도 놀라고 발바닥도 놀랐다.

 

그래서 그 다음 주부터는 새털 같은 Allbirds로. 양복바지가 난생처음으로 발목양말이란 놈을 보고 놀랬다.


잠은 재워줄게. 조식은 셀프다. (아동학대 아님)


그건 고양이들이나 하는 짓이야. (아동학대 진짜 아님)


자꾸 이러면 이제 아빠 전화기 안 준다.


마지막 경고다. 한 번만 더 이러면 고등학교까지 핸드폰 안 사준다.


그렇다고 개기름 번지르르하게 이 정도의 클로즈업은 좀... 차라리 삐에로가 낫네.


이게 나의 공식 직함인데 너무 길다. 그냥 손창우 작가 하고 싶다.


출입문이 앞에 있어서 도망칠 수 없다. 학교가 이러면 안 된다. 빡빡하게.


이 핸드폰으로 사귀자는 문자 보낸 후, 올해가 20년째. 걸면 걸리는 걸리버 아님.


모두의 건강한 4월을 위하여. 그래 놓고 난 술 끊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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