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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우 Jul 17. 2019

월간 김창우 : 2019년 7월 호외

2018.10.10


그 날은 최악의 하루였다. 2018년 10월 10일쯤이었다. 부산에서 류지훈이 올라와서 둘이서 워커힐 호텔에서 자고 난 다음 날이었다. 오랜만에 친구 만나서 많이 걷고 쉼 없이 떠들고 수학여행 온 고삐리들처럼 편의점에서 수준 낮은 과자들 모조리 사 와서 까먹다 잠들었다. 다음 날 조식 뷔페 닫기 직전에 일어나, 마치 모태 뚱뚱으로 태어나 평생 단 한 번도 살이 빠진 적이 없는 사람처럼 게걸스레 몇 판 먹었더니, 오후부터 몸에서 이런저런 신호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과 몇 시간 만에 투병생활 전체에서 손꼽을 만큼 최악의 몸 상태가 되어 버렸다. 출근한 지영이에게 집으로 와 달라고 전화한 것은 그 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더러운 이야기는 잠시 접어 두고, 그날 밤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하루 20분 정도씩 읽으면 대략 10개월 정도면 성경 한 권을 완독 할 수 있는 계산이 나왔다. 2019년 여름이면 끝나겠구나. 하지만 그 당시엔 2019년 여름이 그려지지 않았다. 나에게 다음 여름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고백컨데, 마음이 가장 약해졌을 땐 다음 여름이 나에게 주어질까조차 확신이 들지 않았다.


난 여러 번 이야기한 적 있지만 총명함, 탁월함, 번뜩임, 순발력 등의 재능은 없다. 대신 꾸준함과 끈기를 바탕으로 아무 생각 없이 장기 레이스를 끌고 가는 능력으로 부족한 부분을 퉁치며 살아왔다. 이번에도 그랬다. 멀리 생각하지 않고 눈 앞의 몇 페이지씩 읽어나갔다.

 

2019년 여름이 왔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요한계시록 22장 21절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으로 끝을 냈다. 절대 의도한 것은 아닌데, 성경 1 회독을 끝낸 날짜가 놀랍게도 7월 17일이다.




2019.07.17


기억 폴더에선 비록 오래 전의 일이라도 최근에 다시 한번 꺼내보면 수정한 날짜가 바뀌어 젤 윗 줄에 정렬되어 버린다. 그래서 별다른 되새김 포인트가 없는 평창 올림픽은 작년에 열렸었다는 게 믿기지 않고, 17년 전의 2002년 월드컵은 작년의 일처럼 생생하다. 친구 박정효 같은 경우엔, 지나간 기억 파일은 절대 열어보지 않아서 폴더 제일 밑에 깔려있다가 용량 문제로 휴지통으로 버려진다. 그래서 어릴 적 기억은 내게 의존한다. 내가 초등학교 때 키가 더 컸다고 뻥쳐도 믿을 것 같다.


2018.07.17.

1년 전 오늘, 수술을 했다. 1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당시 내게 벌어진 일들은 다시 꺼내보지 않았기에 마치 10년 전의 일처럼 멀게 느껴진다. 가끔 와이프에게 작년의 내 모습에 대해서 물어보는데, 전혀 공감이 되질 않았다. 정말 그랬던가. 당시 아픈 기억들은 이미 내 기억 폴더에서 사라졌다.


7월 17일은 2018년 수술한 날이 아니라, 2019년 성경 완독 한 날로 새로 저장했다.


2018.7.17 수술 직전의 모습. 제목 '쫄지 않았다'


From now on,

문자를 보내면 전화달라 하고, 전화를 하면 문자로 이야기하자는 내 맘 같지 않는 세상에서

나이키를 입고도 'You Can't Do It!' 하며 살아가는 지친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7월17일은 생각도 선해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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