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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우 Nov 17. 2020

네 번째 하와이 : 카우아이 1일 차

다녀온지 1년 반만에 기억을 짜내 써보는, 네 번째 하와이 1일차 이야기 (2019. 6. 30)




역시 밤 비행기는 쉽지 않다. 


밤 9시 20분에 출발한 비행기는 한국시간 새벽 5시 45분, 현지시각 아침 10시 45분에 도착이었다. 이건 20년 차 항공기 승무원이 와도 적응하기 힘든 시간대다. 빠듯한 이코노미 4자리에서 애들 잘 공간을 만들어 주느라 어른 두 명은 양 끝자리에서 새우가 되었다. 척추들이 놀라서 나중에 허리도 잘 안 펴졌다. 여러 번의 하와이 여행 공통점 중 하나는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몇 시간 동안 사진들이 약속한 듯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이번엔 럭셔리하게 대한항공을 탔음에도 도착지에서의 거지꼴은 변함없었다. 빨리 숙소 가서 짐 풀고 샤워를 하고 싶지만 아직 멀었다. 이번 일정은 호놀룰루 공항에서 나오지 않고 대기하다가 오후 2시 10분 카우아이 비행기로 갈아타는 것이었다. 이 시간 동안 내 몸속에선 여행의 기대감과 비행의 피로감이 패싸움을 벌인다. 아무나 이겨라, 누가 이기건 내가 이기는 거니까.


밤 비행기에서 내리면 둘 다 20대의 얼굴을 하고 있다.
공항에서 사 먹은 Doritos 불닭볶음면 버전
다시 12살, 7살 얼굴을 회복하고, 하루 max 2시간 정도만 허락되는 '사이좋은 자매 time'


자 됐고, 밥이나 먹읍시다. 


호놀룰루 공항의 식당가로 향했다. 내 코는 캘리포니아 피자 키친과 버거킹 앞에서 킁킁거렸지만, 밥순이 지아를 위해 chewmein express로 향했다. 그래, 첫 끼니는 밥을 먹여 줄 테니 남은 11일간은 아빠 엄마가 먹고 싶은 거 잔뜩 먹을 수 있도록 협조 요망합니다.


만족도 C+ 정도의 점심을 먹고, 카우아이행을 위해 국내선 게이트로 터벅터벅 이동하고 있었는데, 발에 쇠고랑을 찬 사람이 지나간다. 이건 뭐지? 잠이 부족해 헛것을 보고 있나? 쇠고랑 무엇? 다시 봐도 실화였다. 분명 쇠고랑을 차고 있다. 이동 중인 죄수이거나, 핵인싸이거나, 해시태그 #패션발찌로 검색하면 저 사람 나올까.


하와이안 에어라인 국내선을 30분 정도 타고 드디어 네 번째 하와이섬 카우아이에 도착했다. 이미 아름다운 하와이에서도 정원의 섬으로 불리며 원탑 자연경관을 뽐낸다는 카우아이. 덥고 습한 공기를 타고 열대 우림의 향기가 걸쭉하게 느껴졌다. 별 특징 없이 김해공항 같은 느낌의 호놀룰루 공항, 아기자기하던 마우이 카훌루이 공항, 이게 진짜 공항 맞나 싶던 빅아일랜드의 코나 공항에 이어, 네 번째로 도착한 카우아이의 리후에 공항은 내리자마자 피톤치드 방울들이 여기저기서 팡팡 터지고 있는 듯 상쾌했다.


렌터카 찾으러 갑시다.


언제나 제일 먼저 치르는 의식, 렌터카 픽업 시간이 돌아왔다. 


셔틀버스를 타고 렌터카 집합소로 이동했다. 두 번째 마우이에서 대형 SUV로 폼나게 다녀본 후, 우리 가족의 여행 만족도에 렌터카가 차지하는 비중이 극히 낮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실용적인 중형 세단에서 고르기 시작했다. 비슷한 성능이면 미국차가 확실히 더 싸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의 선택은 Ford의 Taurus였다. 너무 평범한 차라 여행 기분이 안 날까 봐 색상만은 빨간 루즈색으로 골랐다. 미안하다, 차 안에 몇 톤의 모래가 뿌려질 거고, 특히 지아 자리 밑엔 과자랑 쫀드기 부스러기도 제법 쌓일 거야. 그래도 잘해보자, 빨간 루즈야.


하와이 여행의 클리셰가 되어버린 첫 번째 목적지, 코스트코로 향했다. 


와이프는 숙소 냉장고를 주저앉히겠다는 마음으로 능숙하게 먹거리들을 쓸어 담았고, 난 와인 코너로 가서 눈 시음회를 즐겼다. 가장 좋아하는 Mollydooker의 The Boxer 와인이 눈에 띄었다. 국내에선 45,000원에 구입하곤 했는데 여기선 24불이네. 그러고 보니, 언제나 The Boxer가 마이 훼이보릿 와인이라고 말하고 다녔고 선물용으로도 여러 번 샀는데, 정작 내가 마신 적은 한 번도 없구나. 샤또 블라블라도 아니고 몰리두커와 이렇게 밀당을 하다니. 오늘도 한 병 살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패스. 가장 좋아한다면서도 매번 건너뛰는 이 마음은 무엇일까.


디즈니랜드 환상 열차 다음으로 재미있는 하와이 첫날에 타는 코스트코 카트 열차
복싱 성애자의 취향을 저격하는 Mollydooker The Boxer. 또 안 샀다.


자, 드디어 오늘의 하이라이트, 숙소로 가는 시간. 


온몸의 세포가 봉기하며 설렘이 극대화되는 순간이다. 이번 숙소도 에어비앤비를 통해 예약했다. 카우아이에는 다른 섬들에 비해 여행자들이 묶을 도시가 많지 않다. 대부분 북쪽의 Princeville 지역, 남쪽의 Poipu 지역 두 군데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여러 개보다 두 개 중 하나를 고르는 게 더 어렵다. 우리도 막판까지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Princeville 지역에 조금 더 예쁜 집들이 모여 있는데, 날씨는 남쪽 Poipu 지역이 더 좋다고 하고. 하와이 여행은 날씨가 다 해줘야 하는데 예쁜 집도 욕심나고. 계속 남북을 오가며 간을 보던 사이, Princeville 지역에 찜해놨던 숙소 몇 개가 순식간에 not available로 바뀌어 버렸다. 오히려 이런 상황을 바라며 시간을 끌었던 것일까. 그제야 고민할 필요도 없이 냉큼 poipu 지역 숙소를 예약했다. 자, 우리의 선택을 확인하러 가자.


Poipu Beach는 각종 여행 사이트에서 미국 최고의 해변으로 여러 번 선정된 곳이다. 섬 남쪽에 접어들며 poipu road로 진입하는 순간부터, 왜 이곳이 카우아이도, 하와이도 아닌, 미국 최고의 해변으로 꼽혔는지 그 이유가 서서히 눈 앞에 펼쳐졌다. 아, 그런데 써놓고 보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지상 낙원처럼 보이네. MSG는 피해야지. 그 정돈 아니다. 사실 하와이에는 이 정도의 바닷가는 널려있고, poipu beach는 이런 top notch 바닷가들 중 깻잎 반 장 정도만 더 예쁘고 아담하고 정겨운 곳이었다. 


바다도 바다지만 우린 집이 더 중요하다. 잠시 poipu beach를 감상하고 내비게이션을 보니 집까지 2분 남았다. 여행의 하이라이트. 두둥. 이 곳이다.


home, my sweet home
빨간 루즈 Ford Taurus를 포르셰로 보이게 만들어 주는 상쾌한 날씨


도착해서 보니 외관은 기대 이상이었다. 예쁘다기보다는 잘생겼다는 느낌. 집을 배경으로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내부로 들어가 보니 이 또한 만족스러웠다. 잘생겼는데 공부도 잘하는 고등학생 느낌. 사이즈도 생각보다 컸고,  안방에 퀸 사이즈 침대 하나, 아이들 방엔 작은 침대 두 개가 귀엽게 놓여 있었고, 거실과 부엌은 과하지 않게 잘 꾸며져 있었다. 취향 따위는 없는 사람처럼 가족 여행 와서 가성비라는 단어를 꺼내긴 싫지만, 가성비만 놓고 보면 최상급이었다. 여행 횟수에 비례해 숙소 고르는 실력도 확실히 늘었다. 나이스 샷.


거실
어른 방. 중세풍 샹들리에 하나 달아주지.
아이들 방. 분홍분홍 하지 않아서 마음에 듦.
우리 집 주방을 한 번 보여주고 싶네
요런 화장실 두 개


가볍게 저녁을 먹은 후, 포이포 비치로 산책을 나갔다. 

동네는 정겨웠고, 지우는 새로 사준 디지털카메라의 셔터를 마구 눌러댔다. 막 찍어라, 그중 90%는 지울 테니.


카우아이, 이곳이 마음에 들 것 같다.


저녁은 교도소에서 특식으로 나올 것 같은 밥, 빵, 고기 한 덩어리씩
집 앞 풍경
BOXER의 프랑스, 이탈리아어 BOXEUR
집에서 poipu beach 가는 길
poipu beach 밤 버전


오늘 하루,

남양주에서 눈을 떠서, 신촌 가서 강의하고, 비행기 두 번 타고, 렌터카 찾고, 코스트코에서 장 보고, 숙소에 도착해서, 저녁 먹고, 산책하고...


길고 길었던 첫날은 여기까지.




https://brunch.co.kr/@boxerstyle/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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