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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우 Nov 24. 2020

네 번째 하와이 : 카우아이 2일 차

하와이 2일 차 아침은 언제나 늦잠이다. 첫 잠부터 시차 적응 버퍼링 기간 없이 새벽에 눈이 번쩍 떠지는 사람은 반인반닭이거나 인공지능 로봇 보다도 인간미가 없는 사람이다. 하와이는 10박 중 6~7일은 늦잠이 제격이다. 


네 번의 하와이 경험 상, 5시간의 시차를 3일 내로 극복하기 위해선 첫날은 현지시간 오전 11시(한국시간 새벽 6시)에 기상하고, 하루 한 시간씩 일찍 일어나는 게 가장 무난하다. 이런 계산법도 뭔가 머신 러닝스러워 자연스럽지 않네. 그냥 눈 뜨면 일어나는 걸로. 특히 졸리면 매사가 불편하고 날카로워지는 아이들을 동반할 경우엔, 여행지에서 타이트한 일정을 욕심내는 건 가족 관계를 파괴한다. 


올 때마다 경험하지만, 어른 침대는 아담 동양 사이즈인 우리에겐 너무 높아서 내려올 때마다 쿵 소리를 내며 뛰어내려야 한다. 투자업계 용어로 1층 침대도 아니고 2층 침대도 아닌 메자닌 침대. 오늘도 일어나자마자 쿵 한 뒤 날씨부터 체크해야지. 문을 활짝 얼어 본다. 아, 말해 뭐해. 하와이가 하와이 했다. 산뜻한 야외 테이블 위에서 분주히 오가는 하와이 도마뱀 게코들과도 통성명한 후, 아이들 방을 열어 보았다. 천국 가는 길에 하루 호텔에 묶는다면 이런 모습일까. 아이들에겐 여기가 지상 낙원이구나.


여행지에서 아이들보다 먼저 일어나면 억울하다. 더 잘까.


오늘 일정은 따로 없다. 집 앞 Poipu Beach에서 살짝 남은 시차 다 털어내면서 하루 종일 늘어지기. 바닷가 좋아하고 차 타기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최상의 스케줄이다. 어제 먹다 남은 교도소 특식 부스러기들로 아점을 대충 먹고, 아이들은 곰탕에 햇반, 김치 찢어 먹이고 대망의 첫 번째 출정 시간이 돌아왔다. 준비물들을 주섬주섬 챙기다 보니, 선크림이 없다. 캬, 멋지네. 하와이를 여러 번 오다 보니 선크림을 안 챙길 정도로 여행이 일상스러워졌구나. Ross에 들러 흰색 페인트통이 연상되는 크고 찐한 선크림 하나 사서 포이포로 향했다.


It's Poipu Time!


One of the world's best beaches, Poipu Beach
모래사장에 누우면 보이는 하늘. 이날 이후 나의 카톡 프로필 사진.
모래사장에 누우면 보이는 사람들.
모래사장에 누워서 고개를 까딱 들면 보이는 사람들
꺼져줄래. 애들 가린다. 그리고 이것저것 막 주워 먹지 마라. 포동포동 살찌면 잡아 먹힌다.
모래사장에 누워 오른쪽으로 고개를 까딱하면 보이는 생명체
줌 땡겨서 미안. 못생겼구나
물놀이 후의 클리쉐 장면


만족스러운 Poipu와의 첫 만남을 뒤로하고,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며 모래 1톤을 씻어냈다. 바닷가에서 본 못생긴 물개들처럼 각자 늘어져 휴식을 취했고 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리모컨을 들었다. tv가이드라도 하나 놔주지. 


채널을 한 바퀴 다 돌리고야 드디어 월척이 하나 낚였다. LA 다저스 경기, 두둥. 미국에 왔으면 현지 중계로 다저스 경기 정돈 봐줘야지. 하와이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 연고팀이자 전국구 인기팀이다 보니 다저스 경기는 계속 중계해줬다. 월드 베스트 바닷가가 3분 거리에 있고, tv 틀면 다저스 중계 나오고, 냉장고엔 먹을게 가득하고,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는 게코들은 이사회를 개최한 후 날 큰 형님으로 모시기로 한 것 같고... 이곳에 살고 싶구나.


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손흥민 선발경기, 하와이에서 본 사람임. 시차 계산 빡셌음.


너무 평화로워 스르르 잠이 오려던 찰나, 지아가 "이게 뭐야?"를 외쳤다. 거실의 스탠드를 쳐다보고 있었다. 후속타로 "벌레, 벌레"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난 여전히 잠을 머금은 물개 표정으로 "스탠드가 오래돼서 때가 탄 거야."라고 했다. 그게 엔틱 가구들의 멋이란다. "아냐, 움직여. 움직여. 으웩" 


정원의 섬 카우아이인데 벌레쯤이야. 사실 벌레가 주인이고 여기 찾아오는 인간 손님들이 그들에겐 태풍이나 쓰나미 같은 재앙들이겠지. 등이 소파 바닥에 쩍 달라붙어 있었지만, 벌레가 움직인다니 아빠가 움직여주지. 벌레면 기겁을 하는 지아가 그래도 줄행랑치지 않고 미간만 찌푸리며 계속 지켜보고 있는 걸 보면, 바퀴벌레나 돈벌레처럼 끔찍한 몽타주를 가진 녀석은 아닌 듯했다. 개미겠지. 개미에겐 무조건 이길 자신이 있다.


아, 걸어가다 보니 분명 스탠드 커버 위에 검은 점 같은 게 보이구나. 헐, 진짜 움직이네. 모나미 볼펜 똥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이게 뭐지? 조그만 애벌레? 이 정도야 뭐. 티슈 한 장 쓰윽 빼서 엄지와 검지로 고통이 느껴지지 않게 전광석화처럼 해치웠다. 


어라, 그런데 모나미 볼펜 똥이 한 마디 더 꿈틀대고 있는 게 아닌가. 이거 예감이 안 좋은데? 조심스레 스탠드 커버 안쪽을 보니 볼펜 똥 벌레가 수십 마리가 꼼지락꼼지락 난리 부르스들을 추고 있는 게 아닌가. 냉큼 안방 스탠드로 가봤더니 거기도 홍대 클럽을 방불케 했다. 한 마리는 괜찮았는데 스탠드 당 수십 마리씩 붙어 있으니 네 번의 하와이 중 처음으로 재난 프로토콜을 작동할 시간이다. 경계 수준을 정상에서 한 방에 관심, 주의, 경계를 건너뛰고 심각으로 격상시켰다. 


심각 단계는 결혼 전 서교동에서 박정효랑 둘이 살 때, 외출해서 돌아와 보니 우리 방 벽에 모기 20~30마리가 붙어 있는 걸 본 후 처음인 것 같다. 그 날 우리 집과 시궁창이 비슷한 건가 반성을 하며 유혈이 낭자하는 영화 킬빌을 한 편 찍었다. 그 날 이후 첫 심각 단계다. 매뉴얼에 따라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집을 불 지르거나, 집주인에게 전화를 하거나. 


주인에게 전화를 했다. 물론 지영이가 했다. 내가 전화해서 "Come on! Bug's life! Not good!" 이 딴 영어를 할 순 없지. 다행히 근처에 살고 있던 주인이 냉큼 달려왔다. 그동안 갉고 닦은 회심의 영어를 투척했다. "What the hell is it?" 여러 마리인데, 복수형으로 물을 걸 그랬나.


주인은 볼펜 똥들을 대수롭지 않게 지켜보았다. "seem like terminator" 터미네이터? 아놀드 주지사님? "No, no. termites" Termites? 처음 들어보는 단어다. 잽싸게 검색해 보니, 흰개미 유충 정도인 것 같았다. 이 분이라고 모든 생명체의 영어 단어를 다 알고 계시겠는가. 그냥 적당한 단어를 대신 것 같았다. 문 다 열어놓고 청소를 할 때 스탠드 불을 보고 무언가 벌레가 날아와서 애벌레를 낳았을 것 같다고 했다. 주인께선 휴지 몇 장 빼서 포장용 뽁뽁이의 공기를 터트리 듯, 능숙하게 termites들을 처리해 나갔다. 역시 정원의 숲 카우아이다. 바퀴벌레랑 티라노 사우르스만 아니면, 이 집을 기꺼이 쉐어하겠노라. 


퍼온 사진이지만, 딱 요런 느낌?


에너지를 충전한 다음, 마트를 구경했다. 카우아이에는 마트나 할인점이 몇 개 없다. Walmart와 Costco가 하나씩 있고, Ross 두 개가 전부였다. 우리 가족이 애정 하는 Target이나 Whole Foods Market도 갈 수는 있다. 다만 마우이까지 헤엄쳐서 가야 한다. 어제 다녀온 Costco만 빼고, Ross와 Walmart를 구경했다. 


선글라스 하나씩 Get Get


아침과 점심은 먹다 남은 음식들로 간단히 해결했으니 저녁은 여행지답게 근사하게 한 번 먹어야지. 카우아이는 파인 다이닝 식당도 몇 개 없다. 이 중 오늘의 선택은 Duke's였다. 물론 가족들에겐 어디 간다는 말 없이 기대감만 끌어올린 후, 식당 앞에 도착해서 "짜잔~"을 시현했다. 가족들도 점차 이 패턴을 더 좋아하기 시작했다. 


나의 카우아이 첫 초이스도 대성공이었다. 지영이의 표현으로 Duke's, 지금껏 하와이 여행 중 가장 만족스러운 디너였다. 사실 설렁설렁 고르는 듯 하지만, 매주 금요일 밴드 공연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시간에 맞춰 간 것이었다. 그것도 밴드 바로 앞자리에서. 울 가족들은 아직도 이런 디테일은 모른다. 가족들, 하와이였으니 다 좋았던 게 아니었답니다. 


테이블 위에 햄버거, 나초, 맥 앤 치즈가 등장했다. 빅아일랜드에서 탐하기 시작한 지우의 맥엔치즈 사랑은 여전했다. 음식, 음악, 조명, 분위기, 가성비, 모든 것이 완벽했던 Dukes, 다음에 카우아이를 다시 찾을 때 무조건 첫 저녁은 여기다.


짜잔~ 여깁니다.
메뉴는 언제나 엄마 몫
좋냐? 나도 좋다.
슈퍼스타 K에 나오면 광탈할 실력이었지만, 잘 들었습니다.
비주얼이 다했다
비주얼은 별로였으나 콜라를 더욱 맛있게 만들어 주는 맛
지우의 훼이보릿


바닷가에서조차 조용히 시킬 만큼 아이들이 크게 웃고 떠들었던 날.

2일 차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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