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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우 May 04. 2016

10년 전 유럽 여행 - #로잔

예전에 어머니께 여쭤봤다. 신혼여행은 어디로 갔어요? 그랬더니 경주, 설악산, 제주도가 아니라 뜻밖에도 서울로 가셨단다. 서울 어디에 갔었냐고 물으니, 남산타워도 올라가고, 명동에서 칼국수도 드셨다고 하셨다. 남산 밑 어느 호텔에서 묶었는데, 아버지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술판을 벌였다는 기억도 떠올리셨다.


지우 지아도 나중에 아빠 엄마의 결혼 전 모습이 궁금할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서 애들이 태어나기 전, 지영이와 단둘이 갔었던 2007년 8월의 유럽여행을 다시 따라가 보고자 한다. 10년이 훌쩍 지난 여행, 비록 기억이 선명하진 않지만, 당시 사진들과 끄적거린 흔적들을 보면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10년 전 사진들의 디테일을 끄집어내다보면, 잃어버린 기억들과 감정들이 살아나길 희망하며...   






드디어 로잔에 입성했다.


호텔에 짐을 풀고, 시내 중심가까지 10분 정도 걸어가면서, 지영이는 계속 사뿐사뿐 걸어가고 난 파파라치처럼 연신 셔터를 눌러 댔다. 벽의 낙서랑 잘 어울리는 여자, 그리고 그 낙서를 왠지 그렸을 것 같은 남자.




휴가 시즌이라 문을 닫은 가게들이 많았다. 그런데 휴가기간이 7월 21일부터 8월 19일까지. 그래, 이게 휴가지. 우린 직원들에게 암묵적으로 부여된 Max 5 영업일의 휴가기간(앞뒤 주말 끼워서 9일) 불문율을 어기고 그다음 주 월요일까지 휴가를 내고 동기들에겐 용감함에 대한 찬사를, 윗 분들에게는 간덩이가 부었다는 시선을 받으며 여기 왔지만, 역시 유럽 사람들이 휴가의 스케일만 보더라도 삶의 멋을 좀 안다.




난 출발 전 테러당했던 헤어가 4일 동안 부지런히 자라서, 아직 사랑스럽지는 않지만 약간 사람스러워졌다. 지영이는 본인의 시계를 보여주며 저 시계 사달라고 한다. 나도 스위스 시계는 80년대 후반 중학생들 사이에 지금의 겨울왕국 엘사보다 더 인기 있었던 스와치 패션시계를 사본 게 전부라 Pass. 그래도 여기는 시계의 본고장 스위스인데, 저 건물이 ROLEX 본사 건물이 아닐까 생각했으나, 그냥 옥외광고판이었다.




그렇게 걷고 또 걸어, 올림픽 박물관에 도착했다.



이 곳이 이번 여행에서 내가 스위스를 고르고 로잔을 목적지로 선정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어릴 때 우리 집엔 스포츠서울이 매일 아침 배달 왔다. 난 아침에 깨면 눈을 비비며 문 앞 계량기 박스에 끼워져 있는 스포츠 신문을 빼오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땐 스포츠 신문에 선수들의 이름이 최동원(崔東源), 선동렬(宣銅烈), 유명우(柳明佑), 장정구(張正九) 등과 같이 거의 한자로 적혀 있었기 때문에, 나의 한자실력은 아주 뛰어난 편이었다.


대학 때도 지하철을 탈 때 항상 스포츠 신문을 샀었는데, 깜빡하고 스포츠 신문을 사지 않고 탔을 땐 마치 지금 스마트폰 배터리가 끊겼을 때 불안함이 오는 것처럼 금단 현상에 시달렸고, 다음 역에 무조건 내려서 다시 한 부 사서 타곤 했다. 야구 선수들의 웬만한 stat들은 다 외우고 있었다. 한창 머리가 말랑말랑하던 8살부터 28살까지 스포츠 신문을 끼고 살았으니, 그때 대신 책을 읽었으면 지금쯤 도올 손창우 선생이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나의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 적혀 있는 장래희망은 그 흔한 대통령, 과학자, 의사, 변호사가 아니라 ‘IOC 위원장’이었다. 그 꿈은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계속되었고, 어느 새 나의 장래희망을 아무도 묻지 않는 나이가 되어 버렸지만, 컴퓨터로 치면 ‘휴지통에는 넣었지만 휴지통은 비우지 않은 상태’로 나의 꿈은 여전히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로잔의 올림픽 박물관은 생각보단 규모가 작아서 실망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겐 20년간 스포츠 신문으로만 봐오던 스포츠 스타들과 IOC 위원들, 그리고 그들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입체적으로 다듬어져 기다리고 있던 곳인데, 어찌 감동이 작을 수가 있었겠는가.





박물관 중앙에 IOC 위원들이 사진이 걸려있다. 미술학도들이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벽화를 봤을 때 이런 기분일까.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내가 여기 얼굴이 올라갈 수 있을까. 제일 앞에는 J.ROGUE 위원장 사진이 걸려 있고, 그 뒤엔 88 서울 올림픽이 선정되던 그 순간, “쎄울, 코레아”를 외쳐 세계의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있던 사마란치 전 위원장 사진이 걸려 있다.


그렇게 한 명 한 명의 사진을 보다가 4번째 줄 10번째에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K.H.LEE 1996 –Coree / Korea. 아, 우리나라에서는 이 정도 돼야 여기 사진이 올릴 수 있구나. 난 그때 이 분이 오너인 회사에서 하늘 같은 과차장님들의 백업 역할을 하며 7am to 10pm 뺑이치는 대리였는데.



그리고 박물관 앞 정원으로 나와서 조각상 따라 하기 놀이를 좀 하다가 – 저런 거 좋아하던 나이였다 – 레만 호수가를 거닐었다. 레만 호수, 여긴 말이 호수지 그냥 바다였다.






그리고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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