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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우 Jun 05. 2023

미국 여행 4일차 - San Francisco(4)

2022.07.15.


"악!" 비명을 지르며 깼다. 꿈이었다. 꿈에서 멧돼지가 나에게 돌진하더니, 내 손가락을 깨물었다. 난 화들짝 놀라며 손가락을 멧돼지 입에서 빼며 비명을 지르며 깬 것이다. 시계를 보니 새벽 5시였다. 옆에서 애들이 “아빠 뭐야”하며 빵 터졌다. 전날 9시에 잠든 애들은 이미 깨서 배가 고프다고 온 호텔을 뒤지고 있었다. 요 귀여운 멧돼지 녀석들. 아빠는 4시간 전에 잠들었거든, 셧 유어 마우스 업 좀 해줄래? 수면욕이 식욕을 이길 순 없지. 


새롭게 안 사실인데, 새벽에 둘 다 배가 고플 땐 신기하게 사이가 좋아진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장면이 아니라, 억지로 깨서 사이좋은 자매 버전을 감상한다. 웬만한 넷플릭스보다 재미있다. 깬 김에 멧돼지한테 물리는 꿈 해몽을 검색해 봤다. 재물이 들어온단다. 그래, 이제 좀 들어오자. 비명까지 지를 정도로 한 번 들어오자. 기다려보겠습니다.


평소 식탐이 많지 않은 애들이다 보니, 3년에 한 번씩 애들이 배고프다고 하면 지영이는 자다 가도 벌떡 일어난다. 다시 커피포트로 라면을 끓이고, 짐가방들을 뒤져서 밥과 반찬들을 꺼내 온다. 나도 아이들 옆에 살포시 앉았다. 지영이가 김에 밥과 김치를 얹어 주면, 우리 셋은 아기 새들처럼 입만 쩍쩍 벌려서 순서대로 받아먹었다. 네 시간밖에 못 자도 맛있는 건 어쩔 수 없다. 계속 입을 쩍쩍 벌렸다.


전 인류가 다 겪고 있다는 질환, 식사가 끝나면 졸리기 시작한다. 다시 자리에 누웠다. 지금 자면 한국시간과 맞물리며 꿀잠을 잘 수 있을 듯했다. 그래, 우리 모두 깔끔하게 두 시간만 자고 일어나자.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뜨니 오후 1시. 덴장. 하루 절반이 날아갔다. 여행 와서 오후 기상은 해도 해도 너무 했다.


지영이는 서둘러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친구 주희와 점심 먹으러 나갔고, 난 아이들 끌고 어제 예습을 끝낸 pier39로 가기 위해 준비했다. 아이들 깨우는데 30분 걸렸는데, 지우 핸드폰이 보이지 않아 온 침대와 방을 뒤지느라 또 30분을 허비했다. 가뜩이나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꽝인 아이들인데, 카메라로 쓰고 있는 핸드폰마저 안 보이니, 나라를 잃은 표정으로 터덜터덜 따라왔다.


Pier39야, 우리 애들 기분 좀 up 시켜주라. 어제 버스킹을 하던 자리에서 오늘은 흑인 퍼포먼스 그룹이 춤사위를 보여주고 있었다. 춤 선은 역시 우리나라 아이돌들에 비할바가 못되지만, 이들에겐 흑인 특유의 피지컬 능력이 있었다. 춤이라기 보단 점프를 기반으로 한 서커스에 가까웠다. 그러다 무슨 쇼를 하려는지, 지원자를 찾는다. 농구 잘하게 생긴 브롸더 한 명이 날 보더니 손짓을 하며 무대로 나오라고 했다. 싫었다.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더니, Come on~ 하면서 다시 부른다. 더 싫었다. 그런데 두 번이나 지목을 당했는데 빼는 건 아이들에게 보여줄 모습은 아닌 것 같았다. 용감하게 무대로 걸어 나갔다. 


총 5명이 무대 중앙으로 끌려 나와 일렬로 섰다. 알고 보니 이게 오늘의 마지막 퍼포먼스였다. 자리를 뜨기 전 관객들로부터 tip을 최대한 땡기겠다는 마음으로, 여행지에서 맘껏 웃고 즐길 준비가 된 수 백명의 지갑을 노리며 드립을 치기 시작했다. 당연히 드립의 소재는 지원자들이었다. 한 명 한 명을 소재삼아 놀려 대길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을 끈 후, 마지막 퍼포먼스는 우리 다섯 명을 점프해서 뛰어넘는 것이었다. 5초면 되는데, 모금 행사 토킹을 20분 넘게 이어갔다. 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 다섯 명의 경쟁도 유발했다. 돈을 많이 내는 사람일수록 더 앞에 서 있게 해 준다고 분위기를 잡아갔다. 첫 번째 사람이 10불을 냈다. 환호성이 나왔다. 두 번째 사람은 20불을 꺼냈다. 또 환호성이다. 세 번째 사람은 21불을 냈다. 에이, 쪼잔하게 1불 올리냐, 그래도 중간순위 1등이다. 네 번째 사람이 20불 두 장을 꺼냈다. 와, 드디어 40불이 나오나 보다 했는데, 22불 낼 거라며 18불 거슬러 달라고 했다. 저 사람 예능감 좀 있네, 생각했는데, 진짜였다. 그 자리에서 18불을 거슬러가고 있었다. 에이, 저건 아니지.


내가 다섯 번째 차례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돈 많아 보이는 사람을 뽑은 거네.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내 지갑엔 100불짜리 밖에 없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또 거슬러 달라는 건 모양 빠져 싫고, 100불을 내긴 더 싫었다. 100불짜리가 두껍게 들어있는 내 지갑을 여기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나면, 왠지 날 계속 따라올 것 같은 부랑자들도 몇몇 보였다. 그래서 지갑이 없다고 뻥을 쳤다. What? No wallet? 이 분위기 어쩔. 그래도 나 때문에 분위기 쳐지면 안 되니, 지금 와이프가 지갑을 가져갔다고 하며, 관객들을 향해 Who is my wife? 개드립을 쳤다. Come on, Who is my wife?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래도 거슬러 달라고 한 사람보단 반응이 좋았다. 흑형들도 쿨한 표정으로 난 돈 없어도 괜찮다고, 그냥 젤 끝자리에서 목숨 내놓으면 된다고 했다. 결국 난 돈 안 내고 스타일 안 구기고 끝 자리로 배정받았다. 우리 에어 조던 형님께선 개구리 같은 탄력으로 다섯 명을 가뿐히 넘으셨다. 모두 하이파이브를 하고 무대는 끝이 났고, 난 방금 아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도 보여주며, 100불까지 번 셈이었다. 뿌듯했다. 멧돼지에게 깨물리는 꿈이 가져다주는 재물이 겨우 이건 아니겠지? 


금요일 오후 Pier39는 바글바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점심 후보지로 Buba gump와 Crepe Café 중 고를 생각이었는데, 이 정도 인파에 식당 자리가 있을 리가 없지. 전부 웨이팅 한 시간씩이었다. 배가 고프면 더 날카로워지는 아이들이라, 사람이 유일하게 없는 조그만 핫도그 집에 갔는데, 맛도 없고 성의도 없는 핫도그를 하나에 10불씩 받아먹고 있었다. 우린 반 개씩만 먹고 버렸다. 코스트코 핫도그까진 바라지 않지만, 최소한 사람이 먹을 수 음식은 내줘야지.


우린 상점들을 구경했고, 아이들은 비누 만드는 체험을 할 수 있는 오감자극 비누 가게에 가장 오래 머물렀다.  그 사이 점심을 고급지게 먹은 지영이가 도착했다. 알고 보니 지영이 가방에 지우 핸드폰이 들어있었다. 엄마 회사 폰이 호텔방에 있길래, 엄마가 헷갈려 언니 전화기를 가지고 갔을 것 같다던 명탐정 지아의 추측이 맞았다. 전화해 볼 걸, 괜히 아침에 30분 생쑈를 했네.


우린 좌판에서 과일 몇 개를 산 후, Pier39의 자랑인 물개는 건너뛰고 fisherman’s wharf로 장소를 옮겼다. 당도 높은 과일과 다시 찾은 핸드폰으로 기분이 조금 좋아진 아이들은 어느새 상냥한 딸들로 돌아와서 쫑알거리며 잘 따라왔다. Crepe 가게가 보여, 조금 전 못 먹은 한을 풀었다. 더 걷다 보니 Ghiradelli Chocolate Experience가 나왔다. 국경 초월 초콜릿은 사랑이지. 선물용 초콜릿과 지우 지아 기념품 하나씩 샀다. 


내려오니, 또 하나의 추억의 장소 The Buena Vista 레스토랑이 나왔다. 10년 전 지영이와 아이리쉬 커피를 마셨던 추억의 장소라 당연히 들어갈 줄 알았는데, 지영이마저 그냥 지나치네. 에이, 그냥 가면 안 되지. 세 여인을 돌려세워 입구 컷 사진이라도 몇 장 찍었다. 들어가서 Buena Bista 적혀 있는 냅킨이라도 몇 장 가지고 나올까 하다가 참았다.


저녁은 지영이 친구 주희가 추천해 준, Pier39의 Fog Harbor Fish House란 곳으로 갔다. 미친 물가와 어이없는 환율의 막장 콤비네이션으로, 웬만한 레스토랑에서 4인 가족이 식사하면 팁까지 20만 원 정도 나오는데, 여긴 입구부터 ‘30만 원 이하로는 꿈도 꾸지 마쇼’라 말해주는 곳이었다. 그래, 샌프란시스코에서의 마지막 저녁인데 제대로 한 번 먹어보자. 드레스코드가 필요한 곳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내 꼴을 봤더니,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이 정도 스타일이면 강남 나이트도 들어가겠는데? 물론 4일 내내 같은 옷으로 돌아다녔다는 걸 냄새가 알려주고 있었지만, 매일 샤워는 해서 정수리 냄새 안나는 게 어디야. 


지우, 지아의 이름처럼 우아한 가족답게 창가 명당자리로 안내를 받았다. 제법 큰 식당이라, 이 중 한 명쯤은 조금 전 흑형들 무대에 올라갔던 날 알아보지 않을까? 저 진짜 와이프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기관에서 선정했는지는 알 순 없지만, 필기체로 Best Cram Chowder Soup in USA라 코멘트 붙어있는 수프와 샐러드, 포테이토, 토마토 파스타 두 개를 시켰다. 오, 맛이 제대로다. 겉딱속촉 식전 빵을 버터, 수프, 파스타 소스 중 어디에 찍어 먹을지 행복한 선택의 연속이었다. 서빙 담당자도 5분에 한 번씩 와서 Everything OK?를 묻는다. 매번 Perfect라 대답하기도 귀찮다. 이제 그만 좀 오시면 Tip 더 드릴게요. 


식사를 끝내자, 기다렸다는 듯 저녁노을 쇼가 펼쳐졌다. 하와이 Sunset Beach에서 봤던 저녁놀 이후 가장 몽환적이었다. 이런 표현은 싫어하지만, 붉은 노을이 이렇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노을 쇼도 봤으니, 팁 25% 줘라~” 에헤이, 하늘에서 별똥별 100개를 뿌려줘도 25%는 무리. 22%만 놓고 가겠습니다. 


호텔로 돌아와서 크래커 사이에 마시멜로와 Chiradeli 초콜릿을 넣고 모닥불에 둘러앉았다. “넌 꿈이 뭐니” 따위의 꼰대 질문도 할 수 있는 타이밍이었지만, 또 너무 추웠다. 모닥불에 마시멜로가 아니라 내 몸을 던져 넣고 싶었다. 후다닥 먹고 가족들은 방으로 들어갔고, 난 다시 노트북을 들고 내려왔다. 


이번 여행에서 일정 짜기가 가장 애매했던 샌프란시스코 4일이 이렇게 끝이 난다. 이틀만 머물 까도 고민했지만, 그랬다면 시차 적응만 하다 끝났을 것 같고, 나름 소살리토도 가고 버스 투어도 하고 Pier39에서 무대에도 서 보고, 나쁘지 않은 인트로였다.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나간다.


내일부터 캘리포니아 대질주를 시작해 보자.



100불 아낀 나의 무대


지우, 설마 바나나로 여보세요 하는 중?


Ghiradelli Chocolate Experience에서 보석함 쇼핑


The Buena Vista 입구컷


Fog Harbor Fish House 선셋 조명 - 부모 편


Fog Harbor Fish House 선셋 조명 - 아이들 편


내일부터 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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