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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우 May 16. 2016

10년 전 유럽 여행 - #쇼핑

예전에 어머니께 여쭤봤다. 신혼여행은 어디로 갔어요? 그랬더니 경주, 설악산, 제주도가 아니라 뜻밖에도 서울로 가셨단다. 서울 어디에 갔었냐고 물으니, 남산타워도 올라가고, 명동에서 칼국수도 드셨다고 하셨다. 남산 밑 어느 호텔에서 묶었는데, 아버지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술판을 벌였다는 기억도 떠올리셨다.


지우 지아도 나중에 아빠 엄마의 결혼 전 모습이 궁금할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서 애들이 태어나기 전, 지영이와 단둘이 갔었던 2007년 8월의 유럽여행을 다시 따라가 보고자 한다. 10년이 훌쩍 지난 여행, 비록 기억이 선명하진 않지만, 당시 사진들과 끄적거린 흔적들을 보면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10년 전 사진들의 디테일을 끄집어내다보면, 잃어버린 기억들과 감정들이 살아나길 희망하며...   






이탈리아 둘째 날 일정은 심플했다. 


유럽 최대 폭스타운 아웃렛 방문. 와이프에게는 손꼽아 기다리던 대망의 하루였고, 나에겐 뭔가 빡센 하루를 보낸 후 불편한 사람들과 술자리가 예정되어 있는 날 출근하는 기분이었다. 여기가 스위스였는지 스위스 국경 근처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밀라노에서 기차를 타고 한 시간, 버스를 타고 20분을 갔다.



[두 사람의 표정에서 이 날 스케줄에 대한 기대감을 알 수 있다]



기차역에서 information에서 지도를 얻으려고 줄을 서 있다가 한 배낭여행객이 “숙소 잡으셨어요? 어디서 묶으세요?”를 물었다. 우린 대학생으로 보이는 그 배낭여행객에게 차마 Sheraton이라는 말은 못 하고 근처 호텔 잡았다고 얼버무렸다. 


물론 쉐라톤도 처제 덕분에 싸게 묶고는 있지만 나도 96년 배낭여행을 할 땐, 쥐가 튀어나올만한 숙소들만 옮겨 다녔던 기억이 나서 괜히 미안했고, 특히 아웃렛으로 신용카드 마그네틱 닳도록 쇼핑하러 가는 중이어서 더 미안했지만, 우리가 나이에 비해 동안(?)일 뿐 나름 직장생활 5년씩 한 사람들인데 이 정도는 써도 되지 않겠는가.


버스 타고 가는 길이 엄청 꼬불꼬불했는데, 버스에서 그동안 찍은 사진들 감상하다 보니 멀미 기운이 올라와서 컨디션마저 최악인 상황로 폭스타운에 도착했다. 그리고 오늘의 강행군을 위해 피자부터 한 판 시켰다. 맛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래도 이탈리아 피자라고 모양새는 그럴 듯했네. 그리고 피자에 키미테 성분이 들었는지, 한 판을 게걸스럽게 처리하고 나니 멀미는 싹 달아났었다.


[책 읽는 남편 찍는 척하며 뒤의 핸섬가이 찍기. 이탈리아 남자들이란...]


[이 분 사진을 따로 찍은걸 보면, 엄청나게 곡예 운전을 잘하셨던 것 같다]


[이탈리아 피자]



이제 쇼핑 본격적으로 시작. 그 당시 유행하던 스피드 011 광고 문구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처럼 폭스타운의 4~5시간의 쇼핑 시간은 정신을 꺼두고 다녀서 기억도, 사진도 없다. 면세점 가격의 절반 수준에서 가격이 형성되어 있는, 그야말로 또 다른 세상이었다. 


Bally, Ferregamo, Armani, PRADA 등을 유니클로 수준의 가격으로 사면서도, Gucci, HERMES 등은 이다음에 돈 더 많이 벌고 나이가 들면 사자고, 명품에 대한 역치를 한 방에 최고치로 끌어올리지는 않았다.


천천히 끓어오르는 뜨거운 물에 있는 개구리가 자기가 죽어가는 줄 모르는 것처럼, 하나하나 따지면 무지하게 저렴했지만 이렇게 야금야금 사서 집에 와서 영수증을 다 모아보니 엄청났던 기억이다. 


[승자의 미소]


[여기서 뭘 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지금도 집에 다 있겠지]


[승리를 거둔 후, 다시 밀라노역 도착]



보람된 하루를 끝내고 다시 밀라노로 복귀하여, 지영이는 쇼핑 상품들을 들고 먼저 올라가고, 나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던 중, 덜컥! 전원이 꺼지며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어린 시절 문화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 멈춤 사태를 워낙 많이 겪어 난 차분하게 기다렸는데, 10분이 지나갈 때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다. 


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갑자기 카메라 플래시가 떠올랐고 찰칵, 찰칵, 찰칵 찍어대면서 버튼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고 비상벨도 누르고 혼자 셀카 놀이를 하며 버텼다. 그렇게 10분 정도가 더 흐른 후에야, 스르륵 문이 열렸다. 두 명의 벨보이들이 뭐라 뭐라 지껄였는데, “Are you OK?” 정도의 이탈리아어였겠지. 난 그 유명한 “Fine, thank you. And you?”를 날려주고 다른 엘리베이터로 갈아탔다.


[엘리베이터에 갇혔을 때]


신랑이 장시간 행방불명 상태였길래 엄청 걱정을 하고 있을줄 알았는데, 방에 들어가보니 신랑이 엘리베이터에 갇혀있던 것도 모르고, 한 동안 정전이었다고 투덜거렸다.


그때부터 오늘 쇼핑한 물건들 쫘악 펼쳐보고 패션쇼를 한 바탕하면서, 너무 싼 가격의 득템에 기뻐하다가도 ‘아까 그게 더 나았나? 기왕 사는 거 돈 좀 더 주더라도 그거 샀어야 하나?’ 뒤풀이 겸 후회 및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저녁을 먹고 둘이서 빙고 게임을 했는데, 다 끝난 후 무심코 빙고 종이를 펼쳐보고 둘 다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난 가로로 쓰고 동그라미를 치고 있었고, 지영이는 세로로 쓰고 빗금을 치고 있었다. 남녀의 차이라기보다는 한국 교육과 유럽 교육의 차이인가. 우린 어릴 때 맞은 건 동그라미, 틀린 건 빗금으로 표시했기 때문에, 빗금은 괜히 잘못한 것 같고 찝찝했다. 지금도 보면 내 빙고 종이는 받아쓰기 100점짜리고 지영이 빙고 종이는 빵점짜리 같다. 


[빙고 종이 - totally different]



쇼핑, 쇼핑, 쇼핑, 쇼핑, 엘리베이터 사고, 빙고- 이렇게 또 하루가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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