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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우 May 18. 2016

10년 전 유럽 여행 - #로마

예전에 어머니께 여쭤봤다. 신혼여행은 어디로 갔어요? 그랬더니 경주, 설악산, 제주도가 아니라 뜻밖에도 서울로 가셨단다. 서울 어디에 갔었냐고 물으니, 남산타워도 올라가고, 명동에서 칼국수도 드셨다고 하셨다. 남산 밑 어느 호텔에서 묶었는데, 아버지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술판을 벌였다는 기억도 떠올리셨다.


지우 지아도 나중에 아빠 엄마의 결혼 전 모습이 궁금할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서 애들이 태어나기 전, 지영이와 단둘이 갔었던 2007년 8월의 유럽여행을 다시 따라가 보고자 한다. 10년이 훌쩍 지난 여행, 비록 기억이 선명하진 않지만, 당시 사진들과 끄적거린 흔적들을 보면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10년 전 사진들의 디테일을 끄집어내다보면, 잃어버린 기억들과 감정들이 살아나길 희망하며...   






이제 마지막 목적지 로마로.


지영이는 고부가가치 업무인 체크아웃을 하고, 사진에 ‘하심 아메드 쭉빼’처럼 나온 나는 또 짐을 들고 나섰다. 짐을 옮길 땐 항상 저 옷차림이구나.


high value-added task


low value-added task



밀라노에서 로마까지는 기차로 네 시간 반이 걸렸다. 어릴 땐 서울에서 부산까지 새마을호로 4시간 반을 우습게 다녔는데, ktx가 사람 버려놨다. 네 시간 반은 너무 멀다.


유럽에선 일행에게 옆자리를 주지 않고 앞자리를 주었다. 지영이 옆에 앉은 젠틀맨은 놀랍게도 당시 삼성 Ultra Mobile PC의 야심작 Q1을 꺼내더니 영화 감상을 했다. 당시 삼성 SENS Q1 제품은 엄청난 기대와 함께 야심 차게 론칭을 했는데 실적이 폭망 하여 몇 달만에 출고가가 109만 원에서 59만 원까지 떨어졌던 우리 부서 최악의 흑역사 제품이었다. 당시 잘 나가던 삼성전자의 '먹물 새우깡'급의 마케팅 실패사례라고나 할까. 그런 Q1을 유럽 기차 안에서 만나다니. 그 제품 우리 부서에서 출시했다며 당당히 자랑을 하고 싶었지만, 생각해보니 난 영어가 짧았다. 마주 본 상태에서 어설프게 말을 걸었다가 네 시간 반 Speaking 고문을 당할 수도 있다. 마음속으로만 반가워했다.


Q1으로 영화를 보는 남자


잘생긴 독서 청년


그리고 내 옆에 앉은 젊은이, 역시 잘생겼다. 소싯적 껌 좀 씹었을 것 같은 반항기 있는 외모와는 달리 4시간 내내 책을 읽었다. 젊은 사람이 너무 열심히 읽길래 ‘채털리 부인의 사랑’급의 책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성경이었다. 아멘.


로마는 푸른 하늘, 피자, 그리고 보도블록이 가장 먼저 기억난다. BVLGARI 디자이너는 로마의 보도블록에서 영감을 얻어 그 유명한 파렌티지 컬렉션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난 보도블록을 보고 기껏해야 승차감이 안 좋겠다는 둥 동전 빠지면 골 때리겠다는 둥, 생각의 깊이가 너무 차이가 난다.


이탈리아 남자들, 진짜 잘생기긴 했다. 길거리에서 라이터 파는 아저씨도 스타일이 장난이 아니다.


이탈리아 남자들이란...


본격적으로 로마 투어를 시작했다. 


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지도를 펴고 여기가 어딘지 탐색 중이었는데, 13~14살쯤으로 보이는 예쁘장한 소녀가 슬쩍 내 배낭을 열었다. ‘어라, 이것 봐라.’ 배낭이 10cm 정도 열린 듯했다. 에이, 기왕 하는 거 잘 하던가. 그 실력으로 어디 먹고살겠나. 그래서 난 모르는 척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 다시 지도를 보는 척하며 걸어가니, 다시 접근해서 이번에는 좀 더 과감하게 20cm 정도 더 배낭을 연다. “Okay, 여기까지.”


난 뒤돌아서서 그 소녀를 쳐다보고 ‘나 다 알고 있다. 고마해라, 마이 열었다이가’라는 표정을 지었더니, 그 소녀 멋쩍게 웃으며 내 어깨를 탁 만지고 웃으며 앞으로 걸어가버렸다. ‘그래, 나쁜 사람들의 지갑 많이 쓸이 해가서, 빨리 그 바닥에서 손 털길…’



소매치기 소녀 만나기 1분 전


이탈리아에서는 젤라또를 먹어야 한다. 특히, 여행책들은 스페인 계단에서 젤라또를 먹기를 추천했지만, 우린 그곳을 찾아 헤매다가 그냥 길거리에서 젤라또를 사 먹었다. 


'a cup of gelato, please' 보다는 더 고급 영어를 썼으리라.


난 진한 색깔을, 지영이는 연한 색깔을 골랐을 듯



그리고 베네치아 광장. 로마 교통의 중심지. 주위에 큰 도로들이 사방으로 시원하게 뻗어 있다. 베네치아 광장을 바라보다가 카메라의 Zoom을 시험해볼 겸 최대한 당겨보았다가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말 탄 사람, 한 손엔 창을 들고 한 손엔 탬버린을 들고 있었다. 음주가무를 즐기던 멋진 고대 로마인들. 말과 탬버린을 보니, 어처구니없게 맨 정신에 ‘말 달리자’가 떠올랐다. 쯧쯧, 난 언제 BVLGARI 디자이너급의 영감을 가지게 될까.


탬버린을 든 로마인



길눈도 어두운 내가 어설프게 지도를 보면서 움직였더니, 엄청나게 헤맸다. 사진을 보니, 이미 난 사람들과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네. 그냥 관광지에서는 기차놀이하듯 사람들의 꽁무니만 뒤쫓아가는 게 정답인 듯.


콜로세움을 찾아가 발견한 장갑 가게. 미스터 빈을 닮은 주인아저씨. 어떤 색깔이 어울리냐, 어떤 재질이 더 좋냐는 지영이의 질문에, 각각의 비유적 느낌과 본인의 견해를 적절히 섞어가며, 살 것을 강요하기보단 문화를 판매하는 듯한 느낌을 주던 아저씨. 


이 아저씨의 고급 Sales Talk 덕분에 예산에 없던 내 장갑까지 샀다. 이날 알게 된 사실은, 여자는 장갑, 구두 등의 구매 시 아주 큰 기쁨을 느끼고, 심지어 이쁜 장갑을 사면 그 장갑이 끼고 싶어서 빨리 겨울이 오기만을 기다린다는 것. 남자들이 할리데이비슨을 사고 싶어서 담배를 피우는 것과 비슷한 느낌?


그 해 겨울, 난 장갑을 잃어버렸다.



로마의 휴일에서 로드리 헵번이 젤라또 먹었다고 유명해진 스페인 계단. 유명세에 비해선 볼품없었고, 다들 계단에 걸터앉아 앞쪽으로 쭈욱 뻗어있는 명품 쇼핑거리인 꼰도띠 거리에서 무슨 브랜드를 몇 개 살까 고민하는 듯한 흐리멍텅한 눈으로 앉아있는 것이 이채로웠다.


스페인 계단 - 쇼핑 전 쉬는 곳


스페인 계단 - 아무런 감흥이 없다


남편 페라가모 넥타이 하나 사줌


머리가 정상적인 길이가 되어가고 있다


로마 시내를 돌아다니다 어느덧 저녁 시간. 허름한 골목에서 중국 집을 발견했다. 스파게티와 피자의 느끼함에 잠식되어 가고 있던 위와 장이, 중국 집 간판을 보고 다시 쿵덕쿵덕 움직이기 시작했다. 엄청난 사이즈의 식당이었는데, 저쪽에 내가 한 명 더 있다. 알고 보니 한쪽 벽이 거울로 되어 있어서 식당 사이즈가 두 배로 보였다. 


분명 Restaurant Chinese 간판을 보고 들어갔는데, Ristorinte Cinese였구나


뭔가 멋진 사진을 기획했으나, 이도저도 아니다.


음식 맛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남은 접시가 말해준다.


밥 다 먹고 파이팅 포즈


그리고 사람들을 따라 걷다 보면, 트레비 분수가 나온다. 분수의 웅장함과 아름다움 보다는, 엄청난 인파가 와글와글 모여서 사진을 찍어대는 것과 공중으로 날아다니는 동전들이 더욱 볼만했다.


차마 중앙으로는 이동을 하지 못했음


사진 찍어달라고 하니, 저 꽃을 들고 찍으라고 주었다.


로마의 밤은 아주 더웠고, 그렇게 6일째 밤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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