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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창우 Oct 05. 2024

대안 학교 대안 아빠 #16

대안 아빠,

지갑에서 자취를 감춘 10만 원 권 수표처럼 홀연히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했다.


대안 학교 대안 아빠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게 10년 전, 마지막 업로드 기준으로도 5년이 흘렀다. 그 사이 교회 이름이 두레교회에서 새음교회로 바뀜에 따라, 학교 이름도 두레학교에서 새음학교로 변경되었다. 학교명에 '두레'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학교가 한두 개가 아닌데 변경 전 이름으로 몇 년간 글을 걸어 놓다니, 게으르고 무책임하기 그지없지만, 그냥 쿨했던 걸로 포장해 보겠다.  


시간이 많이 흘렀네. 처음 대안 아빠 글을 쓸 땐, 우리 동네에 지하철이 들어오니 마니, 첫 삽을 뜨니 마니 할 때였는데, 이젠 그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고 있질 않나... 그땐 우리나라가 분명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었는데, 이젠 여름과 겨울만 있질 않나...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가고 있지만, 최근에도 내 글을 보고 새음학교 입학을 결정했다는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게 된다. 후... 한 가정의 자녀 교육이라는 중차대한 문제에 본의 아니게 관여하게 되다니, 부담스러우면서도 사역자가 된 이 기분이란.


그분들이 선생님들께 묻는다고 한다.

"예전에 대안 아빠 글 썼던 분의 자녀, 아직... 다니고 있나요?  


아차 싶었다.

주기적으로 포스팅 올리다가 어느 날 글이 뚝 끊겨서, 학교를 중도에 나간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고 하셨다. 그럴 만도 하네. 그렇게 열심히 학교 자랑을 하다가, 짧은 생애주기를 마치고 자취를 감추는 강가의 러브버그들처럼, 갑자기 글 업로드가 멈췄으니, 내가 슬기로운 감방생활 중이거나 학교랑 대판 싸우고 나간 거지.


아닙니다. 여전히 잘 다니고 있습니다.


10년 전 학교 입학을 고민하던 첫째 지우는 벌써 고1이 되었고, 둘째 지아도 고민 1도 안 하고 언니 따라 입학하여 5학년이 되었습니다. 우리 부부의 학교에 대한 신뢰, 아이들의 학교에 대한 애정, 어느 것 하나 줄지 않았습니다. 준 것은 나의 시력뿐. 이 놈의 노안.


새음학교를 10년째 다니고 있는 지우.

여전히 스마트폰 없이, 사춘기도 순한 맛으로 넘기고, 잘 크고 있습니다.


그동안의 성장 과정과 새음학교의 특별한 교육과정인 '우리 땅 즈려밟고' '몽골 이동 배움' '태국 해외봉사' '유럽비전트립' 등은 기회가 될 때 차차 썰을 풀기로 하고, 오늘은 오랜만에 생존신고를 하는 기념으로 새음학교 교육의 꽃, '도제 배움'을 살포시 소개하려 한다.


'도제'의 사전적 정의는 장인으로부터 직업 교육을 받는 것인데, 새음학교의 '도제 배움'도 그런 맥락이다. 새음학교의 고등학생들이 수행하는 학생주도 연구 프로젝트로, '세상에 나아가 빛이 되리라'는 새음학교의 캐치프레이즈에 맞춰, 본인의 재능과 관심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그 재능을 세상 가운데 어떻게 발휘할 것인지 본인의 진로를 탐색해고 연구해 보며, 꿈을 향해 한 발 더 나아가게 하는 특별한 진로 탐색 프로젝트이다.


새음의 고등 학생들은 3개월 간 이 프로젝트를 준비한다. 대학생들이 한 학기 준비해서 기말 프로젝트를 발표하는 것과 비슷하다. 도제 배움을 앞둔 지우를 위해, 이 아빠가 대학의 전공들을 하나씩 소개해 줬다. 대학에는 이런 전공들이 있고, 각 전공마다 이런 것들을 배우며, 향후 이런 직업들을 가지게 된다, 이런 내용들이었다. 나의 바램을 담아 문과 보단 이과 쪽 전공에 좀 더 힘을 실어서 설명해 준 것은 지우에겐 비밀이다.


과소개들이 끝난 후, 이 중 어떤 공부를 해보고 싶냐고 물어보니, 지우의 선택은 """건축학과"""였다.


조금은 의외였지만, 이 대목에서 부모가 잠깐이라도 움찔하면 안 된다. 리액션 맛집이어야 한다. 물론 속으론 '아, 힘들 텐데... 조금 더 편한 과들도 있을 텐데'였지만, 고양이의 반사속도로 "와, 그렇구나. 너무 멋진데? 건축이라니."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응했다. 건축학 개론 영화를 보여줄까 하다가, 납득이의 저질 드립들이 생각나서 패스. 돌이켜 보니 지우는 어릴 때부터 이것저것 만드는 것을 좋아하고, 공간 감각이 뛰어난 편이었다. 그래, 도제 배움, 건축학으로 한 번 탐구해 보자.


지금은 자본시장에서 놀고 있지만 알고 보면 건축학과 출신이었던 후배 백낙권에게 건축학과 학생들의 필독서 7권을 추천받고, 한 권도 빠뜨리지 않고 모조리 사줬다. 이빠, 폼 미쳤나? 책 뭉치를 보고, 지우는 고맙다고 한 후...


읽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탑다운 방식이 통할 리가. 대신 지우가 매주 본인에게 필요한 책과 논문을 구해오라고 오더를 내렸다. 누구 명령인데 안 하겠어. 난 동네 도서관들을 넘어, 역삼도서관, 서울시청 도서관, 연세대 중앙도서관까지, 내 발길이 머무는 모든 곳의 도서관에 회원가입을 한 후, 모든 곳들을 샅샅이 뒤져서 임무를 완수했다.


그렇게 도제 배움 준비를 해서

작년 9학년 땐, '학교 공간 혁신 디자인'이란 주제로, 건축 디자인을 하시는 학부모님을 멘토로 모시고, 건축에 필요한 소프트웨어 활용법들도 배우며, 사춘기 소녀치곤 생각보다 즐겁게, 그리고 열심히 준비를 했다. 이 과정을 통해, 지우는 건축과 공간 디자인이란 분야에 더 흥미를 느끼게 된 것 같았다.


그리고 올해는 '도시설계 이론과 실습'이란 조금 더 확장된 주제로, 서울시립대 스마트시티학과 교수님을 멘토로 모시고 연구를 진행했다. 그렇게 움직이기 싫어해서 10보 이상은 바래다 달라고 부탁하는 애가, 서울시립대에 교수님을 뵈러 갈 땐, 사전에 질문지도 작성하고 기쁜 마음으로 지도 보며 교통편 확인하고 가는 모습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중간중간 연구 과제를 보고 싶었지만, 지우는 평소 스타일대로 끝나고 보라며 보여주질 않았다. 그래, 알아서 해봐라. 즐거우면 됐다.


그렇게 3개월 간의 연구 후, 모든 학생들의 도제 배움 발표가 있었다. 아이들이 고른 주제도 다양했다. AI, 인공지능, ESG경영, 환경마케팅, 유기화학, 에너지, 법과 도덕, 디자인, 웹소설, 항공조종, 사진촬영, 간호, 요리, 체육, 종교 등 아이들 숫자만큼 다양한 분야들의 향연이 펼쳐졌다. 한 명 한 명의 관심사가 이렇게 다르다니, 다양성을 존중하고 살려주는 새음 교육의 힘이 다시 한번 느껴졌다. 보고서 제출과 발표까지 모든 과정이 끝나고, 영광스럽게도 지우의 보고서와 발표자료가 대표로 뽑혀서 얼마 전 학술제에서 학생, 선생님, 학부모, 예비학부모, 멘토단, 외부전문가, 새음교회 관계자들이 모두 모인 곳에서 발표를 하게 되었다.


살짝 부끄럽지만, 발표 영상은 아래 링크에 담겨 있다.

https://youtu.be/n2nCZkIDkmw?si=gwynI0C7BKVBvKgC

 


나도 발표한 후에야 보게 된 보고서는 전개 과정이 훌륭했고, 깨알 같은 재미로 그동안의 실습 일지들도 담겨 있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멘토이신 서울시립대학교 교수님을 만나 뵙고, 대학수업을 참관해 본 후 썼던 내용이었다.


교수님께 내 목차에 대한 피드백을 받으니, 복잡했던 것들이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실습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는데, 교수님께서 실습에 대한 아이디어도 많이 주셔서 감사했다. 덕분에 실습에 대한 감이 잡힌 것 같다.


3시쯤 대학수업에 참관하러 갔다. 이 수업은 학생발표수업이었다. 개인별 프로젝트는 각자 한 도시에 미래적인 요소를 넣어 설계해 보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수소 자동차 충전소와 사람의 보행이 편리하도록 차도를 지하에 만드는 등의 여러 아이디어들이 있었다. 조별 프로젝트는 2개 조로 나누어 각 조끼리 한 마을을 답사한 다음, 그 마을의 문제점들을 찾아내 보완한 모습을 설계하는 프로젝트였다. 대학생들이 진행한 프로젝트가 내 도제 배움이랑 많이 비슷하다고 느꼈고, 도시의 미래적 요소와 문제점을 찾아 개선한다는 주제가 똑같아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학생들이 Lookx AI라는 프로그램을 사용해 설계 이미지를 구체화시켰는데, 나도 이 프로그램을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발표를 들으며 조금 놀랐던 부분은, 대학생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발표를 못한다는 것이었다. 다들 대본을 보고 읽고, 마이크에 목소리가 안 들리게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학생이라도 발표를 다 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수님 덕분에 이런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어 너무 감사했고, 큰 도움이 되는 시간이었다. 


오, 우리 딸 좀 치네.

평소 샤이한 모습 이면엔, 대학생들을 평가해 보는 이런 자신감과 패기도 있었구나.


이번 발표를 통해 두 가지를 확인했다.


사실 내가 가장 궁금했던 포인트는, 200~300명 앞에서 발표를 하게 되었는데, 과연 지우가 얼마나 긴장할까였다. 그래서 발표를 마치고 만난 지우에게 내가 처음으로 한 질문도, "우리 딸, 긴장됐어?"였다. 지우의 대답은,


"긴장될 줄 알았는데, 발표하기 전에도, 발표 하는 도중에도, 긴장이 1도 안되던데?"였다.

캬, 내가 원하던 답변이었다. 앞으로 살면서 발표를 수백 번도 넘게 더 하게 될 텐데, 오늘 떨지 않았다면, 평생 긴장해서 망치는 일은 없겠네. 내겐 이 부분을 확인한 것이 가장 뜻깊었다.


그리고 이어진 지우의 말,

"나 말고 새음학교 다른 친구 아무나 시켰어도 이 정도는 다 할걸? 우리 학교 애들 발표 진짜 잘해"


경쟁 없이 함께 성장한 친구들을 향한 믿음과 사랑이 느껴졌다.

그래, 그런 마음이면 됐다. 이러려고 새음학교 보낸 거지.


지우는 벌써 내년 도제 배움 때 하고 싶은 프로젝트가 생각났다고 한다.

그래, 필요한 자료나 논문 있으면 뭐든 말해라. 아빠가 워싱턴 의회 도서관에 가서라도 구해주마.


새음학교 아이들은, 오늘도 함께 성장해 갑니다.

이상, 대안 아빠 생존신고 완료.


...


* 이 글은 과속 과태료 딱지를 받은 죄로, 와이프가 글이라도 하나 올리라고 해서 쓰는 글 아님.

* 또한, 책 언제 또 내냐고 만날 때마다 물어보시는 함승민 선생님 때문에 쓰는 글도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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