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ybeen Jul 22. 2024

비행기 시간 있으면 투어 시켜줄게, 마지막 택시의 호의

#29 상트페테르부르크 3편 : 노어노문학과 자퇴하러 가보는 러시아

나폴레옹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념하며 지어진 카잔 대성당. 성 베드로 성당과도 비슷한 느낌이 드는 반원형 구조 덕에 가운데에 있으면 더 웅장하고 포근했다. ⓒboybeen


10,000km가 넘는 거리, 시간으로도 꼬박 한 달이 걸렸던 러시아 여행의 마지막 날. 무거운 아침이었다. 어이없는 말장난지만 두꺼운 호텔 이불을 두 겹이나 덮고 잔 덕에 물리적으로 무거워서 그런 기분이 들었을 수도 있겠다. 여행 마지막 날엔 꼭 호텔에서 자고 싶다는 소소한 버킷리스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워낙 아쉬움도, 후회도 많은 성격이라 그날은 청승맞게 잠을 설칠 것만 같아서 이부자리라도 편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여하튼 덕분에 푹 자고 일어났고, 컨디션이 나빠졌다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오늘 밤엔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눈을 뜨자마자 맴돌았으니 마음은 싱숭생숭했다.


이것도 마지막이라며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매 도시마다, 말을 나눈 한 사람 한 사람마다 해 왔으니 이젠 시들해진 건지 프런트에 짐부터 맡기고 나왔다. 오늘 저녁에 찾으러 오겠다는 말과 함께, 특별한 행선지 없이 무작정 넵스키 대로로 향했다. 이 큰 도시에 단 3-4일 만에 보지 못한 것이야 여전히 가득했지만, 새로운 무언가를 볼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던 탓에 이미 다 본 곳들을 한 번 더 둘러보곤 했다. 남은 루블을 털어보겠다며 애매한 기념품들을 담아보기도 했다. 가방은 계속 무거워졌지만, 끝끝내 채워질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제는 인정할 때가 온 것이겠지. 애써 꾸물거리다 마지막 식사를 하고 마지막이 될 얀덱스 택시를 불렀다.


카잔 대성당의 청록색 돔과 회색빛이 도는 금색 건물의 조화가 좋다고 생각했다. 특유의 거친 질감까지도. ⓒboybeen
그렇게 난 반년 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어학연수를 오게 되었다. 이 도시의 눈 아래엔 내 추억도 있을 것 같다는 든든함으로 보낸 한 달이었다. ⓒboybeen
지금까지 이 도시를 3번이나 왔지만, 우측 하단에 보이는 유람선을 타 보지 못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조심스럽지만, 그런 날이 오길 나는 많이 바라고 있다. ⓒboybeen


상트페테르부르크 공항까지는 조지 클루니를 굉장히 닮은, 조지아에서 온 아저씨와 함께 가게 되었다. 퇴근길에 부업으로 몇 명씩 태워다 주곤 한다던 미쉐 아저씨는 공항으로 가는 거면 이제 집에 돌아갈 거냐고 하셨다. 그렇다고 했다. 전공자로서 이 나라를 정말 좋아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서 혼자서 한 달을 넘게 여행했고, 좋은 기억만 갖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부터 어설픈 러시아어로 했던 레퍼토리도 한 달 동안 하니 제법 유창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미쉐 아저씨는 마지막 도시는 괜찮았냐고 물으셨지만 시원하게 대답할 순 없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욕심이 컸던 탓인지, 엄청 편히 즐기지 못했던 게 늘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미쉐 아저씨는 그런 내 표정을 보셨던 건지 혹시 비행기 시간은 많이 남았냐며, 그럼 가는 길에 시티 투어를 해주시겠다고 하셨다. 러시아 택시는 탑승할 때 요금이 정해져 있는데, 호의를 베풀어 주신 것이다. 하루 종일 꿍했던 마음이 그 한 마디에 풀렸다.


마지막으로 둘러본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참 예뻤다. 석양이 지나자 붉은색부터 짙은 남색까지 북유럽의 아주 진한 저녁 하늘이 그러데이션처럼 펼쳐졌고, 끝내 계속해서 짙어지는 무지갯빛 하늘을 배경으로 밝은 초승달이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알아듣지 못한 설명을 한 문장씩 되새기며, 최선을 다해 그 시간을 차분하게 즐겼다. 미쉐 아저씨에 대한 고마움 마음으로, 나의 여행이 끝나감에 대한 아쉬운 마음에 셔터 스피드를 채 따라오지 못하고 흔들린 사진들이 지금도 먹먹하게 남아있다.


미쉐 아저씨의 차에서 본 개선문. 아저씨의 차에서 많은 사진들을 찍었는데, 아마도 반쯤은 울먹이며 찍었던 탓에 거의 흔들렸고 이 사진만 제대로 남아 있다. ⓒboybeen


미쉐 아저씨는 이제 러시아를 떠나서 필요 없다고 말씀드려도 한사코 고작 10 루블(당시 170원)의 잔돈을 거절하셨다. 급한 마음에 조수석에 던지듯(아직도 던져둔 그 기억이 죄송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하는 수 없이 자리에 두고 내렸고, 캐리어에서 짐을 내려주신 아저씨와 함께 마지막으로 사진도 찍었다. 미쉐 아저씨가 떠나고 공항 입구에 홀로 서서, 다 지지 않은 석양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막 흘렀다. 이렇게 행복했던 여행에 무엇이 그리 걱정되고, 무섭고, 아쉽고, 속상했을까. 답을 찾을 순 없어 그 자리에서 많이 울었다. 그렇게라도 최대한 흘려보내면 내 마음이 조금은 괜찮아질 것도 같아서.


대한항공 발권 줄엔 패키지여행을 오신 어르신들이 대부분이었다. 혼자 온 젊은 사람은 거의 나뿐인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이 50L짜리 대형 여행 가방을 메고 있기가 민망해 대충 레인커버로 포장한 채 툭툭 발로 밀고 가고 있었는데, 이 모습을 본 어르신들께서 어쩌다 혼자서 러시아에 오게 되었냐며 물어보시곤 했다. 이 질문을 1달 동안 애써 축약해서 러시아어로 답해왔는데, 막상 한국어로 하려니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생각나서 순간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조금 어색해 보였겠지만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면 대견하다고, 용기 있다고 칭찬해 주셨다. 나는 살면서 용기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고작 한 달 새에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동네 풍경이 그리워 어학연수를 왔다. 특히 모두가 일과를 마치고 노을이 비스듬히 지고 있는 그 시간대의 나이브함이 지금도 그립다. ⓒboybeen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큰 쇼핑몰인 갤러리아 백화점 앞 풍경. 남은 루블을 털겠다고 잘 입지도 않는 체육복을 한 벌 사 왔던 기억이 있다. ⓒboybeen


비행기 앞 좌석에 앉은 아저씨의 모니터엔 KBS 뉴스가 재생되고 있었고, '고용 시장 동결, 청년 삶의 질 악화'라는 문구가 지나갔다. 이 문구가 꽤 충격적이었어서 바로 메모장 어플을 켜서 적었는데, 여행 에피소드를 적던 파일이었던지라 더 어색해 보였다. 지난 한 달간 나의 현실은 꿈만 같았는데, 누군가의(혹은 미래의 나의) 현실은 다르게 그려지고 있었다. 괜히 더 생각하면 나쁜 생각이 들 것 같아 비행경로를 펼쳤더니 지난 도시들의 이름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그렇다면 난 이 비행으로 한 달을 거슬러 돌아가는 걸까? 문득 지나온 도시들이 그리워져서 사진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잠들기를 반복하다 한국에 도착했다.


인천공항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순두부찌개를 먹는 것이었다. 고려인 식당은 자주 갔지만, 그럼에도 한국 음식은 최대한 참아왔었기 때문에 홀린 듯 들어갔다. 많이 지쳐 보이는 내 또래의 종업원은 '북창순두부'를 '곱창순두부'로 잘못 알아들었고, 뜻밖의 곱창을 질겅질겅 씹고 있자니 문득 러시아가 그리워졌다. 늘 식당에 가면 당당히 제일 좋은 메뉴를 묻고는,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 설명을 다 듣고서 그걸 달라고 했으니까. 그렇게 매 끼마다 뜻밖의 메뉴를 먹곤 했던 게 떠올랐다. 다음에 갈 땐 먹고 싶은 걸 시킬 수 있는 정도만 공부해도 좋겠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그렇게 난 한국에 돌아온 지 두 시간 만에, 또 다른 여행을 꿈꾸고 있었다.

노어노문학과 자퇴하러 직접 가보는 러시아, 끝.


노보시비르스크와 이르쿠츠크를 보자마자 그 도시에서의 기억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삭막할 이 비행기에 각 좌석마다 각자의 반짝임이 있었을지도. ⓒboybeen
정말 대충 포장해서 발로 밀고 다녔던 나의 50L 대형 가방. 군 복무 중 펀딩이 진행되었던 제품인데, 이 배낭을 사는 순간 나의 여행이 현실이 되었던 것 같다. ⓒboybeen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야경. 굽이치는 네바강과 곳곳의 운하가 구름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최대한 눈에 담아 보다가, 그 풍경을 보내주었다. ⓒboybeen


-

33박 34일,

11개의 도시와 바이칼호수까지!

10,000Km를 넘게 달렸던

2018년 스물셋 여름날의 기억들


-


01 프롤로그 : 좋아할 수 있는 일만 하며 살아가고 싶은데, 전공자도 전공자라서 러시아는 무서워요

02 동해항 : 배 타고 러시아 가는 건 영화에서나 봤지

03 블라디보스토크 1편 : 반가움에 '끝내주는 가게'를 소개해주겠다는 술 취한 현지인

04 블라디보스토크 2편 : 잘못 부른 택시가 폭우 속에 20분을 기다리다

05 울란우데 도시편 : 전 세계에서 가장 큰 42톤 짜리 레닌 두상이 있는 도시

06 울란우데 이볼긴스키 다짠편 : “다 끝내고 다시 시작할거야.” 사연 있는 현지인과 사찰을 걷다

07 울란우데 린포체 박샤 다짠편 : 부산(釜山) 사람은 평원에 약해

08 바이칼 호수 알혼섬 후지르마을 입성편 : 편도 6시간, 알 사람은 안다는 호수의 섬

09 바이칼 호수 북부 투어편 : 바다가 없으면 답답하다는 아빠를 호수에서 이해하다

10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1편 : 수영은 못 해도 무작정 IN THE BAIKAL

11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2편 : 카약도, 인생도 뒤집어지기는 쉽지 않아

12 이르쿠츠크 1편 : 유배 귀족들이 일군 시베리아의 파리에서 좋은 학생으로 인정받다

13 이르쿠츠크 2편 : 유노스찌(젊음)섬, 청춘은 그 자체로 노 프라블럼

14 시베리아 횡단열차 : 러시아 군인 앞에서 꺼낸 K-POP이 왜 하필 ‘이등병의 편지’였을까

15 노보시비르스크 : ‘노잼도시’에도 사람은 산다, 그래서 재밌다

16 예카테린부르크 1편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서 마이클 잭슨을 기념하다

17 예카테린부르크 2편 : 치킨텐더를 시켜서 닭날개를 받아도 맛있는 게 여행이다

18 카잔 1편 : 자퇴한다더니 교환학생의 도시를 예습해도 되는 걸까

19 카잔 2편 : 정교회 성당 옆 이슬람 사원에서 느껴보는 연방국의 넓이

20 니즈니노브고라드 : 러시아에서 조국을 수호한 날에 한국 예비군으로서 축하를 받은 사연

21 황금고리 1편 블라디미르 : 으슥한 식당 한 구석 오크통에서 꺼낸 꿀술, 메도부하

22 황금고리 2편 수즈달 : 1,000년 전 방어요새도 이제는 선베드 명당

23 모스크바 1편 : 러시아어 전공자면 성 바실리 성당 앞에서 울어도 주책은 아니지?

24 모스크바 2편 : 모스크바의 871번째 생일, “오늘 모스크바는 잠들지 않습니다.”

25 모스크바 3편 : 지방 사람은 서울 한 번도 결심이 필요한데, 모스크바는 어떻겠어

26 모스크바 4편 : DIY가 취미가 아니라면 마트료시카는 꼭 열어보자

27 상트페테르부르크 1편 :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28 상트페테르부르크 2편 : 책을 산 게 죄고, 읽는 게 벌이라던 <죄와 벌> 따라 ‘도망’가기

29 상트페테르부르크 3편 : 비행기 시간 남았으면 투어 시켜줄게, 마지막 택시기사님의 호의

30 에필로그 : 스물셋의 나름 괜찮았던 한 달

작가의 이전글 산 게 죄고, 읽는 게 벌인 <죄와 벌> 따라 도망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