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상트페테르부르크 2편 : 노어노문학과 자퇴하러 가보는 러시아
요즘 시대엔 듣기만 해도 아찔한 인문대 학생으로서 스무 살 이후의 가장 큰 고민은 전공과 현실의 괴리였다. 오죽했으면 처음 상경대 부전공 수업을 듣고 세상 돌아가는 걸 학교에서 배울 수도 있다는 게 신기했을 정도로. 고작 1-2년 정도 문학을 공부한 3학년 언저리의 우리들이 모였을 땐, 점점 현실과 멀어지는 것 같다는 걱정을 이젠 지겹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뱉어내곤 했다. 그건 '하고 싶어서 내가 선택한 길이고, 그렇게 해보니 더 재미있었다'는 것과는 분명 별개의 문제였다. 오히려 그 부분이 더 고차원적인 전공 수업을 듣게 되며 우리에겐 더 고민거리가 되어 갔으니, 어떤 선택을 해도 뒷맛이 쓴 것은 이 시대의 고학번 인문대생들이 으레 겪어야만 했던 현실이었다.
나는 특히 현실 속에 ‘없는 것 같은’ 무언가를 공부해야 한다는 점이 가장 큰 고민이었다. 러시아 소설이 아무리 어렵다지만(등장인물의 이름이 긴 건 기본이고,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이름을 쓰는 등), 꾸역꾸역 읽다 보면 나름 재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거의 모든 소설에 나오는 ‘넵스키 대로’가 실존한다고 해서 한국에 있는 내게 ‘호그와트’ 이상의 현실감을 주지는 못한다는 건 풀리지 않는 문제였다. 웬만한 관광컨벤션학을 부전공으로 이수하며 웬만한 과제마다 답사를 꼭 다녀와야 했던 게 번거로웠지만, 괜히 부러운 마음이 들었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여행의 마지막 도시, 제정 러시아의 수도이자 러시아 문학예술의 중심지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목표는 내 전공도 현실 속에 있다는 걸 몸으로 느끼는 것이었다. 나에겐 첫 답사인 셈.
삐쩨르(상트페테르부르크를 현지식으로 부르는 단어)를 배경으로 한 숱한 작품들 중에서도, 의경 시절 경찰서에서 읽으면 왠지 몰입할 수 있을 것 같아 골랐던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테마로 정했다. 선민의식에 빠져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 대학생 라스콜리니코프가 결국 ‘자신이 더럽힌 대지’에 입맞춤했던 센나야 광장. 그 근처에 도스토옙스키가 거주하며 죄와 벌을 집필했던 덕에 소설 속 골목, 건물, 다리 하나까지 실제로 찾아볼 수 있었다. 지금은 여느 지역 시장이 그렇듯 분주하게 상인과 시민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광장을 바라보며, 러시아 전통 도너츠인 삐쉬끼와 산딸기와 베리로 만든 주스인 모르스를 처음 먹어 보았다.
다만 그 일대에 ‘여기서 도스토옙스키가 죄와 벌을 썼음!’과 ‘여기에 <죄와 벌>에 나오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살았음!’이라는 표지판을 제외하곤 별다른 안내가 없어서 오래된 블로그 게시글 몇 개를 참고해야 했다. 나름 러시아 스러운 무심함 덕분에 뻔한 관광 같지 않게 탐험하는 재미가 있었다. 다행히 19세기의 건물을 지금까지도 그대로 간직한 덕에, 번듯한 지하철역까지 생겼음에도 도스토옙스키가 피부로 느꼈을 북적이면서도 음침한 분위기는 남아있었다. 책을 산 게 죄고, 읽는 게 벌이라던 그 책을 수업에서 다시 마주하게 된다면 분명 색다른 떨림이 있을 것만 같았다. (실제로 이 경험은 '19세기 러시아 소설' 전공 수업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다만,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고 본인의 집으로 도망가는 루트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한 듯했다. 그중에서 ‘내가 직접 이래저래 뛰어봤는데 이게 최단 루트다!’라는 당당한 후기를 발견해서, 그 루트대로 아주 몰입해서 뛰어 봤더니 딱 5분이 걸렸다. 일대가 심지어 차도 거의 다니지 않을 정도로 으슥한 골목길이 많아서 뛰는 도중에 사람을 거의 볼 수 없었는데, 라스콜리니코프는 범행을 저지르고서 나보다 더 절박하게 뛰었을 테니 목격자가 없을 법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 명이라도 나를 목격했다면 굉장히 의심했을 것 같기도 한데, 대로변에서 헉헉거리며 숨을 고르고 있자니 왠지 뿌듯한 마음에 막 웃었다.
이 글을 썼던 2018년 즈음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가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소개되며 인기 여행지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개인 배낭여행객인 나의 관점에서 그 열풍을 분석해 보자면, 오디오 가이드가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에르미타주 박물관, 성 이삭 성당, 그리스도 부활 성당 모두 300~500 루블만 내면 무려 한국어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특히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경우 방송인 김성주와 연극배우 손숙의 목소리로 해설을 들을 수 있는데, 어색한 보이스웨어도 아닌 유명인이 정성스레 녹음한 음성을 북유럽 근처에서 들으니 엄청 반가웠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장소는 그리스도 부활 성당이었다. 그 자체로도 너무 화려하고 멋졌지만, 네바 강 운하의 수로를 따라 걷는 길도 성당의 일부라 할 수 있을 만큼 자연스럽게 끌려 오게 만드는 시퀀스의 힘과 매력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 성 바실리 성당을 모델로 삼으며 붉은 광장 입구에서부터 이어지는 공간적 서사도 함께 참고한 건 아닐까? 넵스키 대로를 걷다가 돔 끄니기(해리포터에 나올 것처럼 생긴 서점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명실상부 중심에 위치한 점이 특징)를 끼고돌면 긴 수로 끝에 알록달록한 성당이 예고도 없이 튀어나오는데, 그 벅참을 모르는 사람과 함께 한다면 몇 블록 전부터 놀라게 해줄 생각에 설렐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사실 그리스도 부활 성당보다는 ‘피의 사원’이라는 이름을 더 자주 볼 수 있는데, 그 자리에서 제정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폭탄 테러*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인 알렉산드르 3세가 아버지를 기리며 성당을 건축했는데, 내부에는 사고를 당했던 위치도 보존되어 있었다. 니콜라이 1세 재위 시절 발발한 크림 전쟁에서의 패배 이후 즉위한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 해방령, 군제 개혁, 사법 개혁, 지방 자치제 도입 등 사회 전방위적으로 자유주의적인 개혁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전제군주정에 대한 불신과 사회적 불만으로 인해 인민주의와 허무주의를 표방하는 '인민의 의지당'의 테러로 1881년에 암살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제정을 무너뜨리려 했던 이 테러는 오히려 그의 후계자인 알렉산드르 3세가 전제정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는데, 알렉산드르 3세가 아버지의 사망에 큰 충격을 받아 반정부 테러리스트와 혁명가들을 본격적으로 처단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전제주의 정치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신기했던 건 그런 무서운 별칭과 달리 내부는 방문했던 어떤 성당들보다도 화려했다는 점. 모든 벽과 기둥이 모자이크화로 채워져 있어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오디오 가이드에 따르면 당대 유명한 화가들은 싹 다 동원되었다는 듯했다. 아름다운 만큼 더 비극적이었던 공간이었고, 아버지를 잃은 아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오디오 가이드의 말미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많은 문화재들이 크고 작은 전쟁들과 소련 시기를 겪으며 상당 부분 훼손되었고, 지금까지도 복원 중이라는 것. 피의 사원만 해도 1907년에 처음 공개된 후, 종교를 금지했던 소련 시절에는 창고 등으로 쓰이다가 90년 후인 1997년에야 다시 문을 열 수 있었는데, 복원에 쓰인 기간만 건설 당시의 24년보다 긴 약 27년이 들었다고 한다. 사원 한 편에 작은 타일 하나까지 복원하는 과정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어떠한 한 문화재, 나아가 한 도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함께 볼 수 있었다. 일개 관광객인 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며 여행자로서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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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박 34일,
11개의 도시와 바이칼호수까지!
10,000Km를 넘게 달렸던
2018년 스물셋 여름날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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