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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ybeen Jul 15. 2024

산 게 죄고, 읽는 게 벌인 <죄와 벌> 따라 도망치기

#28 상트페테르부르크 2편 : 노어노문학과 자퇴하러 가보는 러시아

테트리스로 유명한 바실리 성당에서 착안하여 만든 만큼 알록달록한 색깔이 꽤 귀엽기도 했던 피의 사원. 상단부 공사는 최근 기사를 보니 마무리된 것 같았다. ⓒboybeen


요즘 시대엔 듣기만 해도 아찔한 인문대 학생으로서 스무 살 이후의 가장 큰 고민은 전공과 현실의 괴리였다. 오죽했으면 처음 상경대 부전공 수업을 듣고 세상 돌아가는 걸 학교에서 배울 수도 있다는 게 신기했을 정도로. 고작 1-2년 정도 문학을 공부한 3학년 언저리의 우리들이 모였을 땐, 점점 현실과 멀어지는 것 같다는 걱정을 이젠 지겹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뱉어내곤 했다. 그건 '하고 싶어서 내가 선택한 길이고, 그렇게 해보니 더 재미있었다'는 것과는 분명 별개의 문제였다. 오히려 그 부분이 더 고차원적인 전공 수업을 듣게 되며 우리에겐 더 고민거리가 되어 갔으니, 어떤 선택을 해도 뒷맛이 쓴 것은 이 시대의 고학번 인문대생들이 으레 겪어야만 했던 현실이었다.


돔 끄니기를 끼고 코너를 돌면 길게 뻗은 운하 끝에 피의 사원이 빛나고 있다. 그 아래의 기념품 노점과 관광객들과 비교하면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boybeen
모자이크화로 모든 기둥과 벽면이 꾸며져 있던 피의 사원 내부. 각각의 모자이크화는 성경과 성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boybeen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밤거리는 오렌지빛 조명이 넘실거리는 운하와 함께 기억되곤 한다. ⓒboybeen


나는 특히 현실 속에 ‘없는 것 같은’ 무언가를 공부해야 한다는 점이 가장 큰 고민이었다. 러시아 소설이 아무리 어렵다지만(등장인물의 이름이 긴 건 기본이고,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이름을 쓰는 등), 꾸역꾸역 읽다 보면 나름 재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거의 모든 소설에 나오는 ‘넵스키 대로’가 실존한다고 해서 한국에 있는 내게 ‘호그와트’ 이상의 현실감을 주지는 못한다는 건 풀리지 않는 문제였다. 웬만한 관광컨벤션학을 부전공으로 이수하며 웬만한 과제마다 답사를 꼭 다녀와야 했던 게 번거로웠지만, 괜히 부러운 마음이 들었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여행의 마지막 도시, 제정 러시아의 수도이자 러시아 문학예술의 중심지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목표는 내 전공도 현실 속에 있다는 걸 몸으로 느끼는 것이었다. 나에겐 첫 답사인 셈.


삐쩨르(상트페테르부르크를 현지식으로 부르는 단어)를 배경으로 한 숱한 작품들 중에서도, 의경 시절 경찰서에서 읽으면 왠지 몰입할 수 있을 것 같아 골랐던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테마로 정했다. 선민의식에 빠져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 대학생 라스콜리니코프가 결국 ‘자신이 더럽힌 대지’에 입맞춤했던 센나야 광장. 그 근처에 도스토옙스키가 거주하며 죄와 벌을 집필했던 덕에 소설 속 골목, 건물, 다리 하나까지 실제로 찾아볼 수 있었다. 지금은 여느 지역 시장이 그렇듯 분주하게 상인과 시민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광장을 바라보며, 러시아 전통 도너츠인 삐쉬끼와 산딸기와 베리로 만든 주스인 모르스를 처음 먹어 보았다.


제정 러시아 시절 겨울궁전(여름궁전도 있음)으로 불렸던 에르미타주 미술관. 전체 관람로는 27km, 작품은 270만 점이니 몇 번으로는 다 볼 수 없는 규모다. ⓒboybeen


다만 그 일대에 ‘여기서 도스토옙스키가 죄와 벌을 썼음!’ ‘여기에 <죄와 벌>에 나오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살았음!이라는 표지판을 제외하곤 별다른 안내가 없어서 오래된 블로그 게시글 몇 개를 참고해야 했다. 나름 러시아 스러운 무심함 덕분에 뻔한 관광 같지 않게 탐험하는 재미가 있었다. 다행히 19세기의 건물을 지금까지도 그대로 간직한 덕에, 번듯한 지하철역까지 생겼음에도 도스토옙스키가 피부로 느꼈을 북적이면서도 음침한 분위기는 남아있었다. 책을 산 게 죄고, 읽는 게 벌이라던 그 책을 수업에서 다시 마주하게 된다면 분명 색다른 떨림이 있을 것만 같았다. (실제로 이 경험은 '19세기 러시아 소설' 전공 수업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다만,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고 본인의 집으로 도망가는 루트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한 듯했다. 그중에서 ‘내가 직접 이래저래 뛰어봤는데 이게 최단 루트다!’라는 당당한 후기를 발견해서, 그 루트대로 아주 몰입해서 뛰어 봤더니 딱 5분이 걸렸다. 일대가 심지어 차도 거의 다니지 않을 정도로 으슥한 골목길이 많아서 뛰는 도중에 사람을 거의 볼 수 없었는데, 라스콜리니코프는 범행을 저지르고서 나보다 더 절박하게 뛰었을 테니 목격자가 없을 법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 명이라도 나를 목격했다면 굉장히 의심했을 것 같기도 한데, 대로변에서 헉헉거리며 숨을 고르고 있자니 왠지 뿌듯한 마음에 막 웃었다.


1812년 전쟁 갤러리. 나폴레옹을 격퇴한 기념으로 전쟁 영웅들의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는 방이다. 표식 위로 제정 러시아의 쌍두 독수리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boybeen
1812년 전쟁 갤러리의 정중앙에 위치한 알렉산드르 1세의 초상화. 오늘날까지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역사적 승리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boybeen
작품이 워낙 많아서 어학연수 중에도 많이 갔지만 다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17-18세기 정물화가 모인 이 방은 일상적인 소재가 정겨워서 유독 기억에 남는다.  ⓒboybeen


이 글을 썼던 2018년 즈음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가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소개되며 인기 여행지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개인 배낭여행객인 나의 관점에서 그 열풍을 분석해 보자면, 오디오 가이드가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에르미타주 박물관, 성 이삭 성당, 그리스도 부활 성당 모두 300~500 루블만 내면 무려 한국어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특히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경우 방송인 김성주와 연극배우 손숙의 목소리로 해설을 들을 수 있는데, 어색한 보이스웨어도 아닌 유명인이 정성스레 녹음한 음성을 북유럽 근처에서 들으니 엄청 반가웠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장소는 그리스도 부활 성당이었다. 그 자체로도 너무 화려하고 멋졌지만, 네바 강 운하의 수로를 따라 걷는 길도 성당의 일부라 할 수 있을 만큼 자연스럽게 끌려 오게 만드는 시퀀스의 힘과 매력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 성 바실리 성당을 모델로 삼으며 붉은 광장 입구에서부터 이어지는 공간적 서사도 함께 참고한 건 아닐까? 넵스키 대로를 걷다가 돔 끄니기(해리포터에 나올 것처럼 생긴 서점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명실상부 중심에 위치한 점이 특징)를 끼고돌면 긴 수로 끝에 알록달록한 성당이 예고도 없이 튀어나오는데, 그 벅참을 모르는 사람과 함께 한다면 몇 블록 전부터 놀라게 해줄 생각에 설렐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수요일 오후 6시에만 작동하는 황금 공작 시계. 1,777년 예카테리나 대제가 궁전 중앙에 배치하였다. 일부러 맞춰서 간 보람이 있을 정도로 화려했다. ⓒboybeen
성 이삭 성당 전망대에서 내부로 보이는 유리창으로 찍은 사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제정 러시아의 수도답게 절제 없는 화려함에 현혹되는 도시였다. ⓒboybeen


사실 그리스도 부활 성당보다는 ‘피의 사원’이라는 이름을 더 자주 볼 수 있는데, 그 자리에서 제정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폭탄 테러*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인 알렉산드르 3세가 아버지를 기리며 성당을 건축했는데, 내부에는 사고를 당했던 위치도 보존되어 있었다. 니콜라이 1세 재위 시절 발발한 크림 전쟁에서의 패배 이후 즉위한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 해방령, 군제 개혁, 사법 개혁, 지방 자치제 도입 등 사회 전방위적으로 자유주의적인 개혁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전제군주정에 대한 불신과 사회적 불만으로 인해 인민주의와 허무주의를 표방하는 '인민의 의지당'의 테러로 1881년에 암살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제정을 무너뜨리려 했던 이 테러는 오히려 그의 후계자인 알렉산드르 3세가 전제정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는데, 알렉산드르 3세가 아버지의 사망에 큰 충격을 받아 반정부 테러리스트와 혁명가들을 본격적으로 처단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전제주의 정치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신기했던 건 그런 무서운 별칭과 달리 내부는 방문했던 어떤 성당들보다도 화려했다는 점. 모든 벽과 기둥이 모자이크화로 채워져 있어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오디오 가이드에 따르면 당대 유명한 화가들은 싹 다 동원되었다는 듯했다. 아름다운 만큼 더 비극적이었던 공간이었고, 아버지를 잃은 아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오디오 가이드의 말미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많은 문화재들이 크고 작은 전쟁들과 소련 시기를 겪으며 상당 부분 훼손되었고, 지금까지도 복원 중이라는 것. 피의 사원만 해도 1907년에 처음 공개된 후, 종교를 금지했던 소련 시절에는 창고 등으로 쓰이다가 90년 후인 1997년에야 다시 문을 열 수 있었는데, 복원에 쓰인 기간만 건설 당시의 24년보다 긴 약 27년이 들었다고 한다. 사원 한 편에 작은 타일 하나까지 복원하는 과정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어떠한 한 문화재, 나아가 한 도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함께 볼 수 있었다. 일개 관광객인 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며 여행자로서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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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박 34일,

11개의 도시와 바이칼호수까지!

10,000Km를 넘게 달렸던

2018년 스물셋 여름날의 기억들



01 프롤로그 : 좋아할 수 있는 일만 하며 살아가고 싶은데, 전공자도 전공자라서 러시아는 무서워요

02 동해항 : 배 타고 러시아 가는 건 영화에서나 봤지

03 블라디보스토크 1편 : 반가움에 '끝내주는 가게'를 소개해주겠다는 술 취한 현지인

04 블라디보스토크 2편 : 잘못 부른 택시가 폭우 속에 20분을 기다리다

05 울란우데 도시편 : 전 세계에서 가장 큰 42톤 짜리 레닌 두상이 있는 도시

06 울란우데 이볼긴스키 다짠편 : “다 끝내고 다시 시작할거야.” 사연 있는 현지인과 사찰을 걷다

07 울란우데 린포체 박샤 다짠편 : 부산(釜山) 사람은 평원에 약해

08 바이칼 호수 알혼섬 후지르마을 입성편 : 편도 6시간, 알 사람은 안다는 호수의 섬

09 바이칼 호수 북부 투어편 : 바다가 없으면 답답하다는 아빠를 호수에서 이해하다

10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1편 : 수영은 못 해도 무작정 IN THE BAIKAL

11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2편 : 카약도, 인생도 뒤집어지기는 쉽지 않아

12 이르쿠츠크 1편 : 유배 귀족들이 일군 시베리아의 파리에서 좋은 학생으로 인정받다

13 이르쿠츠크 2편 : 유노스찌(젊음)섬, 청춘은 그 자체로 노 프라블럼

14 시베리아 횡단열차 : 러시아 군인 앞에서 꺼낸 K-POP이 왜 하필 ‘이등병의 편지’였을까

15 노보시비르스크 : ‘노잼도시’에도 사람은 산다, 그래서 재밌다

16 예카테린부르크 1편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서 마이클 잭슨을 기념하다

17 예카테린부르크 2편 : 치킨텐더를 시켜서 닭날개를 받아도 맛있는 게 여행이다

18 카잔 1편 : 자퇴한다더니 교환학생의 도시를 예습해도 되는 걸까

19 카잔 2편 : 정교회 성당 옆 이슬람 사원에서 느껴보는 연방국의 넓이

20 니즈니노브고라드 : 러시아에서 조국을 수호한 날에 한국 예비군으로서 축하를 받은 사연

21 황금고리 1편 블라디미르 : 으슥한 식당 한 구석 오크통에서 꺼낸 꿀술, 메도부하

22 황금고리 2편 수즈달 : 1,000년 전 방어요새도 이제는 선베드 명당

23 모스크바 1편 : 러시아어 전공자면 성 바실리 성당 앞에서 울어도 주책은 아니지?

24 모스크바 2편 : 모스크바의 871번째 생일, “오늘 모스크바는 잠들지 않습니다.”

25 모스크바 3편 : 지방 사람은 서울 한 번도 결심이 필요한데, 모스크바는 어떻겠어

26 모스크바 4편 : DIY가 취미가 아니라면 마트료시카는 꼭 열어보자

27 상트페테르부르크 1편 :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28 상트페테르부르크 2편 : 책을 산 게 죄고, 읽는 게 벌이라던 <죄와 벌> 따라 ‘도망’가기

29 상트페테르부르크 3편 : 비행기 시간 남았으면 투어 시켜줄게, 마지막 택시기사님의 호의

30 에필로그 : 스물셋의 나름 괜찮았던 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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