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상트페테르부르크 1편 : 노어노문학과 자퇴하러 가보는 러시아
11번째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건 새벽안개가 채 가라앉지 않았을 때였다. 이젠 익숙해질 법도 한 분주한 아침의 대도시 기차역. 도착했거나, 떠나거나, 혹은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사람들이 승강장을 가득 메우고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이런 평범한 풍경을 방금 뒤로 했지만 문득 그리워지기도 하여 계단을 오르다 잠시 뒤돌아보기까지 했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나만 다른 사람들과 다른 템포로 걸으며 새로운 도시에 내딛는 것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무겁게 맴돌았다. 전 일정 중 처음 타 본 3등석 2층이 생각보다 불편했다고, 하늘은 또 왜 이렇게 흐리냐며 괜히 투덜거려 보았지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꼬박 일 년을 넘게 꿈꿔온 여행이 벌써 한 달을 지나, 이제는 며칠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게 아무래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 여행을 준비하고 실제로 진행하며 아쉬움도, 부담도 컸던 것 같다. 여행에 잘하고 못하고 가 없다지만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은 다들 있기도 하고, 스물셋이라는 나이가 남들의 평가에도 쉽게 휘둘리는 나이기도 했으니까. 첫 번째 여행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잠시 비켜두었던 마음들이 더 커지는 순간을 잠시 가졌다. 아무튼 내 여행은 이어져야 했고, 그렇게 난 마지막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전체 일정 중 최북단. 10월부터 눈이 온다는 말이 사실이었던 건지 벌써부터 다들 얇은 외투를 입고 있었다. 계획을 짤 때 가장 먼저 고려했던 건 러시아가 추워지기 전에 여행을 끝내는 것이었다. 특히 마지막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가 관건이었는데, 여름엔 백야, (조금만 더 올라가면) 겨울엔 오로라까지 볼 수 있는 북유럽의 날씨를 가늠할 수가 없었던 게 컸다. 실제로 이 여행을 마친 후 이어지는 겨울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1달 정도 연수를 왔었는데, 체감 온도가 영하 30도라는 알림을 자주 받았을 정도로 추웠다. 유리창과 물병이 어는 건 익숙해졌지만, 11시에 해가 떠서 16시에 해가 지는 삶은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기숙사 옆 대교에 달린 스칸디나비아로 향한다는 표지판을 보며, 베란다에 잠시 둔 것 만으로 차가워진 음료수를 마실 때마다 '이 동네의 삶은 이런가 보다' 생각해 볼 뿐이었다.
그런데 ‘가늠이 되지 않는다’는 표현이 이 도시에 꽤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우선 이름부터 엄청 기니까. 하지만 이름만 잘 읽어도 이 도시의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성스러운/표트르 대제의/도시라는 뜻인데, 서구 유럽을 모델로 아주 적극적인 개혁 정책을 펼쳤던 표트르 대제가 말 그대로 갈아엎어가면서 만들어낸 제정 러시아의 수도라서 붙은 이름이다. 그 갈아엎은 곳이 발트해로 이어지는 네바강의 늪지대였기 때문에 ‘북유럽의 베네치아’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운하가 많은 것.
그리고 표트르 대제가 모스크바의 중세가 아닌 유럽의 근대를 적극적으로 표방하여 건설한 도시인만큼, 러시아의 다른 어떤 도시보다 유럽의 느낌이 강했다. 가이드북이나 각종 후기들마다 ‘러시아가 유럽인지, 아시아인지 헷갈릴 땐 여길 와보라’는 말을 심심찮게 볼 수 있을 정도. 게다가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며 도심지 내 고층 빌딩에 대한 규제가 엄격한 탓에, 18-19세기 건축물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어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실루엣부터 상당히 달랐다. 여담으로는 내부도 많이 달랐다. 18-19세기 건축물에 에어컨은 달아도 엘리베이터는 힘들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캐리어 여행자라면 숙소 후기를 꼭 잘 봐야 한다.
초가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왠지 내가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비현실적이었다. 별 다른 수식어를 붙이기도 힘들었다. 그냥 예뻤다. 낡았다는 말보다 빈티지라는 말을 써야 할 것 같은 골목들이 높고 넓고 맑은 하늘과 어우러지고 있었고, 그 풍경이 수십 개의 운하에도 담겨 있었다. 어디선가 본 그림, 언젠가 읽은 러시아 문학 속에 있는 기분. 사실 예전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툭하면 ‘무슨 작가가 이 건물에 살았음!’이라거나, ‘여기서 그분이 뭘 썼음!’이라는 명패가 튀어나오기도 했다. 같은 풍경을 보았을 그 옛날의 누군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골목마다 숨겨진 이야기들을 상상해 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유독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선 계획하고도 하지 못했던 것들이 많다. 늘 이번엔 계획했던 곳으로 꼭 직행하겠다며 마음먹곤 어딘가로 새 버리는 일들이 자꾸 생겼다. 첫날 성 이삭 성당에서 딱 그런 일이 있었는데, 아무리 성당이 멋지다한들 날씨가 더 좋았기 때문에, 표만 빠르게 끊고 잠시 네바강 구경을 가기로 했다. 그렇게 홀린 듯 강을 걷다가, 푸쉬킨이 마지막 결투를 앞두고 들렀다던 카페에 들렀다가, 얼떨결에 넵스키 대로까지 갔다가, 시계를 봤더니 폐장까지 딱 1시간 남아있었다. 성당 입장권뿐만 아니라 오디오 가이드와 전망대 이용권까지 풀 패키지로 샀던 터라 표 값이 상당했는데 말이다.
아무리 그때 루블 환율이 좋았다고 한들 길에 버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넵스키에서 성 이삭 성당까지 미친 듯이 달려서 겨우 오디오가이드 1 회독을 했고, 그 수백 개의 계단을 뛰어 올라가 전망대도 몇 바퀴씩 돌았다. 다행히 예전에 대외활동으로 왔을 때 얼추 보긴 했지만, 이번에는 구석구석까지 여유롭게 볼 계획이었는데 시원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게 폐장 시간을 꽉 채우고 '너만 가면 나도 퇴근해'라는 직원분들의 아련한 눈빛을 받으며 마지막으로 나왔는데, 그 상황이 나름 재미있어서 길에서 막 웃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선 딱 두 가지만 명심하면 될 것 같다. 계획이 틀어지더라도 전혀 잘못된 게 아니고, 우연히 들어간 그 골목이 원래 계획인 척 해도 괜찮은 도시라는 것. 기분과 감을 온전히 믿어도 되는 이 도시를 조금씩 좋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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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박 34일,
11개의 도시와 바이칼호수까지!
10,000Km를 넘게 달렸던
2018년 스물셋 여름날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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