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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ybeen Jul 10. 2024

DIY가 취미가 아니라면 마트료시카는 꼭 열어보자

#26 모스크바 4편 : 노어노문학과 자퇴하러 가보는 러시아

이번 편은 사진 설명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편하게 관람해 주세요! ⓒboybeen


모스크바, 교통체증


모스크바에서의 첫날. 결국 여기까지 왔다는 게 벅차고, 또 막상 와버리니 ‘이젠 뭘 하지’하는 허한 마음에 붉은 광장을 지나 모스크바강의 노을을 보고 있었다. 알록달록하던 도시가 붉은빛으로 저물어가는 시간. 실루엣뿐인 모스크바가 강 속에서 넘실거렸다. 바쁘게 지나가던 사람들도, 꽉 막힌 퇴근길의 차들도 잠시 멈춰 서고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한강 위를 걷는 서울 여행자들의 마음이 이랬을까. 이런 경치면 퇴근길 교통정체도 괜찮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걸 보면 그날의 난 기분이 정말 좋았나 보다.

 


굼 백화점, 100 루블 아이스크림


국영 백화점 굼(Гум)은 중앙 백화점 쭘(Цум)과 함께 러시아 곳곳에서 볼 수 있지만, 역시 모스크바의 굼이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하다. 규모도 규모지만, 영화에서도 쉬이 보기 힘든 화려한 조명과 장식 덕분에 백화점보다는 테마파크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당연히 러시아의 중심에 있는 백화점이기에 명품 브랜드로 가득 차 있는데, 쇼핑에 큰 관심이 없는 나 같은 여행자들은 유일하게 100 루블 짜리 아이스크림을 사 먹곤 한다. 패키지 관광객도, 개인 관광객도, 현지인도 줄을 서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커다란 분수대 앞에 앉아 러시아 스러운 무표정으로 한 입씩 먹는 풍경이 나름 귀엽다. 사실 막 엄청 맛있지는 않은데, 이렇게나 화려한 백화점 정중앙 벤치에서 팔자 좋게 앉아서 ‘2000원 정도면 뭐~’하며 내 돈 내고 사 먹는 쾌감은 있었다. 평일 아침에 여유롭게 백화점 둘러보는 졸부가 된 기분이 은근히 짜릿했다. 물론 난 아이스크림콘까지 알뜰살뜰 씹어 먹고 얌전히 나왔고, 1층보다 100 루블 정도 더 싼 기억이 있던 3층 화장실까지 걸어 올라가 볼 일을 해결했다.



이즈마일로보 시장, 마트료시카는 꼭 열어보자


모스크바 여행 예능에 꼭 등장하는 전통시장. 멀리서 보면 성 바실리 대성당처럼 알록달록해서 전통시장이라고는 상상하기도 쉽지 않고, 오히려 테마파크 입구처럼 화려하다.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옆에 실제로 작은 놀이공원이 있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나 이르쿠츠크에서도 뜬금없이 회전목마나 대관람차를 볼 수 있었는데, 그 차가워 보이던 러시아인들이 남몰래 놀이공원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니 귀엽기도 했다. 이즈마일로보 시장까지 가는 길에도 아기자기한 좌판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동묘시장처럼 골동품부터 옷가지, 집에서 만든 음식까지 다양한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마침 일요일 아침이라 장날이 참 정겹고 좋다며 생각한 순간 경찰들이 단속을 시작했다. 이렇게 대규모인데 설마 불법인가? 순찰이겠지, 하고 뒤돌아보니 이미 다들 잽싸게 쓸어 담고 튄 이후였다. 아무리 예쁘고 아기자기해도 삶은 현실이구나.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전통시장’에서 외국인으로 걸어본 건 처음이어서 조금 신기했다. 예상보다 가격이 좀 비싸서 후려쳤는데(흥정이 아니라 정말 후려쳤음), 생각보다 잘 먹혔다. 역시 바가지가 있었던 걸까. 심지어 나는 러시아어로 물어보고, 점원은 한국어로 대답해 주는 기묘한 대화가 이어진 적도 있었다. 보통 중국어로 호객하는데 대체 뭘 보고 한국인이라고 바로 생각한 건지는 궁금했다. 투블럭펌에 동그란 안경을 써서?


나는 자석 여러 개랑(도시마다 하나로는 만족 못함) 러시아 풍경이 새겨진 기다란 자수를 몇 개 사 왔다. 퀄리티나 크기에 비해 몇 천 원 정도로 엄청 싸서 아주 만족스러웠는데, 꽤 많이 사서 이곳저곳에 나눠줬음에도  ‘몇 개 더 사서 주변에 막 줄 걸’하고 아쉬워했을 정도. 그런데 아무리 예쁜 게 많아도 바가지를 넘어 호구가 되는 건 항상 조심해야 한다. 특히 마트료시카를 살 때는 말이다. 이모부께서 러시아 출장을 다녀오신 후 유치원생 사촌여동생에게 줄 마트료시카를 깜빡하셨는데, 집안이 뒤집힐 정도로 울었다고 해서 내가 대신 사가기로 했었다. 그래서 대략 한 5-6개 정도 들어있는 마트료시카를 가리키며 점원에게 열어달라고 했더니 제일 작은 애가 아예 색칠이 안 된 생 나무였다. 서로 눈만 마주치고 한 3초 정적. 그분이 먼저 하하하 웃었다. 나도 하하하 웃고 다른 거 달라고 했다. 나까지 민망해지는 그 표정이 간혹 생각난다.



러시아 박물관을 더 잘 둘러보려면


러시아 박물관에 가면 으레 방마다 아주머니 한 분이 멍하게 앉아계신다. 경비 겸 안내 역할이신데, 정말 미친 짓만 안 하면 가만히 보고만 계신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에게 손짓 발짓으로 물어보면 엄청 열심히 설명해 주신다! 무기고에서는 심지어 교대하러 오신 아주머니까지 가세해서 내 질문에 대한 토론을 하셨을 정도로! 토론 주제는.. 황제가 쓰던 마차 위에 달린 나뭇잎 장식이 무슨 나뭇잎이었나는 것이었고(나는 왜 그런 걸 물어봤을까?) 열띤 토론 끝에 올리브 잎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나뭇잎'은 러시아어로 알지만, '올리브'나 '월계수' 같은 명사는 알지 못해서 열심히 번역기를 돌리며 소통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 고마운 순간이 모여 여행이 되었다.



그래도 대도시의 관광지라, 가끔은 차갑기도 했다.


모스크바에 도착하기 전에 대도시라 지금껏 만난 사람들보다 훨씬 차가우면 어쩌나 걱정을 엄청 했었다. 그리고 아쉽게도 몇몇 사람들은 그러했다. 관광객이 어마어마하게 몰리는 도시에서, 관광지만 둘러보며 관광객 같은 행색으로 다녀서 그런 걸까. 특히 사진 찍는 것에 대해 아주 민감한 경우가 많았다. 무기고 같은 중요한 박물관이면 이해하겠으나, 아르바트 거리 사진을 몇 컷 찍었더니 좌판에서 그림을 팔고 있던 아저씨가 화를 내며 쫓아왔다. 자기 그림을 찍지 말라는 뉘앙스였는데, ‘안 찍었는데요?’하며 메모리를 보여주니 바로 돌아갔다. 비슷한 일은 체인 레스토랑 ‘무무(Муму)’나 이즈마일로보 시장에서도 있었는데, 카메라를 쥔 나를 보는 순간 ‘노 삐죠(중국어로 사진인 듯?)’라고 불 같이 화를 내서 처음엔 약간 주눅 들고 그랬었다. 소리만 컸을 뿐 아무 위협은 없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덕분에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대비를 하게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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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박 34일,

11개의 도시와 바이칼호수까지!

10,000Km를 넘게 달렸던

2018년 스물셋 여름날의 기억들



01 프롤로그 : 좋아할 수 있는 일만 하며 살아가고 싶은데, 전공자도 전공자라서 러시아는 무서워요

02 동해항 : 배 타고 러시아 가는 건 영화에서나 봤지

03 블라디보스토크 1편 : 반가움에 '끝내주는 가게'를 소개해주겠다는 술 취한 현지인

04 블라디보스토크 2편 : 잘못 부른 택시가 폭우 속에 20분을 기다리다

05 울란우데 도시편 : 전 세계에서 가장 큰 42톤 짜리 레닌 두상이 있는 도시

06 울란우데 이볼긴스키 다짠편 : “다 끝내고 다시 시작할거야.” 사연 있는 현지인과 사찰을 걷다

07 울란우데 린포체 박샤 다짠편 : 부산(釜山) 사람은 평원에 약해

08 바이칼 호수 알혼섬 후지르마을 입성편 : 편도 6시간, 알 사람은 안다는 호수의 섬

09 바이칼 호수 북부 투어편 : 바다가 없으면 답답하다는 아빠를 호수에서 이해하다

10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1편 : 수영은 못 해도 무작정 IN THE BAIKAL

11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2편 : 카약도, 인생도 뒤집어지기는 쉽지 않아

12 이르쿠츠크 1편 : 유배 귀족들이 일군 시베리아의 파리에서 좋은 학생으로 인정받다

13 이르쿠츠크 2편 : 유노스찌(젊음)섬, 청춘은 그 자체로 노 프라블럼

14 시베리아 횡단열차 : 러시아 군인 앞에서 꺼낸 K-POP이 왜 하필 ‘이등병의 편지’였을까

15 노보시비르스크 : ‘노잼도시’에도 사람은 산다, 그래서 재밌다

16 예카테린부르크 1편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서 마이클 잭슨을 기념하다

17 예카테린부르크 2편 : 치킨텐더를 시켜서 닭날개를 받아도 맛있는 게 여행이다

18 카잔 1편 : 자퇴한다더니 교환학생의 도시를 예습해도 되는 걸까

19 카잔 2편 : 정교회 성당 옆 이슬람 사원에서 느껴보는 연방국의 넓이

20 니즈니노브고라드 : 러시아에서 조국을 수호한 날에 한국 예비군으로서 축하를 받은 사연

21 황금고리 1편 블라디미르 : 으슥한 식당 한 구석 오크통에서 꺼낸 꿀술, 메도부하

22 황금고리 2편 수즈달 : 1,000년 전 방어요새도 이제는 선베드 명당

23 모스크바 1편 : 러시아어 전공자면 성 바실리 성당 앞에서 울어도 주책은 아니지?

24 모스크바 2편 : 모스크바의 871번째 생일, “오늘 모스크바는 잠들지 않습니다.”

25 모스크바 3편 : 지방 사람은 서울 한 번도 결심이 필요한데, 모스크바는 어떻겠어

26 모스크바 4편 : DIY가 취미가 아니라면 마트료시카는 꼭 열어보자

27 상트페테르부르크 1편 :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28 상트페테르부르크 2편 : 책을 산 게 죄고, 읽는 게 벌이라던 <죄와 벌> 따라 ‘도망’가기

29 상트페테르부르크 3편 : 비행기 시간 남았으면 투어 시켜줄게, 마지막 택시기사님의 호의

30 에필로그 : 스물셋의 나름 괜찮았던 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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